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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11월30일 일요일 12 (제227호) 기획 애한정박지겸선생은뛰어난문필가요효자이다.지금의충북지역문학을이끌었다할것이다.그가세운애한정에 는당시거유들이드나들 면서많은시문을남겼고,또그바탕위에충북지역문학의토대가되었다.특히계모를친모처럼모시면서아우들또 한정성스럽게훈육하여 큰선비로거듭나게하였으니21세기어지러운세상에더욱빛이나고있어소개해본다. 애한정 박지겸(知謙 1549-1623) 선생은 함양인이 다. 시조는 속함대군(速咸大君) 휘 언신(彦信)으로 신라경명왕의팔대군중의세번째로함양에봉군되 어 함양박씨 관조가 되었다. 高麗 예부상서(禮部尙 書) 諱 선(善)을 중시조로 받들고, 대대로 文科에 올 라 명벌(名閥)의 가문이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습(習)은太宗(이방원)과문과에동방급제하고자 헌대부 병조판서 겸 팔도순찰사출척사(八道巡察使 黜陟使)였으니, 이분이 공의 6대조(代祖)이다. 오대 조 휘 의손(義孫)은 문과에 급제하고 통훈대부(通訓 大夫)사헌부(司憲府)감찰 (監察)이 되었으며,高祖 휘 신동(信童)은 종사랑(從仕郞)으로 증 가선대부 (嘉善大夫)이조참판(吏曹參判)이다.증조부휘중검 (仲儉)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뒤에 자헌대부 (資憲大 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정종대왕 외손서이다. 조부 소요당(逍遙堂) 휘 세무(世茂1487 -1564)는 문과에 급제하여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 냈고,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예조판서(禮曹判書) 행통훈대부(通訓大夫)군자감정(軍資監正)에증직 되었으며 세계 최초 아동들의 학습서인 동몽선습(童 蒙先習)을 지었다. 아버지 수안공(遂安公) 휘 응립 (應立1517-)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통훈대부 행 수안 군수(遂安郡守)를지냈다.어머니는숙인(淑人)남양 홍씨(南陽洪氏)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행 (行)강음현감(江陰縣監)홍윤선(洪潤先)의 동생 현 감 홍윤균(洪潤均)의 따님이고 조부는 봉정대부(奉 正大夫:정4품)행(行)석성현감(石城縣監)으로의금 부경력 (義禁府 經歷)과 1495년에 병조판서 (兵曹判 書: 정2품)를 지낸 홍귀손(洪貴孫: 1446-1532)으로 율 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진외가(陳外家)가 된다. 후배(後配,全州李氏)소생의다른형제로둘째도촌공 (陶村公)지양(知讓:廣興倉守1562-1642),셋째 처사공 (處士公)지인(知認 : 處士), 넷째 소은공(素隱公) 지 훈(知訓:穆陵參奉), 다섯째 오암공(娛菴公) 지경(知 警:工曹正郞), 여섯째 잠야공(潛冶公) 지계(知誡:同 副承旨1573-1635)로시호(諡號)는문목(文穆)이다. 선생의 이름은 지겸(知 謙), 자(字)는 익경(益卿) 이며 호는 애한정(愛閑亭) 으로 수안공 휘 응립(應 立)과 어머니 숙인 남양홍 씨(洪潤均 의 따님) 사이 에 1549년 8(명종4 기유)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공 이 돌이 되기도 전에 어머 니를 여의었고, 열 살 무렵 에는 아버지 수안공 마저 병이 위중하였다. 그때 공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 고 직접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의 온기를 고르게 하 여극진히아버지를간호하였다. 공이태어난집안은대대로서울반송방(盤松坊,현 서대문 적십자병원 일대)에 세거하였으니, 예로부터 이름난명문가들이모여사는곳이었다.