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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9월30일 화요일 12 (제225호) 기획 조선조명신으로중종대중반부터선조연간에활동하던공은벼슬길에나아가,사대부의도리를몸소실천하며조정 의신망(信望)을받았다.그는사대부로 서예법(禮法)을잃지않고,일상에서절검(節儉)을지켰으며,말과행동이법도(法道)에맞아사람들로부터두터운신 뢰를얻었다.관직에서물러나있는동 안약값마저없을정도의청빈한삶과관력(官歷)에서드러난절조있는판결은많은사람들을놀라게하였으니오상 (五常)의근본이무너졌다고하는현시 대에선생의이력을떠올려보면서바른세상과세도(世道)을본받았으면한다. 성품과일화 공(公)의 휘는 대립(大立)이요, 자는 수백(守伯) 이요, 호(號)는 무환당(無患堂) 혹은 무위당(無違 堂)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공의 가계는 함양 박씨의 종맥을 이어 내려왔으니, 신라 왕실에서 유 래한 성씨라 더욱 빛이 났다.후손들 또한 선조의 뜻 을 본받아 학문과 절의를 가문의 보배로 삼았다. 고 려예부상서(禮部尙書)諱선(善)을시조로받들고, 5세(世)를이어文科에올라명벌(名閥)이되었으니 諱인정(仁挺)과諱신청(信淸)은예부상서요.諱윤 정(允禎)은 판호부상서(判戶部尙書)이며 諱 신유 (臣찮 )는 高宗때 이연년(李延年)의 亂을 토평(討平) 하여응천군(凝川君)에封하고판이부상서에올라시 호(諡號)가忠質이다이어,휘인계(仁桂),휘원렴(元 廉),휘덕상(德祥)은삼대가상서가되었다. 조선에들어와서휘습(習)은태종과문과에동방급 제하고자헌대부병조판서겸팔도순찰사출척사(八道 巡察使黜陟使)였으니, 이분이 공의 5대조(代祖)이다. 고조휘의손(義孫)은문과에급제하고통훈대부사헌 부감찰(監察)이되었으며,증조휘신동(信童)은종사 랑으로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參判)이다.조부 휘 중검(中儉)은생원(生員)으로증자헌대부이조판서이 고정종대왕외손서이다,동몽선습의저자소요당박세 무와이조참의를지낸명헌공박세옹은숙부이며이조 판서를 지낸 박소립과 종형제간이다.부친 휘 세영(世 榮,구당공)은통훈대부돈녕부정(敦寧府正)을지내고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증직되고기묘명인 (己卯名人,1519중종14년)이다.모친증정경부인광산 김씨(金氏)는 사복시정(司僕司正)한우(漢佑)의 따님 으로, 광원군 (光源君)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백겸(伯謙)의 손녀이다. 1512년(중종7)에 공을 낳으니 삼남중(三男中) 장남으로 선교랑 박사립, 형조참판을 지낸박희립과동기간이다.어려서부터품성이근엄(謹 嚴)하고후덕(厚德)하여남달리중후(重厚)함이있었 다.공은태어날때부터골상(骨相)이비범하여,어려서 부터남다른인물이될것이라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성리학의 대의(大義) 를 터득하였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수양에 게을리 함이없었다.관직에나아가서는정직함을근본으로 삼아 아첨(阿諂)을 멀리하고, 오직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편안케하는데뜻을두었다. 그는네임금을섬기되처음과끝이한결같았고절 조(節操)를잃지않았다.임금이잘못하면바르게간 하고, 옳은 일은 굳세게 지켰다. 당쟁의 바람이 거세 게불던조정에서도중심을잃지않고바른말을하였 으며,동료들로부터두려움과존경을함께받았다. 관직은차례로올라마침내의정부좌찬성(현재국 무총리)에 이르렀다. 이는 조정 대신 가운데 으뜸의 반열이었다.그러나공은 벼슬의높고 낮음을가리지 않고 언제나 겸허하였다. 칠십삼세에 이르러 집에서 조용히세상을떠나니,조정과사림이모두애도하였 다. 한평생 청백리(淸白吏)의 풍도(風度)를 지켰고, 굽히지않는절개로임금을섬겼으니,후세사람들이 그를일러‘엄중하고독후(篤厚)한신하’라하였다. 