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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10월31일 금요일 12 (제226호) 기획 무계박민수(1501-1557)선생은타고난효자이다,유교적덕목과학문을겸비한인물로크게추앙받았으며,선생이 남긴시가와산문을수록한 『무계선생문집』은4권2책으로,1847년(헌종13)에목활자본으로간행되었다.이문집에는시(詩)뿐아니라잡저(雜 著),가훈,명(銘),찬(讚),기(記), 행장,묘지명·묘갈명등이함께실려있다.특히그의孝行은많은사람들로부터칭송을받을만하여후대에까지전해 져사후조정에서그의효행 을높이평가하여정려를내리고공조참의(工曹參議)를증직하여소개해본다. 선생의본관은월성(月城)이다.그계출은신라경 명왕의왕자휘언의(彦儀)로부터문호가열린다.월 성대군의 아들 견(甄,2世)은 고려조 문과에 좌사간 (左司諫)으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고, 손자 호 (灝, 3世)는 판예부사(判禮部事)로 아버지에 이어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증손 영록(永祿, 4世) 은 예부시랑(禮部侍郞), 현손 정세(貞世, 5世)는 호 부상서(戶部尙書), 6世 방량(方亮)은 문하시랑(門 下侍郞) 봉(封) 월성군(月城君), 7세(世) 박(珀)은 문하시랑(門下侍郞), 8세(世) 지(智)는 호부의랑 (戶部議郞),9世천가(天佳)는추밀원사(樞密院使), 10世인육(仁育)은대릉직(戴陵直,永陵直),11世겸 형(兼亨)은 공조전서(工曹典書), 12世 유(瑜)는 문 하시중(門下侍中)이다. 문하시중(휘 유)의 아들 구(龜,월성대군 13世)는 중군사정부령(中軍司正副令)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였다가 나 중에 인천에 있는 산중에 은거하고 있어 이 산을 장아산(藏我山)이라 불려졌다. 그 후 조선 태종이 여러 차례에 걸쳐 벼슬을 하사하며 불렀으나 끝까 지 절의(節義)를 지켰고, 망경태(望京台)에 올라 망국 회한을 통곡으로 달래다가 장아산에서 일생 을마쳤다. 그의 아들 간(幹)은 양신(良臣,슬기롭고 어진 신 하)의 한 사람이다.그는 아버지가 불사이군의 충절 을 지키고 있어 섣불리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으나, 그때는 그때요 이때는 이때라고 유명(遺命)하심에 따라 태종 16년(1416년) 친시(親試)에 처음으로 응 시하여 유학(幼學)으로 제1등에 올랐다. 이로부터 문명이 조정에 휘날리게 되었고, 간관(사간원과 사 헌부의 관리)에 발탁되어 곧은 말로 당세를 흔들었 다. 특히 성균관 유생을 위하는 것이 많았는데 이로 인하여호학(好學,학문을좋아하는선비)사람으로 좋은소문이나라에더욱퍼졌다. 세종 16년(1434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고 단종 원년 호조참판, 단종 2년(1454년) 예문관 대제학 수 (守)판의금부사를 역임하고 증직으로는 의정부 좌 찬성이다. 슬하에 아들 휘(徽), 옹(雍), 숭(崇), 준 (峻)등4형제를두었는데이중둘째휘옹(雍)은선 생의증조부가된다, 증조휘옹(雍)은구례현감.조부휘이문(以文)은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부명(父命)으로 벼슬을 버리 고영남으로내려와처음으로의흥에정착하였다. 아버지는 후릉참봉(厚陵 핫 奉, 정종과 정안왕후의 쌍릉) 참봉이고, 어머니는 일선김씨(一善金氏) 사인 (士人)계지(戒智)의 따님으로 선생은 아들 삼형제중 장남으로1501년의흥고산리집에서태어났다. 선생의휘는민수(敏樹)자는덕재(德載),호는무 계(舞溪)이다.천성이지극한효자이다.