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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12월31일 수요일 12 (제228호) 기획 절사공박유선생의삶은청빈한선비적삶으로더욱빛난다.1617년(광해군9)에무과에급제하였음에도권귀(權貴) 를멀리하고10년동안벼슬에나아가지 않았다.사람들이혹벼슬을권하면번번이말하기를,“나는무신이고,시절은이미평온하다.지조를굽히고권세 가에게아첨하면어찌부끄럽지않겠는 가?”하였다.이는무인(武人)으로서 위급할때는나라를지키겠지만평화스러운때이니나아가녹을취하지않겠다는 것이었다.그리고국난에당하여,“국가 에난이있으니원컨대군사한떼를자원하여이끌고오랑캐를대적하겠다.”하면서병자호란에홀연히몸을던진구국 의충절을보였다.그러나그의이같은충 절은함께했던부하병사손운강과박평남에의해전해지면서신유한에의해‘박절사전(朴節士傳)’으로엮어지며세상 에드러났다.그리고이후현창사업을이 어가지못했으나선생의삶을재조명하려는학계의연구가최근이어지며지난12일밀양문화원주관으로학술대회가 개최되어이를바탕으로소개해본다. 박유 선생의 자는 경배(景培) 호는 죽계(竹溪)이 다. 1576년 8월 8일 경남 밀양시 산외면 죽원리 집에 서 태어나 1627년 1월 21일 평안도 안주성 전투에서 졸해향냔52세이다. 밀성박씨충헌공파중조박척의증손휘윤문(129 8-1372)은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부인과 함께 밀양수산현에머물러살아충헌공파밀양입향조가 되었다.그의 아들 6남중 장남 밀양은 전법판서공파 파조이고, 그의 증손자 박갱(?-1427)은 8대조인데 정종의사위로조선초의대표적인문벌이었다. 고조는 춘추관 기주관과 나주목사를 지낸 박한 (朴翰)이고증조의휘는숭겸이고조부의휘는문전 (1528-1569), 아버지의 휘는 희기(希夔), 어머니는 순천박씨박망(朴望)의따님이다. 선생의생애는세부분으로구분된다.첫번째생애 는 출생이후 임진왜란과 왜군에 붙잡혀가 1605년 귀 환할때까지이다.공은어려서부터특이한자질과용 력을 나타냈고, 임란 때 부친을 모시고 산외면 앵봉 (鶯峯)에서 왜적을 피하던 중 식량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왔다가 왜놈들에게 발각되어 대마도에 붙들려 갔다.뗏목을 타고 탈출 하려다 실패했고,대판성(大 坂城,오사카)에서9년간지내다가1605년쇄환때귀 향했다.이역에서온갖회유에도불구하고살아서조 선으로 돌아가 부친의 생사를 확인하겠다는 효심이 돋보인다. 두 번 째 생애는 1605년 귀환 이후 1617년까 지문무를겸전하기위해노력한시기이다.오한손기 양(孫起陽)에게학문을배우고,양무공김태허(金太 虛)에게 활쏘기를 익혔다. 그가 30세의 늦은 나이임 에도실력을기른이유는만일의국가위기에대비한 것으로효심을충심으로전환할수있는바탕이되었 다.세번째생애는1617년무과급제하고권지훈련원 봉사(權知訓鍊院奉事,종8품)가되었으나영예와이 익에뜻이없어10년을집에머물다가1627년정묘호 란이 일어나자 자원해 안주성에서 싸우다가 장렬하 게전사하기까지의기간이다.당시즉각자원한것은 평소임진왜란의여파와후금의침략을걱정하며만 일국가위기가발생하면기꺼이순국하겠다는강한 의지가내면에잠재되어있었기때문에가능했다. 임진왜란시기에밀양은지리적인위치때문에일본 군의 침입을 초기부터 받아 점령되었으며, 종전까지 지속적인피해를받았던군현이었다.임진왜란시기에 밀양은 일본군의 침략 제1로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일 본군의 침략을 받았다.또 강화회담 시기에 밀양은 일 본 측에는 교두보이자 이동로였으며, 조선 측에는 왕 조의 권력이 행사 되는 최후 보루이자 군량 운송로였으 며, 명나라에도 최후 거점으로서 강화회담의 루트로 인식되었다.정유재란시기에밀양은일본군우군의진 격로에위치하여침략을당하였다.이과정에서밀양에 서도많은사람이일본군에게포로가되었다. 임진왜란시기박유의삶은시기별로세단계로나 눌수있다.먼저밀양에서피난중일본군에게납치되 었다.이때 일본군은 1592년 5월 2일 한성 점령 이후 8 도를분군하여을시행하였다.18)박유는1592년(선조 25, 임진)에 섬나라 도적이 크게 창궐하여 밀양이 적 의침입으로화가미쳤다.이때그의나이17세에아직 결혼전인데,아버지와더불어산곡에서병란을피하 였다.