공의부인증정경부인장수황씨(長水黃氏)는익성공 (翼成公)희(喜:영의정)의 4대손으로,현숙하고 아름다 운덕행으로공을잘보필하며집안을올바르게다스려 친척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공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공의 아우 참판 희립(希立)의 셋째 아들을 후사로 삼았 다.그가 바로 평난공신이며 증이조참판 부평부사 지술 (知述)이다.직계후손들은대부분남인으로활동하였다. 부평 부사 지술은 별좌(別坐) 조천상(趙天祥)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을 두었으니, 이름은 유공(由 恭)이다. 유공은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내섬시 직장 (內贍寺直長)이되었으며,지사(知事)권희(權憘)의 딸과결혼해1남1녀를두었다.지술이평난원종공신 으로책봉됨에따라,관례에따라공에게는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이라는 증직 이 내려졌다.겸대(兼帶)도 법규에 따라 부여되었으 며,공의모친에게는정경부인의증직이내려졌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0년4월(중 종35)에29세에식년문과에병과(16위,26/33)로급제 하였다.당시 괴원(槐院,홍문관)에 있던 인물 가운데 공을 시기하거나 달갑지 않게 여기는 자가 있어 공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뒤이어 성균관에 보임 되었는데,이때 역시 동료들 사이에서 불평과 시샘이 적지않았다.그러나공은조금도개의치않고웃으며 말하기를,“나의나아감과물러남이어찌남의뜻에달 려있겠는가?임금을도와나라를바르게하고,백성을 이롭게하려면결국이길외에는다른길이없는법이 다.”하였다.이후한림원에서공을천거하려는움직임 이있었으나,공을달갑지않게여기던자들이다시나 서서 그를 배척하였다.이에 공은 담담하게, “내가 재 주 없는 사람임을 그가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말하였다. 그렇게 벼슬길에서 물러 나외직으로나가양주교수(楊州敎授)가되었다. 공은 ‘물실호기(勿失好機)’, 곧 좋은 기회를 놓치 지 말자는 뜻으로 마음을 비우고 명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두루 살펴보곤 했다. 암소에 술 단지를 싣고 다니며 한잔 기울일 때마다 시 한 수를 읊조렸다.시 선(詩仙)이라불린이태백(李太白)도술이있어야시 가흘러나왔듯,공역시술잔을들어야청산유수같은 시가저절로터져나왔다.강가에배를띄우면달빛이 강물에비쳐마치달속을거니는듯했고,산수사이를 유람하며 한가로운 풍류를 즐겼다.어느 날은 암소에 술을싣고이곳저곳을거니는공의모습을본사람들 은그운치있는모습을그림으로남겨세상에전하였 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며, 세속의 부귀와 영달에 연연하지않고자유로운멋을누리던공의기개와성 품을더욱높이평가하였다.이처럼공은관직에서의 영예나실패에집착하지않고,자신의길을묵묵히걸 어가며학문과풍류속에서뜻을지켜나갔다. 공은 태상시참봉(太常寺參奉)으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다.그런데1545년(인종 1년)에 명신 곽순(郭詢)이 사화(士禍)에연루되어억울하게죽음을당하였다.당 시태상시정(太常寺正)으로있던이홍간(李弘幹)은곽 순이예전에태상시관원으로봉직한사실을들어,관례 에따라부의(賻儀)를보내려하였다.이에공도뜻을같 이하며 말하기를,“조정에서 비록 죄를 물었더라도 우 리 태상시에서는 옛 관원으로 예우해야 하지 않겠는 가.”하였다.이말에좌중에있던사람들은모두두려워 쉽게입을열지못하였다.그때한관원이가볍게웃으며 “우리 관사(官司)는 처음과 끝이 서로 응하는 셈이군 요.”하고말했는데,이는태상시정홍간의자(字)와공 의이름이같았던데서빗댄농담이었다.그러나실상은 훗날자신들이혹시라도화를입게될경우,이일을핑 계삼아빠져나갈구실을미리만들어둔것이었다. 공은형조좌랑(정6품)으로승진하여일을보게되었 다.