이마을을사 람들이“공경굴(公卿窟)”이라일컫던것도그까닭이 었다.높은벼슬을지낸선비들이그고장에서태어나 고 자라니,거리의기풍(氣風)또한 다른고을과는 스 스로 구별되었다.그 가운데서도 공의 가문은 더욱 유 서 깊은 명문이었고 박판서 집으로 유명하였다.그러 나공은어릴적모친을여의는불행을겪었다.장례가 끝난 뒤 집안에는 오래도록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공은 슬픔을 가슴에 간직하되 눈물을 길게 흘리지 않 고,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가정의 기강(紀綱)을 잃 지않았다.아버지가다시맞아들인계모(繼母·전주이 씨)를 친모(親母)처럼 극진히 모셨다.“어머니, 저녁 식사에는따뜻한물을곁들이심이어떠하십니까?”공 은항상먼저살피고정성을다하였다.계모가병환(病 患)에들면새벽마다안방을오가며차를올리고,불씨 가조금이라도약해지면직접손으로다시살렸다. 또한여러아우들을이끌어다툼이없게하였다.어 린 동생들이 글공부에 지쳐 투정(鬪睛)을 부리면, 공 은곁에앉아부드럽게조부(祖父:소요당)가지은동 몽선습(童蒙先習)을읊어주며마음을다독였다.장자 (長子)로서 집안의 가풍(家風)을 중히 여기고, 우애 (友愛)로써 동생들을 돌보는 데 한 치의 소홀함도 없 었다. “형님이 계시니 우리 집은 늘 화목(和睦)합니 다.”아우들은이렇게말하며의지하였다.이모습을지 켜보던마을의어른들은혀를내둘렀다.“요즈음세상 에어미잃은아이가계모를친모처럼섬기고,아우들 까지 저토록 살뜰히 보살피는 이가 또 있겠는가.”“그 효성(孝誠)과우애(友愛)로보건대,장차세상풍속을 바르게 할 재목(材木)이로다.” 이러한 평판(評判)은 마침내 마을을 넘어 조정에까지 전해졌다.“그의 효성 과 우애가 하늘이 내린 덕과 같으니, 각박(刻薄)해진 세상풍속이그로말미암아다시따뜻해질것입니다.” 사람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이렇게 아뢰니,공의 이름 은반송방을넘어전국전역에널리알려지게되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특 히 할아버지인 소요당공(逍遙堂公)께서 자녀들을 위해 직접 지으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손자를 아끼는마음으로친히읽어주고,그내용을하나하나 설명해 주셨다. 단순히 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배 운내용을실제생활속에서어떻게실천해야하는지 도자세히일러주었다.이와같은어린시절의정성스 러운 훈육은 공의 인격 형성과 학문적 자세에 큰 밑 거름이 되었으며,훗날 공이 애한정(愛閑亭)을 세워 세속을 벗어나 소요자적(逍遙自適)즉,한가하고 평 화롭게 스스로를 즐기는 삶을 추구하게 된 것도 깊은 연관이있다.다시말해할아버지의가르침속에깃든 배움과 실천, 그리고 마음의 평정이 평생 공을 포함 한6형제의삶을이끄는근본이되었던것이다. 공은젊은시절부터학문과인품이뛰어난여러인 사들과 교유하였다.함께교유한 인물로는모당 홍이 상(洪履祥,1549-1615,대사헌),서경 유근(西坰 柳根, 1549-1627, 좌찬성), 졸탄 김권(拙灘 金權, 1549-1622, 호조참판)등이 있었으며,이들은 모두 명망 높은 학 자이자관료였다.공은이들과함께기유생갑계(己酉 生 甲契)를 맺어 서로 학문을 토론하고 우정을 나누 며, 학문적으로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공은 일찍이 과거공부를그만두고오로지학문에뜻을두었으며, 아우 잠야(潛冶, 문목공 文穆公) 박지계(朴知誡)와 더불어 어머니를 섬기기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하여 형제간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이후 인조반정(仁祖反 正)이일어나광해군의혼란한정권이무너진뒤,당시 벼슬길에오르지않았던여러인물들이충절과절개를 인정받아 새 왕조에서 등용되었다. 