그때에홀로산외에나와부친을공궤(供饋)하 기 위하여 곡물을 지고 가다가 산적(散賊)에게 포로 (捕虜)되어 적의 진중에 끌려갔다. 적이 효수(梟首) 하려는데, 적의 추장(酋長)이 절사(節士)의 용모(容 貌)에 괴걸(魁傑)하고 위대함을 보고 진중에 명령하 여감히칼을대지말고,도주하지못하도록하면서살 해되지않았다.이로부터지키는자가더욱굳게금하 여다른지역포로들과더불어소통하지못하게하였 다.그런데임진왜란때포로는10만명내외로추정된 다.임진왜란이끝날무렵일본의수교요청에대한정 부 측의 회답이라는 기본 성격을 지니면서 왜란으로 납치된피로인의 쇄환을 주요 목적으로삼았다.그래 서 일본 막부(幕府)의 오해를 사전에 불식하고 쇄환 (본토로 다시 이주시키는 정책 또는 그 행위)을 위한 그들로부터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정식으로 포로 쇄환사라고부르게되었다.이어2차(1617),3차(1624) 까지명칭을그대로사용하면서파견하였으며,이결 과 일부 포로들이 송환되어 왔다.적어도 3차에 걸쳐 회답쇄환사(回答刷還使)로서 일본에 파견 된 3사신 들은모두피로인의쇄환에적극노력하였다. 강화과정에서일본에파견되었던유정(惟政)이돌 아오면서우리나라남녀3천여명을쇄환(刷還하였다. 유정은 1604년(갑진)봄 왜인 귤지정(橘智正)이 와서 통신을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유정에게 가서 적정을 탐색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돌아왔 다.그리고선생또한포로로잡혀대마도를거쳐대판 (大坂,오사카)에갔다가쇄환(刷還)되어돌아왔다. 1597년(선조 30,정유)에 군사를 거두어 일본군이 귀국할 때,박유를 배에 싣고 같이 건너가면서 말하 기를, 뷺조선의 보기(寶器)와 기화(奇貨)를 얻음이 이 사람을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뷻 하였다. 대개 적 중에 관상을 보는 자가 있어 절사의 골격이 비상 하 며 반드시 몸을 국난에 바칠 것이라 하여 데려다 가 두었다가장재(將材)로사용하고자함이었다. 대마도에 이르러 왜적들이 날로 효유하여 그의 생 각하는바에맞게하였으니.그때절사의나이20여세 였다.용력이 있는 사람으로 지내면서 울울함을 숨길 수없어높은언덕위에올라가서우리나라꽃을바라 보고문뜩한번뛰면몸이바닷가에떨어질것같았다. 옆에서 지키는 자가 잠깐 해태(懈怠)함을 보고 물가 에흩어져있는삼나무판을모아서떼를지어바람을 타고바다에떠서팔로판자를잡고헤엄쳤으나,수로 로지경을넘지못하여왜적이문득뒤를쫓아잡히었 다.이와같이한것이세차례가되자.왜유(倭酋,일본 의 옛 지방 영주 또는 우두머리)가 칼을 잡고 꾸짖어 말하기를뷺무슨이유로도망하려하는가.도망하는자 는 국법에 마땅히 죽이는 법이니라뷻 하자. 대답하기 를,뷺내가 부모가 있어도 생사를 알지 못하니,살아서 몸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서 혼이라 도돌아가리라.”하였다.왜가말하기를,뷺말인즉직언 (直言)이라.자기 손을 보이며 한쪽으로 창해를 능멸 하게여기니,가연천하장사라뷻하고잘대우하였다. 드디어 동북쪽 수로 수십 리를 가서 오사카에 이르 니, 이곳이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국도(國都)라. 그 때에 秀吉은 죽고 국내가 크게 혼란스러운지라,덕천 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이 모리(毛利)과 더불어 서로 다투었다. 우리나라의 피로인들 중에 가 두어두고조금도어렵게여기지않았다. 선생은 쇄환되어 고향에 돌아오자.우선 부친을 위 해 3년 상을 마치고, 학문과 방법을 수련하여 무과에 급제하였다. 1605년(선조 38, 을사) 봄에 조정에서 수 적( 씁 敵,원수의적)은없애고겐지(源氏,일본에서미 나모토,源 성을 가진 씨족을 의미)처음으로 정하자, 사명대사를 일본에 보내어 피로(披擄)된 남녀 3천여 명을싣고왔다.그때에선생의나이30이라.이에귀국 함을얻었다.박유는고향에귀환하여부친이난중에 죽음을 듣고 땅을 치고 통곡하고, 상례(喪禮)에 의하 여추복(追復)으로3년을행하였다. 오랫동안사람들과비분강개함을이야기하다가눈 물을흘리며말하기를“내가젊어서불행이도왜구의 소굴에서거의죽을뻔하다가지금다행히돌아와성 군의 백성이 되었으나 머리털은 흰머리가 생겼다.