당시권세가들의방해로수십년동안해결되지못한 큰송사(訟事)가있었는데,공이직접살펴보니곧바로 진상을밝혀낼수있었다.형조판서(정2품)가난처한기 색을보이며망설였으나,공은굽히지않고끝까지주장 하여즉시판결을내렸다.이소식을들은사람들은모두 시원스러워하며크게통쾌해하고칭송이자자했다. 공은병조겸춘추관기사관(정7품)이되어병조의일 을보면서동시에춘추관에서기주관(記注官)으로중종 실록 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다. 이후 호조(재정 담 당)로자리를옮겼다가,외직으로나가충청도사(정6품) 가되었고,다시호조정랑(정5품)에임명되었다가병조 로돌아왔다.그무렵영상(首相)심연원(沈連源)이자기 뜻을따르지않는다는이유로조당(조정회의)에앉아공 을꾸짖고,심지어낭사(하급관리)를시켜벌주를내리 게하였다.그러나공은송죽같이끝까지물러서지않고 소신을굽히지않았다.이에심연원은오히려크게감탄 하며“참으로크게쓰일인재”라칭찬하고,여러차례공 을천거하였다.그결과1549년(명종4)공은지평(持平,사 간원정5품)으로제수되었다.같은해8월조정에서는불 교를숭상하는분위기가짙었는데,공은임금앞에나아 가이를간언하며바른소리를하였다.논쟁이길어져해 가중천에떠서야겨우밖으로나오자,멀리수렴(임금이 발언을들을때치는발)안에서임금이듣고“박대립은 참으로우직하구나,”하고말하였다.공은해가바뀌어다 시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고,이어 종부시첨정(宗 簿寺僉正)을 지냈다. 그 뒤1552년(명종7) 외간상(外艱 喪)으로벼슬에서물러났다가,상기를마치고다시벼슬 에나아가1557년(명종12)성균관사성(司成,성균관학 사,정3품),사헌부 장령(정5품),1558년(명종13)군기시 정 (무기 관리,정3품), 예문관 검상(정5품)을 역임하였 다.1560년(명종 15)에는 사헌부집의(執義)에 임명되고 특별히 발탁되어 병조참지(정3품)가 되었으며,의정부 사인(舍人)과 홍문관응교를 거쳐 태복시정(말과 마구 간을 관리,정3품),집의(사헌부,정4품)등을두루거쳤 다.그가 의정부사인으로 있을때 명종(明宗)의 처외삼 촌 이량(李樑)이 왕후의 세력을 믿고 의정부의 자리로 들어오려고하였는데,공이나서서이를적극거절하니, 명종이이량을견제하려고그를특별히1562년(명종17)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정3품, 왕명출납)에 발탁하 고,1565년(명종20)에는우부승지로승진시켰다.그러나 1562년(명종17) 모친상(貞敬婦人 光山金氏)을 당하여 다시 물러났다가, 상기를 마치고 은대(사간원·사헌부 언관직)를 맡아 조정에 들어갔다. 이후 1566년(명종21) 외직으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종2품)에 나갔 는데,공의행정은구획과조처가모두적절하여도내가 크게다스려졌다.1567년(명종22)조정으로돌아와중추 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등을역임하였다. 1567년(선조즉위) 하지사(賀至使, 황제탄신 사신)의 서장관으로명나라(明京)에 가게 되었다.그 길에 황해 도해주일대백성들이길가에나와공의행차를바라보 며이마에손을얹고“선정감사(善政監司)!”라외쳤다. 이는그가베푼선정을잊지못해올린존경의표시였다. 즉,공은 중앙과 지방을 두루 거치며 문관·무관·언관을 폭넓게경험했고,특히황해도에서의선정을통해백성 들로부터깊은존경을받았다. 1568년4월(선조1년)홍문 관부제학박대립과직제학노수신등이차자(箚子)를올 려조광조(趙光祖)의벼슬과시호를추증하기를간청하 니,상이답하기를선조(先祖)의일을시비하기는어려운 일이지만 조정의 의논이 이와 같으므로 추숭한다.하며 조광조는영의정으로추증되었다 사행(使行)에서 돌아온 뒤 공은 형조참의(刑曹參 議,정3품차관급),부제학(홍문관부수장),판결사(의 금부 차관급), 승지(정3품, 왕명출납), 대사간(大司 諫,사간원의수장),병조참의등을두루역임하였다. 1570년(선조3년),영남지방에큰흉년이들자대신 들의 추천으로 공은 경상도관찰사(종2품,도지사)로 승진하여부임하였다.교서는흉년과민생안정,탐관 오리숙청,교화진작,국방대비,인재발굴등을박대 립에게 명하면서, 경상도관찰사로 임무를 충실히 이 행하라는 엄중한 임금의 당부이다.