공의 여러 형제들도 이때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공은 이미 세 상을떠난뒤였기때문에벼슬에나아가지못했다. 만년에 괴산(槐山)의 여울가에 살면서 정자를 지 어 애한정(愛閑亭)이라 하니 월사(月沙)와 오봉(五 峰), 제공(諸公)이 시(詩)를 지어 걸었다. 천계(天 啓) 계해(1623) 정월에 애한정에서 고종(考終)하니 75세로생을마친다,조선의문인탄옹권시(灘翁權 얍 )가 그의 행적을 기려 갈문(碣文)을 지었다.그 공 적과덕행이높이평가되어,공은조부소요당박세무 (逍遙堂朴世茂)와 함께괴산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어후대에존숭(尊崇)되었다. 공의 배위 숙인 임씨(林氏)는 부안사람(扶安人) 으로, 공과 혼인하여 가정을 평온히 다스렸다. 그녀 의집안또한명문으로,아버지는도사(都事)임팽담 (林彭聃),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임세방(林世芳), 증조는 보은현감 임유침(林有琛 1452-1526)이며, 8 세조 임목국(林穆國)은 벼슬로 양양원(襄陽院)을 제수 받고도 부임하지 않고 금강 위에 정자를 세워 독락진(獨樂津)에서 스스로 즐기며 살았고, 외조부 는판서이좌명(李佐明)이다.임씨는공보다10년후, 계미년(癸未1643)6월에세상을마치니향년이여든 넷이었다. 삶을 마감하기까지 정숙(貞淑)하고 순정 (純情)한 덕행(德行)으로 집안을 온전히 받들어, 아 내의 도리(道理)를 다하였으니 그 품성(品性)과 행 적(行績)이가히후세의본보기가되었다. 공에게는두아들과네딸이있었으니,장남은유원 (由元 1572-1651)으로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을 지 냈고, 차남은 유혼(1588-1657)으로 군자감판관(軍資 監判官)을 지냈다. 두 아들 모두 가문 공훈으로 통덕 랑(通德郞)에 제수되었으며, 효행이 뛰어나 판관(判 官)으로 증직 되었다.학문 또한 깊었는데,특히 차남 유혼은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지모가 탁월했으며, 활을 쏘면 반드시 맞힐 정도로 무예도 출중하였다. 원 두표(元斗杓)와 이해(李 餌 )가 반정(反正)에 참여 (擧義)할것을권유받았음에도,유혼은이에응하지 않고부모를모시는일을먼저하였으니그효행이참 으로 가상한 일이었다. 두 아들의 효행을 적은 장(孝 薦狀)에따르면,다음과같다. 공이 만년(晩年)에 증풍(風症)에 걸려 3년 동안 누워 있었는데,두 아들은 옷끈을풀지 않은채 밤낮 으로 곁을 지키며 극진히 간병하였다. 병세가 위중 해지자북두칠성에대신목숨을바치게해달라며빌 었으며, 형은 아버지의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 고, 아우는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斷指) 정성으로 연명(延命)하기를빌었으니,그로인해아버지는수 개월을 더 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아침 저녁(朝夕)으로 무덤을 찾아가 통곡(號泣)하였으 며,상기3년동안죽만먹으며슬픔을다하였다. 어머니는생전에물고기를좋아하셨는데,두아들 은이미백발이된나이(白首)에도바람과비,추위와 더위를마다하지않고직접물고기를잡아봉양해드 렸다.밤에는 어머니가 주무실 때 곁에서 지켰고, 새 벽 닭 울음이 들리면 곧장 달려가 부축해 일으키고 옷을입혀드렸다.어머니가위독할때에도아버지때 와 같이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으며, 돌아가신 뒤 기 일(忌日)이되면미리도포를입고제사음식을정성 껏준비하여깨끗함을기했으며,곡(哭泣)을할때에 는 마치 처음 상을 당했을 때처럼 슬픔을 다하였다. 이를본사람들마다감탄하지않는이가없었다. 네 딸들은 각각 사직령(社稷令) 통정대부 행덕원 부사 민계(閔 ),현감권이경(權履敬),현감성윤 길(成潤吉), 그리고 이돈선(李惇善)에게 출가하였 다. 공의 자손들은 가문의 덕을 이어받아 나라의 일 을살피고,결혼을 통해명문과연을 맺어가문의 위 상을 더욱 굳게 하였다.