내 가이날에이르렀는데도서검(書劍)익혀현세에이름 을올릴수없다면어찌장부라하겠는가?”라고하였 다.즉시같은마을사람으로벼슬을지낸손기양(孫起 陽)선생을찾아가수업하여12書史에통하고,활쏘기 를 절도사 김태허(節度使 金太虛)에게 배웠다. 그가 들어가서는 독서하고 나가서는 활을 연습하여 잠잘 때나 식사 중이나 걸어가면서도 입으로는 글을 외우 고 손으로는 활을 연습하여 비바람과 덥고 추움과 밤 낮을쉬지않았다.이에사람들이혹미친사람으로지 목하면, 웃으면서 대 답하기를, 뷺늦게 배우는 사람이 일 분의 광음을 아까워하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가는 어찌하리오.뷻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대황기사 (大黃騎射,말을타고활을쏘는고대기병전술)를잘 한다는명성을얻었다.그리고만력(萬曆)정사년(161 7)에 무과에 급제했다.급제후 집에서 10년을 지냈다. 이웃들이 벼슬하기를 권하면 즉답하기를 “무신이거 니 시절이 태평한데 절개를 꺾고 권세가에게 아첨하 여봉록과이익을바란다면부끄럽지않겠는가?”하였 다.그러다가도 남북 변경의 근심에 이야기가 미치면 팔을 걷어붙이고 머리카락을 곧추세운 채 눈물을 흘 리며씩씩함을드러내지않은적이한번도없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병자호란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丙子胡亂)을합쳐부르는말이다.전자는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仁祖)가 즉위한 후 나타난 친명(親 命)배금정책(拜金政策)으로야기된후금의침입을 말하며,후자는조선의척화(斥和)에대한보복으로 일어난 의 침입이다. 정묘호란은 1627년(인조 5년, 후금 天聰 원년)2월 23일 부터 4월 18일(음력 1월 8 일-3월 3일)까지 약 2달 동안 후금(청나라)이 조선 을침입해서일어난전쟁이다. 광해군(光海君)을 축출하고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서인들이노골적인친명배금정책을피자후금은 조선에 대해 경계심을 갖기 시작했다. 후금은 대륙 정 복을위해서도배후의조선을확실히장악해둘필요가 있었다.이에광해군을위하여보복한다는명분을내걸 고전쟁을택했다.후금은1627년정월3만의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1627년 (天聰원년)1월후금의태종은대패륵아민(大貝勒阿 敏)과 패륄제이허랑(貝勒濟爾哈朗) 등에게 3만 명의 대군을거느리고조선을정벌하게했다.후금군은한윤 을 향도로 압록 강을 건너고 13일 義州를 공격하였다. 나라의관문이고국방상의요지인의주에는적의침공 을막을아무런대책도세우지않았고군수품도마련하 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성을지키던장병들은용감하게싸워적병을다수죽였 으나 중과부적으로 지탱하지 못하였다.부사 이완,통 판 최몽량 등이 피살되고 대소의 장관과 수만 명의 민 병이도육되거나피로되었다.후금군은의주에대관8 명과병사1천명을남겨서지키게하고일부의병력으 로 철산의 모문룡을 공격하였으나 모문룡이 신미도 (身彌島)로도망감으로써잡지못했다.이어서후금군 의 주력은 정주(定州)를 거쳐 곽산(郭山)에 이르렀고 1 7일정주(定州)의능한산성(凌漢山城)을포위했다.성 을지키는조선병사들은일제히조총을쏘았지만다시 탄환을재기도전에돌격해들어간후금군에의해제압 되었다.선천부사기협(奇協)이전사하고,정주목사김 진(金搢)과 곽산군수 박유건(朴惟建)은 포로가 되었 다. 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저항했던 군사들을 전부 살해 했다.백성들은적에게포로로잡힌뒤전부머리를깎 였다.머리를 깎은 것은 포로들이 이제 자신들의 소유 가 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파죽지세로 도 성을 향하자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체찰사(都體察 使)로 삼아 적을 방어하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보 내근군(勤軍)을모집하였다. 