임기를 마치고 돌 아와서는 동지중추부사(同樞, 의정부의 참여관)에 제수되었고,곧외직으로나가경기감사가되었다.다 시 임기가 차자 1572년(선조5년)공조참판 (종2품 차 관급),1573년(선조6년)형조참판(종2품)을거쳐오위 도총부부총관을역임하였고,전문시관으로삼았다. 1574년 2월(선조7) 함경도관찰사로 나아갔다. 함 경도백성들이살곳을잃고방황하자,선조가적임자 인관찰사를얻지못한탓이라생각해서,이에관찰사 박대립을체직(遞職)시키고임금이처음으로직접전 주(銓注)를 맡아서 후임자를 선발 하였다. 공은 함경 도에 부임하자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관리들의 인 사(黜陟, 공을 세운 자는 올리고 잘못한 자는 내리는 일)를엄정히하였다.또변방의여진족을성의와신의 로대하며넉넉히위로하고포상하였다.이로인해나 중에 조공을 바치러 서울에 올라온 여진인들이 공을 보자줄지어서서절을올리며감사의뜻을전하였다. 이후 공은 대사헌(사헌부의 수장)과 동지경연사( 경연에서임금을보좌하는관직)에임명되었으며,외 직으로는개성유수(종2품,개성수비책임자)로나갔 다.내직에서는두차례나다시대사헌이되었는데,그 때마다공의논의는공정했고법집행은엄정하여대 관(臺官,사헌부관리)들의기강이바짝서게되었다. 1578년(선조 11)에 일어난 븮이수 진도 미옥 사건(李 銖珍島米獄事件)븯은 서인의 대표적 인물인 삼윤(三 尹)즉,윤두수(尹斗壽)븡윤근수(尹根壽)형제와그조 카윤현(尹晛)이 뇌물 사건에 연루된 일이다.이에 동 인계열의대사헌박대립과대사간이산해(李山海)등 이 이들의 죄상을 추궁하여 결국 파면시키자,서인의 세력이크게약화되었다.이사건은이후조정에서‘동 서분당’이전개되는초기양상으로나타나게되었다. 1579년(선조12)에 공은 이조참판(종2품 차관급)을 거 쳐자헌대부(정2품)에올라형조판서(정2품)에특별승 진하였다.공은죄수들을조사한지한달도되지않아수 많은사건을소결(疏決,처리)하여조정의칭찬을받았다. 1580년(선조13)에공은이조판서를거쳐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당시조정에서는낭료(낭관들)들이당하관 인사에 참여하도록 제도를 바꾸었으나,그들의 간섭이 지나치자 공은 합리적으로 조정하며부당한 주장을따 르지않았다.또한음관들을대거승진시키려는요구에 대해서도실제능력으로평가해야한다고하며거부하 고,그가운데뛰어난몇사람만을발탁하였다.젊은관 리들이탄핵을청하였으나끝까지원칙을굽히지않았 고, 사람들은 그의 강직한 태도와 확고한 원칙을 크게 칭송하였다.이때정승정지연(훗날영의정)은아경(참 판 벼슬)으로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박공(朴公)의 절 개는 마치 나라의 주춧돌과 같다.”라고 칭송하였다.뒤 에 정지연이 재상에 올랐을 때도 “내가 박공보다 먼저 재상이되다니송구할따름이다.”하며공을높이존경 하였다.즉,공은 인사와 사법의 최고 자리에서 원칙과 공정을지켜권세와청탁에휘둘리지않았으며,당시대 신들조차의지할만한기둥으로평가하였다. 1581년(선조14)에지중추부사(의정부에참여하는대 신),우참찬(종1품,부총리),그리고호조와형조의판서 를 거쳐 마침내 의정부우찬성(종1품)으로 승진하였다. 이는 임금이 특별히 내린 은전(恩典)이었다.1581년(선 조14)공이병으로사직하자,宣祖는이이(李珥)를발탁 하여그후임으로삼았다.이듬해1582년(선조15)에는돈 녕부판의금부사(정2품,의금부수장)를겸임하였는데, 이때공의나이는이미71세였다.공은친한사람에게“일 을하지못하면서녹만받는것은나에게큰수치이다.선 영 아래 두어 칸 집이 있으니, 소를 사서 농사를 짓고 땔 나무를 해서 팔면 여생을 편히 마칠 수 있을 것이다.” 하 고말하며,임금께소장을올려치사(벼슬을그만두고물 러남)를 청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경은 노성(老成)한 원로이니정부에남아나를도와야한다.”라하며윤허하 지않았다.공은세차례나사직을청하였으나허락받지 못했다.이후공은판돈녕부사(정2품,종친과혼인을담 당)를 거쳐 다시 1583년(선조16)좌찬성과 우찬성을 지 냈다.정승천을받았으나오르지못하였다.1584년(선조1 7)6월8일,병환으로정침(본채)에서운명하였고,그해9 월양주신혈리선영의해좌(亥坐)언덕에안장되었다. 