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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8월31일 일요일 12 (제224호) 기획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은인조5년이인거(李仁居)의난(亂)을,영사원종공신은1628년(인조6)인조반정으로도 태된북인의잔존세력이꾸몄다고 설명되는유효립(柳孝立)의모반사건을다스리는데공을세워녹훈된공신을말한다.감호(鑑湖)박유관(朴有寬)선 생은유효립의모반사건이전 이인 거의난에도혁혁한공을세워각각1등에녹훈되었다.평소충·효·절·의(忠孝節義)와아름다운말과선한행실(嘉言 善行)을가려뽑아두고,수시로열 람하며익혔던삶이드러난다.백성을위한지극한위민정치(爲民政治)를실현하면서일세의사표가되어소개해본다 . 감호공 선양사업에매진하는 후손들이 을사년 윤달을 맞이 하여412년만에증정부인광주김씨할머니를이장하여공 과합폄으로모시고묘비명을세운뒤고유제를올렸다. 公의 諱 유관(由寬)이요. 號는 감호(鑑湖), 字는 이 율(而栗),본관은함양(咸陽)이다.공은아버지의이름 은지기(知幾)이고통훈대부사섬시(司贍寺)봉사(奉 事)인데 아들 유관이 원종공신으로 가선대부 호조참 판에추증되었고,어머니숙부인연안이씨(延安李氏) 인데군수숙( 씨 )의따님으로증정부인이다. 공의 증조는 명헌공(明軒公) 휘(諱) 세웅(世죕 ) 은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이조참의이고 조(祖)는 통훈대부 통례원 상례(相禮) 휘 명립(名 立)으로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이다. 공이 태어날 때부터 몸가짐과 용모가 풍채 있고 넉 넉하며, 기품이 남달라 온 집안이 기뻐하고 축하하였 다.어려서영민(英敏)하였으며백사(白沙)이항복(李 恒福)문하에서공부하였다.당시이항복문하에는명 사들이많이모였는데,이귀를비롯하여조익·장유 정 엽등과 가까이 지냈다.공은 소탈하고 겸손하며 사리 가 분명하여 친구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공의어린시절은조선중기중에서도전란과정치변 동,사림의분열,그리고국가체제의전환점(轉換點)이 되는매우격동적(激動的)인시기이다.사림의분열은성 종이후로중앙정계에진출한사림(士林:성리학중심유 학자집단)이정치의주류로자리잡고있었고당쟁의격 화는결국동서로분열되었다.즉동인(東人)은이황(李 滉)중심의영남학파(嶺南學派)로개혁성향이강했고, 서인(西人)은 이이(李珥) 성혼(成渾) 중심의 기호학파 (畿湖學派)로보수성향이강했다. 부친 봉사공은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의 문 하에서 공부를하였고우계(尤溪)문간공(文簡公)성 혼(成渾)과 벗하여 도학(道學)을 강구(講求)하여 이 웃에 함께 살기로 약속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는데 임 진왜란(壬辰倭亂)으로실현하지못하였다.公도백사 (白沙)이항복(李恒福)의문하에서공부를하였기때 문에父子두분모두스승이서인으로공의집안은서 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전란(戰亂)의시기로임진왜란(壬辰倭亂:15 92)과정유재란(丁酉再亂:1598)으로국토가황폐해 지고,민심은피폐해진상태이며,전쟁이후유민(流 民)과 노비 증가, 세금부담 가중, 지방행정의 혼란 등사회경제적불안이심각하였다.반정(反正)과반 란(反亂)이 이어지면서, 지방에서는 도적과 유랑민 이증가하고,치안(治安)부재현상이나타났다. 공(公)이스무살이던선조29년(1596,병신년),아버 지봉사공(奉事公)께서향년44세로별세하였다.그무 렵은전란(戰亂)이막평정된직후였으나 염병(렛 疫) 이 창궐하던 시기였으므로, 뜻밖의 부친상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공은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오열하며깊은슬픔에잠겼다. 당시공은주자가례(朱子家禮)에따라친히흙을나 르며정성을다해장례를치른뒤,삼년동안시묘살이 (侍墓)를하였다.이러한효행(孝行)은세상사람들에 게 깊은 감동을주었고,모두가 그를 ‘효자’라칭송하였 다. 이를 지켜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좌의정)는 공의인품을높이사외숙의딸과혼인하게하였다.특히 공의 효행은 대(代)를 이은 전통이었다.