그런데정묘호란때의의병은침략을당하는관서 지방의 의병은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한 자보의병 (自保義兵)이었지만 후방의 의병은 자기 고장을 넘 어 전방으로 출정하는 근왕의병(勤王義兵)이자 소 모의병(召募義兵)이었다. 이때 삼남지장에서도 의 병이 일어났지만 호소사(號召使)를 지방으로 파견 하고 난 후부터였으며,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이 점 에서 보면 박유의 창의와 참전은 대단한 의미가 있 다고하겠다.정묘호란시기에박유가전사한안주성 은 1월 20일 후금군 2만 명이 안주성 밖에 접근하여 안주성을사방에서에워싸고항복을권유하였다.남 이흠을비롯한장수들은끝까지항전하여사수할것 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후금군의 병력이 많다는 것 을 알고는 두려워하여 항복할 것인가. 항전할 것인 가의논의를거듭하였다.결국조선군의최후통첩을 받은 후금군은 1월 21일 새벽 안주성을 공격하기 시 작하였다.21일오전의전투에서는후금군의파상공격 을 조선군이 버티어 내었다.그러나 오후에 후금군이 세 차례 공격을 재개하였다.후금군은 높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 백병전을 벌였다.안주성의 방어군 은 후금군을 맞아 분전하였지만,수적인 열세를 극복 할 수가 없었다. 이때 4대문 안으로 진입한 후금군은 성안을수색하면서조선장령들에게항복을권유하였 다. 조선군의 일부가 남이흥에게 일단 항복하여 위급 함을 벗어나서 후일을 도모하자 했다.이때 남이흥과 김준은 싸우다가 죽기로 다짐했다. 마침내 안주 관아 의방어선마저무너지고후금군이진입하자남이흥을 비롯한 여러 장졸들이 비장한 최후를 마쳤으며,다수 의 장졸들도 함께 순국하였다.이때 박유도 안주전투 에서최후까지싸우다가장렬하게전사하였다. 안주성 전투 과정을 박유를 중심으로 살펴보면,다 음과같은세단계로나눌수있다.먼저밀양에서창의 하여 출정하면서 밀양부사 여유길(1558-1619)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아 출전하였다.1627년(인조 5) 丁卯年 에 金胡가 1618년(광해 10)戊午에 강수(降帥) 강홍립 으로 선도를 삼아 대군사가 침입하여 평안북도 용만 (龍灣)동쪽에서왕사(王師)가여러번패하였다.인조 가 강화도로 피난하여 급히 여러 도의 여사(旅師)를 징집하여 사방에서 김호(金胡)를 정벌할 때,절사(節 士)가옷을벗어던지고일어나빨리관가에나아가서 요청하기를,뷺국가에어려움이있으니,원컨대내가군 사일대(一隊)를자원하고오랑캐군사를대적하겠노 라.뷻 하였다. 밀양부사 여우길이 그 말을 기록하게 여 기고 그 태도를 장하게 여기에 궁도(弓刀)와 솜옷 한 벌을주었다.그리고박유는밀양에서안주까지먼길 을곧장달려와서바로전투에임하였다. 1월20일에군사가안주에도착하여그이튿날아침 식사전에호적(胡敵,오랑캐)이크게이르니소낙비와 비바람 같았다. 우리 군대가 아직 정돈하기 전에 적병 이북을치고따라오니,죽은자가들에가득하고,또상 장(上將)이화를입으니나머지무리가다무너졌다.절 사가부하8卒과더불어몸을가리고,울밖에서서졸병 으로하여금화살을뽑아달라고하여체진(遞進)하여 스스로활줄을당겨적에게쏘자,쏘는대로적이맞아 꺼꾸러졌다. 절사가 본래 오른손으로 활을 당기는데, 이때는 추격이 급하여 손에 깍지를 끼지 않고 이미 수 십 개의 궁시(弓矢, 화살)를 쏘니, 엄지손가락이 파열 되어 이 유혈(流血)이 실오리 같았다. 즉시 왼손으로 활 을 당기어 적을 향하여 발사함이 수없이 많았다.조금 뒤에적의선봉이몰려오자사람이모두조수(鳥獸,새 떼)같이 흩어졌다. 병졸 중에 손운강(孫雲江)이라는 사람이 있어 같은 동리에 사는데 절사의 옷을 잡고 부 르기를 일이 급하니 한갓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절사가 노하여 칼을 빼어 뷺내가 죽음을 돌아가는 것과 같이 보는 터에 너는 무엇 하는 말이냐.뷻하고,말을달려칼을들고적진중에뛰어들어 동서로 충돌 하다가 힘이 다하고 적(賊)에게 상을 입어 전사하였다.이사실은함께싸웠던손운강과박평남의 전언으로직접적으로지역사회에알려졌다. 