신도비는묘소아래쪽에부친의비석과나란히세워 져있다.뒷면의추기에따르면5대손박경후가황해도 관찰사로있을때세운것으로,임진왜란과병자호란의 전란과가문의곤궁으로오래세우지못하다가그제서 야 건립한 것이다.비석은 옥개석과 비신,받침돌로 이 루어진 투박한 형태로, 공의 검소한 삶을 반영한 듯하 다.전액은「贈領議政朴公神道碑銘」이라하였으며,169 2년(숙종18)에세워졌다.비문은한문4대문장가중한 명인문충공월사이정구가의정부좌의정시절에짓고, 글씨는5대손박경후가행서로썼으며,뒷면추기도그 가기록하였다.전액은숙종조남인의영수였던의정부 영의정석담권대운의아들인공조참판권규가맡았다. 공(公)은성품이엄숙하고침착하며,뜻과생각이 굳세고확고하였다.가정에서는효성과우애가지극 하고 가법이 엄정하였다. 부모를 뵐 때는 반드시 예 복을 차려 입었고, 집을 드나들 때마다 반드시 문안 인사를올렸다.벼슬에서받은녹봉(급여)은모두부 모님께바쳐사사로운재산을따로두지않았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슬픔이 극진하여, 상을 마치고도여묘(廬墓:부모의무덤곁에서지내는효행) 를 계속하며 집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아내가 위독하 여 잠시 집에 들른 적이 있었으나, 집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해가지자다시여막(廬幕)으로돌아갔다.돌아가 는 길에 호랑이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 일도 있었다. 숙부 세옹(명헌공:世 죕 )이 높은벼슬을할때에도 공은자신의녹봉을나누어드렸으며,숙부(叔父)가병 들면친히약을달이고시중을들었다.혹한(酷寒)의어 느날,病구완을하느라새벽까지벽에기대앉아있었 는데,수염과머리털이얼어벽에붙을정도였다.공은 늘 두 아우(사립,희립)와 함께 생활하며,집안의 물건 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함께 사용하였다. 돌아가 신 누님과 과부가 된 형수에게는 각별한 정성을 쏟아, 어린조카와생질들을모두집으로데려와자기자식처 럼돌보고가르쳤으며,장성하면혼인까지주선하였다. 공은여섯차례의국상(國喪)을당할때마다다섯 달 동안 소식(素食, 밥과 채소만 먹음)을 실천하였 고,기년상(親상을 치른 뒤 1년 동안)에는 석 달,벗 의 상에는 이레 동안 소식하며 늙을 때까지 이를 멈 추지않았다.그는“오륜(五倫)밖에따를만한도리 는 없다. 여기서 허물이 생기면 큰 절개가 무너지는 것이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소용이 없다.”고일러항상도덕적근본을중시하였다. 공은과거에급제하여양주교수로부임했을때,청을 올리기위해양주목사를알현하였다.그러나목사는문 관이라는이유로공을업신여기며큰잔으로술을권하 니 공은 사양하지 않고 여덟 잔을 모두 비웠다.목사가 말하였다.한방울도남기지않고다마시다니廣文의일 이구먼.대립은조금도부끄러워하지않았으나,끝내한 마디청원도하지않고물러났으니,사람들은그의도량 이 크다고 평가하였다. 훗날 공은 높은 벼슬에 올랐으 나,당시의양주목사는지위는그대로인채오르지않았 다.공은한겨울에도베옷을입고,여름에는얼음을수 건에싸서모자에넣고다닐정도로청빈하고담담하 였다. 공이관직이높아지고연로해진뒤에는객과마주 앉아서도거리낌없이방귀를뀌곤하였다.한번은젊은 음관이“사람들의방귀는악취가나는데,상국의방귀는 어찌향기롭습니까?”라며아첨하자,공은크게꾸짖으며 “비루한짓을그만두라.옛적에도발에서향기가난다한 아이가있었는데,이제또자네같은자를보게되는구나.” 라고하였다.음관은크게부끄러워하며물러갔으니,이는 그가강직하여아첨을싫어한성품을보여주는일화였다. 공의집안은대대로높은관직을지냈던집안으로 5대조 박습(병조판서)이 태종과 박은의 모함을 받 아 사사되면서 가세(家勢)는 기울었으나 부친과 숙 부들에 의해 가문이 어느 정도 위치에 다시 오르고 公과 소위 경팔립(京八立)이라 부르는 사촌 형제들 대에서가문은다시금광영을되찾지만어린시절은 가난의연속이었다.公은퇴계이황을비롯한선배학 자들을 존경하였고 사람됨이 장중하고, 독행(篤行) 효우(孝友)븡겸손하며,세력에아부하지않았다. 