어릴때부터 어버이를 섬길 줄 알아 맛있는 음식으로 모시되 반 드시 손수 하기에 게으름이 없었다. 10세 전후에 어 머니김씨의병이심하니눈물로뛰어다니면서약물 을 마련하여 드렸다. 병세가 약간 좋아진 어머니는 석이(石茸)를 먹고자 하기에 혼자 팔공산(八公山) 깊숙한곳에들어가서석의를땄다.산은집에서멀 어 돌아오는데 날은 이미 어두워 큰 범이 길을 막 고있어선생은침착하게놀라지않고울면서말하 기를 「나는 어머니 병으로 약을 캐어 돌아가는데 너는비록무지한짐승이지만어찌나를차마해치 겠느냐?」 하니 호랑이가 머리를 숙이고 잠시 옆길 로피하여가면서지키는듯이하여집까지왔다가 문득 사라졌다.마을에서 들은 이는 모두가 칭찬하 여이상한일이라고감탄하여‘효자로구나!이아이 는 맹수를 그의 지성으로 감화시켰다.’라고 말하였 다. 어머니 김씨는 이 때부터 차츰 입맛을 되찾았고, 이후에도날로석이(石茸)를캐서봉양하니병은마 침내 나았다.1527년(嘉靖六년 丁亥)에 아버지 참봉 공(參奉公)이 돌아가시고, 1538년(가정十七 戊戌) 에는 어머니 김씨도 별세했다. 선생은 전후의 복제 (服制)를 지키는데 혹시나 잘못됨이 있을까 하여, 3 년을마치는동안조석으로엎드려슬피곡하여차마 묘를 떠나지 못하니, 아래를 지나는 사람은 측은이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상을 마친 뒤에 더욱그리워하였다.돌아가신날이되면반드시미리 목욕재계하고,제사에는슬피곡하기를초상때와같 았으며마친뒤에도종일토록슬픈표정이었다. 평소에는 반드시 새벽 일찍 일어나서 사당에 가 배알하고 저녁에도 그 같이 하였으며 이는 나이든 뒤에도조금도그침이없었다.한번은효경(孝經)을 보다가 책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짓고, 「옛사람이 나 무가고요하려해도바람이그치지않고,봉양하고자 해도 부모님이 아니 계신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 으로 옳도다.」라 하고는 몹시 애통함이 오래 되었으 나 자제들이 혹 그렇게 함을 민망히 생각할까 염려 하여책상위의효경(孝經)을치웠다. 선생은젊어서과거공부를몇차례보았는데뜻을 못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어버이를 잃고는 한번은 눈물을 흘리고슬퍼하며「나는 재주없어 미치지못 했다. 양친이 계실 때는 등과하여 기쁘게 해 드리려 했는데이제는끝이났다.나는무슨마음으로다시취 하리오.」하고는 마침내 과거공부를 치우고 은거하여 스스로학문을강하고익힘을일삼으니공의큰포부 가남달리깨끗하여,세속사람과는아주달랐다. 사는 마을 앞에 냇가 있어 춤 내라 이름 하였는데 물과 돌이 아주 좋았다.선생이 늘 여기에 나가 노닐 어혹낚시고기잡이도하고,혹바람쏘이고시를읊 으며돌아오면서孔子와그제자들문답간의무우고 사(舞雩故事)를 생각하여 스스로 호를 지어 무계 (舞溪)라하였다. 이는 『논어(論語)』「옹야(雍也)편」제3장으로 원 문을 보면 「子曰:「莫春者, 春服 成, 冠者五六 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공자가 말씀하시길, “봄철에 봄옷을 다 지어 입고, 갓을 쓴 젊은이 다섯 여섯과 아이 여섯 일곱이 함께 이수(沂 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며, 노 래를 부르며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舞雩(무 우)는 고대 노나라(魯國)에 있던 제단 이름으로 가 뭄이 들면 백성이 이곳에서 비를 기원하며 춤추고 제사 지내던 곳으로, ‘풍우(風雨)를 맞으며 바람 쐬 는 정결한 장소’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후대에는 이 구절이 “자연 속에서 도를 즐기며,유유자적하게 사 는 성인의 이상적 삶”을 상징하는 고사로 사용하니 선생의호무계(舞溪)또한선생의삶을잘표현하고 있는것이다. 