이는 공이 평생 지켜온 절조 (節操)와 의리(義理),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의 유풍(遺風)이후손까지이어지고있음을보여준다. 공이 출사할 당시 조선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붕당 간의 끝없는 정쟁,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와 오판,무 너진 군사·행정 체계는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재난으로 귀결되었다. 무엇보다 동인(東人)과 서인 (西人)으로 갈라진 사림은 도덕과 의리를 내세워 상 대를공격했지만,그결과는조정을마비시키는결과 를 초래하였고, 정여립(鄭汝立) 사건 이후 정국은 보 복과숙청의악순환에빠졌으며,선조는이를조정하 기 보다는 일관성을잃은인사로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러는사이외교 환경은급변했다.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며 대륙 진출 의지를 노골 화했음에도,조선조정은끝내현실을직시하지못했 다.명(明)의쇠퇴,일본의군사력증강이라는국제정 세를오판(誤判)한결과는치명적일수밖에없었다. 임진년(壬辰, 1592) 왜란이 발발하자, 천하는 크게 동요하고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이때 공은 집 안 가족을 거느리고 강화로 들어가 난세를 피난하였 다.그러나공의뜻은단순한피난에그치지않았다.스 스로 몸을 던져 의병을 규합하고,서쪽으로나아가임 금을돕는근왕(勤王)할뜻을굳게세우니,장정들이이 에 호응하여 모여 들였고 진군하였다.조정은 공의 충 정(忠情)을가상히여겨창릉참봉의직을제수하였다. 이어 공은 조정의 명(朝命)을 받들어 다시 큰 소임 을맡게되었다.적이점거한고을한가운데에들어가 사당의 신주(廟主)를 정성껏 살피고 봉안 상태를 점 검한뒤,그위태로움을염려하여마침내강화로옮겨 안전하게 모신 것(이안 移安)이다.이는 일신을 아끼 지 않고 사직(社稷)과 종묘(宗廟)를 함께 지킨 충성 의발로였다.공은그런다음임금이머물던임시궁정 인행재소에가서임금을뵙고,그일을마쳤음을아뢰 었다.이후공은본래근무하던창릉으로돌아와갑오 년(甲午, 1594)에는 내섬시(內贍寺)의 봉사(奉事:종8 품)’에 보임되어 궁궐의 물자를 맡아 다스렸으며, 병 신년(丙申,1596)에이르러직을물러나게되었다. 공이난리의와중에보인결단과충성은단지한때 의공훈에그치지않고,종묘(宗廟)를보존하고왕실 을받들어나라의근본을지킨의리의실천이었다.이 는후세가마땅히본받을만한행적이라할것이다. 무신년(戊申,1608)에선조(宣祖)가승하(昇遐)하니, 조정은국장(國葬)을거행하였다.이때공은의리에따 라 예장(禮葬)의 대업에 참여하여 진설(陣設)및 운구 관련 의장물의 감독관(監造)역할을 충실히 하였으며, 그뒤직임에서물러났다.을묘년(乙卯,1615)에이르러 서는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종5품)에제수되어궁중 의 의복과 장식을 관장하는 직임을 맡았다.그러나 다 시정사(政事)에서물러나게되었다.만년에이르러공 은 괴산(槐山)으로 낙향하여 맑은 여울 가에 거처를 정 하고정자(亭子)를세워,그이름을애한정(愛閑亭)이 라 하였다.이는 세속을 멀리하고 한가한 마음을 사랑 하는 뜻이었다. 공은 이에 기(記)를 짓고, 팔경(八景) 븮송악청람(松嶽淸嵐), 하당야월(荷塘夜月), 고촌모연 (孤村暮煙), 창벽낙조(蒼璧落照), 석등행인(石 띨行 人), 강포상박(江浦商舶), 불사심승(佛寺尋僧), 회탄 조어(槐灘釣魚)븯을읊어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다. 