븮명종실록븯에公의사람됨에대하여뷺종족과화목하고 치산을일삼지않았으며,사람을대하고사물을접하는 데후함을다하였다뷻고평하였다.권세를탐하지않아명 종조의 권신 윤원형이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공을들였으나한번도만나주지않을정도로깨끗하였 다.그는가난한집에서태어났으나효도와우애가독실 하였고자신보다가난한이들을늘도와주며살았다.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항상 헤진 옷과 낡은 삿 갓을 쓰고 다닐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다. 사후 조정 으로부터 시호를 받지는 못했으나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박대립은 재물과 권력에 욕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가문이 화목하고 나아가 국가가 화목하기를 인생최고의가치로두고살았던인물이다. 공은집안에서는인륜을지켰고,조정에서는국법을 엄정히따랐다.겉으로명성을높이거나제도를함부로 바꿔문제를일으키지않았으며,임금의두터운신임을 받는 정승이었음에도 사사로운 요구에는 결코 굴복하 지않았다.권세앞에서도자신을굽히지않은점,이것 이바로공의큰절개였다.이로인해사람들이“불러도 오지않고,내쳐도가지않는다.”라고한말이결코과장 이아니었다.즉,공은중앙과지방,내직과외직을오가 며 고위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권세 앞에서 굴하지 않 고소신을굳게지쳤다,특히함경도에서는군사와외교 를겸비하여국경을안정시켰으며,대사헌으로서는엄 정한법집행으로조정의기강을바로세웠다.공은만년 에도정승의반열에오르며끝까지나라의중심을지켰 고,비록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으나 임금의 신임이 두 터워끝내물러나지못하다가병환으로세상을떠났다. 정리하면,공은집안에서는지극한효자였고,나라에서 는정1품찬성에이르기까지올라,중앙정계의핵심을맡은 인물이었다.선조(宣祖)가공을경상도관찰사로임명하며 특별히내린교서내용일부를소개하며글을마무리한다. 박대립아!그대는타고난기운이두텁고,마음씀씀이 가순박하고삼가며,집안에서는효우(孝友)가있고,정 치에도베풀줄알았다.여러벼슬길에서청렴하고현명 하게명성과공적을세웠으며,일을맡으면엄정하게판 단하여강자를두려워하지않았다.내가그대의근면함 을가상히여겨벼슬을더욱높인다.이제그대를가선대 부,경상도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로 삼으니,그대 는공경스럽게임하라.남쪽지방을잘다스려내근심을 덜어주기를바란다.(중략)아아,박대립아!이글에말이 다담기지못하였으니,그대는임금의명을받들어성심 껏실천하라.이때문에특별히교서를내려알리니,마 땅히자세히알라. /함양박씨종사연구위원장박성호 무환당박대립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가계와생애) 박대립 선생 묘 및 신도비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있다. 1 986년 6월 1 6일 고양시의 향토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기영회도 보물132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영회(耆英 會)란 기로회(耆老會)라고도 하며, 만 70세 이상의 2품 이상 원로 사대부로 구성된 모임을 말한다. 이 기영회(耆英會)의 모임 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 기영회도(耆英 會圖)이다. 이 연회의 참석자는 영의정 홍섬(洪暹)·좌의정 노수신(盧守愼)·우의정 정유길(鄭惟吉)·판중추부사 원혼 (元湣)·팔계군 정종영(鄭宗榮)·판돈녕부사 박대립 (朴大立)·한성판윤 임설(任設)인데, 이들은 모두 70세가 넘 은나이였고,2품이상인고위관리들이었다. 출사와관력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