1557년(嘉靖36년 丁巳)에 선생의 나이 57세 11월 14일에세상을마쳤으니죽음에미처의관을정제하 여사당에고별하고는바르게남쪽으로머리하여돌 아갔다. 평생 수신한 바의 바름을 이에서도 볼 수가 있다” 다음해(戊午) 정월에 현(縣) 서쪽 어부실 남 향산에장사하니,돌아가신부모님무덤바로뒤이 다.부인 함양박씨는 숙릉참봉(淑陵參奉) 휘 경신 (景信)의 따님인데 시부모 모시기에 정성스런 공 경을 다 하였다. 대개 시부모가 즐기는 것은 꼭 힘 을다하여 마련했는데,집에있고 없고를헤아리지 아니 하였다.시부모가 병들면 남편을 따라 곁에서 모시는데조금도떠나지 않고 밤에옷을벗은적이 없다가 회복된 연후에야 물러나서 편히 쉬었다 고 을 사람들이 「옳은 가장에 옳은 부인이라」고 칭찬 하였다. 슬하에3남3녀를두었는데아들은응정(應禎)·응 상(應祥)·응희(應禧)인데 장남 응정은 가학을 이었 으며, 차남 응상(應祥)은 대정현감(大靜縣監)을 지 냈고, 삼남 응희(應禧)는 선릉참봉(宣陵參奉, 성종 과 정현왕후의 능)이었다. 딸은 신몽득(申夢得)·장 응익(張應翼)·김응허(金應虛)에게 출가했다. 응정 (應禎)의 한 아들은 명남(命男)이고 응상(應祥)의 두 아들은 희남(熙男)·광남(光男)이며 응희(應禧) 의 두 아들은 승남(承男)·종남(從男)이다. 종남(從 男)은 호가 유촌(柳村)이고, 무과출신으로 임진란 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佑)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적을 쳤는데 사실은 그 행장에 실려 있다.선 생은 비록 숨어서 세상에 나타나지는 안했으나 그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은 실로 타인을 크게 넘 었음이 있어 사후에 정려가 내려지고 공조참의(工 曹參議)에 추증되고 나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후 손들과 지방 유림이 뜻을 모아 선생의 효행과 학문 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선생이 시묘한 터에 소면사 를 창건하여 제향을 받들어 왔다.“昭勉(소면)”이라 함은 “밝게 드러내어(昭) 힘써 권면하다(勉)”는 뜻 으로, 즉 후세 사람들에게 밝은 모범이 되어 권면하 자는의미이다.(소면사창건기참조) 1890년(庚寅)八월에 무계 朴선생을 어부동(漁父 洞)에서제사하니이곳은곧선생이시묘하던옛터 이다.아! 사당의 설치에는 그러한 까닭이 있는지라. 혹 선현이 노니시던 곳에 그 맑고 향기로운 덕행의 유적을 그대로 남기게 함이다. 우리 무계선생의 진 실한 효행은 하늘에서 내린 바라 어릴 때부터 어버 이 섬기는 도리를 알아서, 즐기는 물건으로 봉양함 에 온 힘을 다 하였고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이를 고 을 남향 산에 합장하였는데, 전후의 복제 지킴에는 한결같이朱子家禮에따라서그節文에맞도록힘썼 다. 삼년 동안 산소 옆에서 시묘하는데 상복을 벗지 않았고, 졸곡을 마치자 여기에 재실을 지었다. 조석 으로 엎드려 울부짖어 차마 못 떠나니 부모를 끝내 섬기지 못한이는 더욱슬퍼했고,지금 그곳을 지나 는 이는 효자가 울부짖은 곳이라고 일컫는다.슬프 다!선생의 지극한 행적과 큰 덕은 실로 매몰시킬 수 없는 일이오. 그리고 백대 이후까지 오히려 사람들 로하여금크게감흥된탄식으로「여기는효자가시 묘하던 곳이다. 여기는 효자가 재실을 지은 곳이다. 여기는 효자가 울부짖은 곳이라」 하니 감흥한 일로 보건대, 이곳은 단순히 쉬고 놀이하는 장소가 됨이 아니니 어찌 선생의 맑고 향기로운 덕행이 아직도 남아있는 곳이 되지 아니하겠는가?생각해 보면, 壬 午년에 처음으로 이 의논을 가졌으나, 일이 커서 미 루다가 지금까지 왔는데 뜻 가진 이는 모두가 개탄 하고 아쉽게 여김이 오래다.