이때 본가에는 3남이 있었는데, 손운강이 고향마 을에 돌아와서 고아와 더불어 서로 보고 통곡하며, 사실을알려1월21일에의사(義事)로서순절한사실 을화폭을보는것같이말하였다.원근에서듣는사람 이 모두 모여 조위(弔慰)하고, 또 군내에서 갑사(甲 ±)로 참전하였다가 살아서 돌아온 사람 박평남(朴 平男)이사실을고징(考徵)하였는데,박씨도또한절 사의부하라.목도한바가손운강말과같았다. 븮절사박공실기븯는조선후기밀양출신무신朴(15 74-1627)의 생애와 충절을 기록한 것으로 구성과 편 찬과정은다음과같다. 박유는정묘호란당시순절했으며,그의행적은당 시생존자손운강과박평남의구술증언을통해지역 사회에전승되었다.17세기후반에서18세기초,신유 한,유봉명,권경명 등 지역 문인들이 이 구전 자료를 바탕으로최초의문자기록을작성하였으며,이를중 심으로19세기 후반이후박유의후손들이묘도와사 우를 건립하면서 추가 자료를 편찬 집성하였다.이러 한기록의축적과재편찬과정을거쳐1934년븮절사박 공실기븯가 최종 간행되었다.절사박공실기는 서발류, 전기 및 행장류,묘지·묘표와 제향 관련 문서,그리고 후대의평가와발문등다양한문체의기록을포함하 며,17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300년에 걸친 자 료를 망라하고 있다. 서술 전략 측면에서 실기』는 단 순한사실의집적을넘어,박유의일생을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븮節義의삶븯으로형상화함으로써,후대가 기억하고추승할수있도록구성되어있다. 결과적으로 븮절사박공실기븯는 생존자의 구술, 지 역 지식인의 기록, 후손의 재편찬이라 는 다층적 전 승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박유 충절 서사가 장기간 지속되고 향촌 공동체의 기억으로 누적되는 과정을 잘보여주는문헌적사례라하겠다. 조선시대 두 차례의 전생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하는데는각지방사회에기반을잡은재지사족 의 활약이 크게 기여하였다. 두 전쟁을 모두 겪으면 서 밀양지역에서 활동했던 박유 선생은 흔치 않은 인물이다. 조선 후기의 밀양출신 박유는 성리학의 이해와실천을몸소행한실천적지사였다. 때문에 조선시대에 박유는 절사(節士)로 평가받 았다. 이것은 우선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에 전쟁 포 로로 잡혀갔다 쇄환되어 왔지만, 한 번도 일본에 굴 복하지않았기때문이다.아울러정묘호란시기에는 군사를이끌고안주로가서끝까지후금에항복하지 않고순절(殉節)하였기때문이다.사실정묘호란때 에는전국에서적극적이고자발적인창의와의병활 동이활발하지않았다.박유의행적은후대에전승되 면서 기억되고 계승되어 나갔다. 무엇보다도 먼저 『충열록(忠烈錄)』과 『박공절실기(朴公節實記)』를 통하여 박유의 기록이 공식화되었다. 특히 이 과정 에서 밀 양 지역의 재지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공론 을조성하여절사(節士)라는평가를받았다.비록이 것이 조선후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된 존주론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얻어진 결과라고 하더라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아울러 금계사와 죽계사의 건립, 향현에 등재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역사회에서도알려지고공인되었다. ※출처 븡동서대 미디어콘텐트학과 하강진 교수 ‘절사공박유의순국과후대현창사업’ 븡한국해양대 김강식 교수 ‘조선중기 절사 박유의 창의활동과기억’ 븡부산대 권정원 교수 ‘절사박공실기의 구성과 서 술전략’ 절사공 박유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생애와 선원세계 맺음말 학술대회를마치고발표자와종중원,문화원관계자가함께하며절사공이절사공의정신문화계승발전을다짐하고있다. 절사공부조묘와금양재,경남밀양시산외면금곡리. 임진왜란시기박유의활동 귀환하여무과에급제하기까지 정묘호란시기창의와활동 절 사박공실기(節士朴公實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