이때 조선 중기 사대 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인 월 사(月沙)이정구(李廷龜,1564-1635,좌의정)와 오봉 (五峰)이호민(李好閔,1553-1634,좌찬성)을비롯하 여,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1542-1621, 동지돈녕 부사),용계(龍溪)김지남(金止男,1559-1631,예조참 의),청육(靑陸)김덕겸(金德謙,1552-1633,동지중추 부사),만회(晩悔)권득기(權得己,1570-1622공조참 판) 등 제현(諸賢)이 화답하는 시를 지어 걸었으니, 그곳이 곧 문사들의 교유와 풍류의 장이 되었다. 또한훗날정자를옮겨지을때에는우암(尤菴)송시 열(宋時烈,1607-1689,우의정),장암(丈巖)정호(鄭澔, 1635-1707,영의정),직재(直齋)이기홍(李箕洪,1641-1 708,집의)이기문(記文)과발문(跋文)을지었으며,애 한정은후일충북유형문화재제50호로지정되었다. 공의 성정(性情)은 효우(孝友)하여 모친을 잃은 슬픔중에도집안을흐트러뜨리지않고,계모를친모 처럼 봉양하였으며, 형제들에게는 자애롭고 믿음직 하여아우들이감히거스르지않고마음으로따랐다. 공은 마음을 닦고 본성을 보전(保全)하기를 힘썼 으며, 남을 대할 때에 온화(溫和)하되 법도가 있었 고, 스스로를 낮추되 의로움은 굽히지 않았다. 말을 아끼고 행동을 삼가 하며, 군자(君子)의 기상을 은 연(隱然)히 간직하였고, 작은 일에도 성의(誠意)가 있었으며, 남의 선행(善行)을 보면 스스로 기뻐하 고, 어려움을 당한 이를 보면 구휼(救恤)하기를 게 을리 하지 않았다. 때로는 침묵(沈默) 속에 뜻을 품 되, 결단(決斷)할 때에는 굳고 과감하여, 그 강직함 과인자함이서로조화를이루었다. 이러므로 지방의 원로들은 말하기를, “그 사람됨 이 곧고 순정(純情)하여, 선대의 풍모(風貌)가 그대 로 이어졌으니, 집안의 복(福)이 후손에 미칠 것이 다.”하였고,이웃들은또한탄복(歎服)하여,“그효성 (孝誠)과 우애(友愛)가 세속(世俗)을 감화(感化)하 니,이를 본받으면 집집마다 화기(和氣)가 감돌 것이 다.”하였다. 실로 공의 덕이 유풍(遺風)으로 흘러 가 정과향촌을두루따뜻하게하였으니,이는오랜세월 가문에스며든충효(忠孝)와예경(禮敬)의정신이공 으로하여금다시빛을발한것이다.공의계씨(季氏) 역시 유현(儒賢)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잠야선생(潛 冶先生)이라칭하였으며,휘는지계(知誡)다. 공이 어렸을 때, 판서공(判書公: 素立)께서 그를 어루만지며 이르기를,“이 아이가 장차 나를 받들어 제사를이어가리라.”하였다.훗날종손이가난하여 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되자, 공이 몸소 나서 판서공 의 제사를 정성껏 이어갔으니, 그 말씀이 과연 헛되 지 않음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공은 제사를 모실 때마다 반드시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 모든 일을 친 히 살펴 빠뜨림이 없었으니, 이는 대대로 내려온 집 안의가풍이자,또한공의타고난천성이었다. 공의 아버지 응립은 처음에 남양 홍씨(南陽洪氏) 집안의따님,즉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행(行)강 음현감(江陰縣監) 홍윤선(洪潤先)의 딸과 혼인했다. 그러나슬하에자녀가없이첫부인이먼저세상을떠 났다. 이에 장인인 홍윤선은 “우리 사위가 참 아까운 사람인데혼인을끊기가아쉽다”하여,동생인현감홍 윤균(洪潤均)에게 권하기를 “자네 딸을 사위에게 두 번째부인으로맞게하라”고하였다.그리하여응립은 홍윤균의딸과재혼하게되었고,이두번째부인에게 서공이태어나게된것이다.따라서첫번째부인과두 번째부인은같은남양홍씨집안의4촌관계였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몸 둘 곳이 없어 처자를 데리고 괴산괴탄위로와서살게되었다.이곳은아내의본가가 있던 곳이라,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제사를 모시고 가 족을부양할만한형편은되었다.그러나전쟁뒤라제대 로 거주할 집이 없어 마을의 작은 집 한 채를 사서 지냈 는데,편히 쉬거나 마음을 놓을 장소가 없는 것을 한탄 하곤했다.