어찌 다행치 않으랴.오 늘 사당의 모습이 새로 이루어졌으니, 이는 숨은 덕 행이 나타나는 데도 역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극화(克和)는 여러 사람들에게 아뢰기를「선생은 세상을 뜨신지 이미백년의 오래 임에도공론이끊어지지않았고빛나는의식이비로 소 거행되니, 천품에 선심 가진 이는 누구라도 보고 느껴 감흥이 일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선생 의후손된이가이사당에들어서서알묘를할제반 드시 어렴풋이 선생이 추모되고, 벌떡 감흥이 일 것 이리라. 그러하니 이 사당이야말로 단지 형식의 아 름다움에 그칠 일이 아니고, 앞으로 선조의 지극한 효행을 밝히고, 후손들이 공경하는 일에 힘쓰도록 하여야할장소이다.그런데외손되는고제김공(攷 齊 金公)이 이미 이름 지은 바가 있으니 어찌 소면 (昭勉)으로서 현판하지 아니 하리이까?」라고 하였 더니모두가좋다고하였다.아!여러군자들은그또 한 이름을 보고 그 뜻을 생각할 일이로다. 1890(庚 寅)년 八월 하순 外 7세손 花山 柳克和 삼가 지음 무계박민수선생의시가와산문을엮어1847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4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1847년 (헌종 13) 9세손 이수( 視 壽)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 에 이휘령(李彙寧)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유후조 (柳厚祚)·이돈우(李敦禹)의발문이있다.규장각도 서 등에 있다. 권1에 시 94수, 권2·3에 잡저 13편, 가훈 17편, 기 (記)3편,잠(箴)7편,명(銘)8편,찬(贊) 1편,권4는 부록으로 행장 1편, 유사 3편, 가장(家狀) 1편, 묘지 명·묘갈명 각 1편,저자의 위패를 봉안한 소면사(昭 勉祠)·나계서원(羅溪書院)·도강서원(道岡書院)의 창건및 이건에관한 기록,상량문·봉안문·상향축문 이수록되어있다. 시의「오호가(嗚乎歌)」·「포오가(哺烏歌)」에는세 상을 떠난 부모를 애타게 그리는 효자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잡저로서, 저자의 학문적 깊이와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인심도심변 (人心道心辨)」을 비롯하여 도학과 도통(道統), 『중 용』과 『대학』의 표리관계, 『중용』과 『주역』의 표리 관계, 선천과 후천, 천지변화·양생(養生)·구용(九 容)·육예(六藝)등에대해자세하게해설하고있다. 「가훈」에서는 입심(立心)·지신(持身)으로 시작 하여 언어·의복·서적·농잠 등 16개 항목으로 나누어 훈계의뜻을적었다.말미에는‘교아집설(敎兒輯說)’ 이라는이름으로자식가르치는방법을남겨놓았다. 「상례의의(喪禮疑義)」에서는 초종(初終)에서 소 상(小祥)까지의예를33개조항으로세분하고,여기 에고증될만한전고(典故)와옛사람들의학설을참 작,인용하여이용에도움이되도록하였다. 「호기잠(浩氣箴)」·「구방심잠(求放心箴)」븡「불이잠 (不貳箴)」븡「자경잠(自警箴)」븡「충효잠(忠孝箴)」과 「심성명(心性銘)」·「사단명(四端銘)」·「화병산수명 (畵屛山水銘)」, 그리고 「괘상찬(卦象贊)」 등의 글도 모두 후진들의 수양과 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역작들 로이문집은1991년국역본으로간행된바있다. 선생의문학세계는효와도학을중심으로한학문 적 깊이와 인간애, 생활철학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문집에 수록된 오호가·포오가 등에서 확인되 듯,부모상실에 대한애도와효성의 표현이중심 모 티프로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 유교적 가치와 개인 적감정이결합되어있다. 잡저·가훈 등에서 도학(道學)·성리학적 논의가 등장하므로, 시에서도 자연(山水·계곡·초목)이 도 덕적·철학적비유로자주쓰였음을알수있다. 그리고 상례의의와 가훈 등을 세부적으로 정리한 글이 들어있는 점에서, 시 조차도 ‘의례·윤리’와 연 결되어 실천적·교육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후인들 에게중요한도서로각광받을것으로보인다. 선생이 실천하는 효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 까이에서부모를봉양함에있어지극히정성을다하 고있음을알수있다.또한선생이남긴시문은장르 별로 다양한 색채를 띠고 있다. 도덕적 의의와 윤리 사상을 중시하고 있어 선생이 부모를 잃은 슬픈 노 래(嗚乎歌)를인용하며마무리해본다. [부모잃은탄식의노래(鳴乎歌)] 무덤아래막을매어아침저녁배알할세 서성거려허둥지둥이삼년을지내보니 봄이슬구슬펐고가을서리두려웠다. 타인親道살펴보면心力을다했는데 색동옷을입었고①향귤도품었으며② 상사간에모시기를한결같이하였었다. 불초이몸돌아보면아들도리잃었으니 울음참아방은고요콩죽도먹다마다 옛사람못따르니지은죄뫼같도다. 蓼莪詩(요아시)③를생각다가눈물나서못읽겠다. 아배낳아가르치고어메사랑가르치니 그은혜갚고프나가없으니어찌하리. 시묘살이편치않아아픈마음흐려진다. 그무렵첫겨울에상복끌고산막드니 눈덩이절벽덮고찬바람솟을치네. 산촌엔굴뚝연기길에는인적없고 눈물참아홀로헤메태양도빛이없다. 추위는뼈속으로주신이몸병들가봐 저녁나무새벽진지다행히도천식막다 무덤을모시고도지쳐서마음부족 아득하게그릴적에기침소리들리는듯. 꿈속넋을바란마음잠시나마헛잠드니 황홀한목소리요방불한그모습. 가훈을듣자하니완연한예대로나 깨여보니문득허사애통한들어이하리 머리들어호곡해도죽살이길알길없다. 산은깊고해는빠져눈물닦고앉았는데 새끼까마귀울고울고남의간장찢어놓네. 명절이다가오면그리움이더욱심해 어찌하면맞는음식때맞추어차려놀고. 원님은어질어서외로운사람도우거늘 제수도보네시니感泣하고설레이며, 이웃사람할미까지때때로죽보네메 은근한인정있어적막함만오겠는가. 나의當喪슬퍼하고寒暑겪음위로하나 슬프다이내외롬불상타의지없네 ‘三春이문득닥쳐듣는풀은푸릇푸릇 초막앞에섯는나무가신님심은바요. 부엌의기명들도지금까지손때있다. 누구위해문병하고누구위해약을캘꼬 계실적의머신정성이제보니허물많다. 아침저녁생각는것先君의덕욕뵐까봐 무덤앞에통곡하니시냇물도목메인다. 육년동안울던곳에작은집세워놓으니 짓는수고같으오나규모는아주솔다. 그리움은붙일테니성묘절후잊지말자. 좋은명절분향제사단오와한식이라 부모잃은아들마음사로이곡짓다. 호랑이도감응한효자무계 박민수선 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선원세계 무계선생의유적지전경(대구군위군우보면달산리684,어부실골).무계선생의묘소위에는부모님과조부님등의묘소가있고영우정옆 신당은선생이시묘후부모제향을위해위패를모신곳이다. 영우정,선생을추모하는齋舍이다. 무계선생의묘. 무 계집,국학진흥원소장 선생의생애 소면사창건 기(昭勉祠創建記) 선생의문집무계집((舞溪集) 문집의의의와평가 맺음말 /글븡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 et) 註①周代의효자인老子가七十세가되어도색동 옷을 입고、어린애 재롱으로 어머니를 기쁘게 했다 는 고사. ②중국 三國시대 吳나라 효자 陸績의 고사,6세에 이웃에 갔다가 얻은 귤을 품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 에게드렸다는고사. ③詩經 小雅편에 실린 시로서 어버이가 안 계셔 봉양할길없는효자의슬픔을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