마침살고있는집앞에밭이하나있었고,그 밭 가장자리로 남쪽에서 흘러온 시냇물이 강구(江口) 로흘러들어가고있었다.이에그밭을사서정자한칸 을지은뒤,그이름을애한정(愛閑亭)이라하였다. 괴산은한반도중부내륙에자리하여기후가온화하 고,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조령산·박달산·군자산 등이병풍처럼둘러선산수의고장이다.골짜기에서흘 러내린 물은 괴강으로 모여 화양동을 비롯해 선유동· 쌍곡·갈은·연하·풍계 등지에 이르러 구곡(九曲)의 절 승을 이루었고,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들어 시와 그림을 남긴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이와 더불어 괴산은조선시대사림들에게정치권력의중심에서벗 어난대안적거주지로인식된대표적공간이었다.붕당 간대립과당쟁이극심한시기,정치와조정에대한환 멸과피로를느낀선비들은자연경관이수려한괴산으 로 낙향하여 심신을 돌보며 학문을 이어갔다. 이러한 흐름은괴산이단순한은거처가아니라심성수양과학 문탐구의장으로기능하였음을보여준다. 공의 조부인 소요당(逍遙堂) 또한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괴산으로 낙향한 인물이었다.그는 이곳 에서 븮동몽선습븯(1541)을 저술하였는데,이는 조선 전 기 대표적 초학 교재로서 왕세자 교육은 물론 아동 보 편교육의기본교재로자리잡았으며,이후근대이전 까지 장기간활용되었다.이는 소요당의학문이 개인 적차원을넘어조선유학교육체계확립에기여했음 을시사한다.이가학(家學)전통은손자인공에게계 승(繼承)되었다.공역시말년에괴산으로돌아와161 4년애한정(愛閑亭)을짓고거처하였다.1637년(현종 14)당시괴산군수였던황세구(黃世耉)가공의손자 박정의(朴廷儀)의효심에감동하여사비(私費)를내 어 중건하였다. 그 후 1712년(숙종38), 1718년(숙종4 4),1775년(영조51),1979년에각각중수(重修)하였다. 애한정은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니라 벗들과의 교유 (交遊),시문창작,자연관조(觀照)가어우러진자연 -학문융합(融合)공간이었다.공은이곳에서유유자 적(悠悠自適)한삶을영위(營爲)하였으며,이는조선 사대부(士大夫)가 추구한 전형적(典型的) 은일(隱 逸)의삶을보여주는중요한사례라할수있다. 공의 일생은 광해조(光海朝)의 혼정(混政)과 권 귀(權貴)의부패를견디지못하고몸을깨끗이하여 강호로 물러난 지조의 삶이었다. 그는 세 차례 관직 에 나아갔으나 모두 2년을 넘기지 않고 사직하였으 니,이는스스로를보전한명철보신(明哲保身)의선 택으로평가된다. 공은조부박세무가괴산에서심은선비정신을기 리고자 애한정을 짓고, 이를 학재(學齋)로 삼아 괴 산 주변의 어린이들을 모아 교육하였다. 그가 가르 친 교재는 조부가 집필하고 직접 전수받은 븮동몽선 습븯이었으며,공은 이교육 활동을자신의삶에서 큰 즐거움(樂)으로여겼다. 공은 사리사욕이나 명예가 아니라, 당시 자신이 옳다고믿은정도(正道)를지키며살고자했다.후손 들 역시 그 뜻을 계승하고자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오늘의 기준에서 완전히 옳 으냐가 아니라, 무엇을 가치로 삼아 살았느냐 하는 점이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바람직한 삶의 기준은 달라질 수 있지만, 인간다운 삶이란 결국 사사로운 욕심을넘어그시대가요구한대의(大義)를따르고 실천하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애한정의 정신은 오늘날에도여전히의미를지닌다. /박성호함양박씨종사연구위원장 효자애한정박지겸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선원세계 애한정전경 애한정 용 계집,애한정팔경을차운한시가전해진다. 선생의생애 박지계선생존영 출사와충정 성품과일화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