부친인 봉사공 또한생전모친상을당했을때3년시묘를실천하여‘효 자’라불렸으며,부자모두가효성깊은인물로기억된다. 백사이항복은광해군9년(1617丁巳)혼조시기에인목 대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북파(광해군 지지세력)의공격을받아실각하였다.당시그는이미예 순이넘은고령에다중풍까지앓고있었으나,함경도북 청도호부로 귀양 가게 되었다.공(公)은 스승인 백사를 동교(東郊)까지나가호송하였다.그뒤충남금산(錦山) 장암촌(莊巖村)으로피신하여살면서,계곡(谿谷)장유 (張維,이조판서),현곡(玄谷)조위한(趙緯韓,공조참판), 수몽(睡蒙) 정엽(鄭燁, 대사헌), 백강(白江) 이경여(李 敬輿,우의정),연평(延平)이귀(李貴,대사헌),금양(錦 陽) 박미(朴 범 , 선조의 사위), 남선(南銑),이덕수(李 德洙)등과 함께 날마다 하둔지계(遐遯之計,세상을 피 해은거하는방책)를의논하니,서로뜻이맞아조금도거 리낌이없었다.늦게고서(古書)와주문(朱文)을좋아하 여, 그 속에서 충·효·절·의(忠孝節義)와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실(嘉言善行)을 가려 뽑아 두고,수시로 열람하 며익혔다.이를통해일상속에서한마디말과한가지행 위가얼마나큰영향을미치는지를거듭되새기고,이를 통해더욱원만한인간관계를형성하며,사회의갈등을 줄이고,스스로의내적(內的)성장을도모하였다. 그가말하기를,충(忠)이란국가와사회의공존공생을 위하여목숨을바치는것이요,『효경(孝經)』에서이르기 를 “효(孝)란 몸을 닦아 인륜의 도리(道理)를 실천하여 후세에이름을날리고부모의이름을드날리는것”이라 하였다.절(節)이란군신(君臣)븡붕우(朋友)븡남녀(男女)븡 부부(夫婦)간의 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정열과 절 제를 이름이요,맹자(孟子)는 의(義)에 대하여 “의리란 사람이가야할바른길”이라하였으며,또“호연지기(浩 然之氣)는의(義)가쌓여생기는것”이라하였다. 가언선행(嘉言善行)은븮아름다운말븯을뜻하는가 언(嘉言)과 븮착한 행실븯을 의미하는 선행(善行)이 결합된 말로써 이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만을의미하지않으며,내면의진실성과도덕적 가치가자연스럽게표출(表出)되는것을의미한다. 公은 진정한 가언선행와 충효절의는 인륜적 도리 와 호연지기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의도와 실천 이조화를이루는것이라고깊이생각하였을 것이다. 공(公)은사리판단이분명하여옳고그름의기준이뚜 렷하였다.부모를섬김에는효(孝)를근본으로삼았고,친 구를대할때는의리와신의를지켜한결같이대하니,당대 의명현(明賢)들또한서로존경하는마음을가졌다. 공은 병조판서 구굉(具宏), 호조판서 이경직 (李 景稷),참판 가사 홍립(洪 ), 이조참의 이덕수(李 德洙)등32명의정축생(丁丑生)들이갑계(甲契)를 조직하여 친목을 도모하였다. 계첩(契帖) 서문에는 다음과같이적혀있다. “우리가계를만든것은,젊었을적부터서로부르고따 르며즐기던정이있었으나,한창시절에미치지못하고 영락(榮樂:세월이 흘러)하여 많은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때문이다.지금이라도공들이모여계(契)를조직 하게된것은비록늦었으나,여전히함께하는사람이많 으니다행이아니겠는가?한달동안입을열어웃는날이 하루 이틀에그치지 않으니,어찌 모경(暮境:늘그막)에 성대한일이아니겠는가?아,나라가태평성대를누리고, 우리또한이즐거움을오래도록간직하며,하늘이수명 을 더해 주어 기이(期 視 ,백세)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바꾸지않는다면,장차이모임을두고‘함께계를할 만하다’고말하지않겠는가?” 공은효종7년(1656년)丙申9월9일에집에서下世 하시니 수가 80세이고 원종공(原從功)으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추증(追贈)되었다. 배(配)는 증 정부인 광주김씨로 강릉참봉(康陵參 奉)명남(命男)의 次女로천자(天姿)가온아(溫雅)하 고 처사(處事)가 안상(安詳)했는데 1579년 (己卯) 出 生하고,1613년(癸丑)에 下世하니 수가 35세이다.1남 1녀을 낳으시니 女는 현감(縣監)정무(鄭 )에게 출 가하고 男은 증통훈대부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내 형(乃亨)이다.이른나이에별세하시니공이풍수지리 에좋은곳을택하여장사지내니묘는乾位左便넘어 亥坐이니 乾位 墓碣에 뻤 右하였으나 미처 合 (합 폄)을하지못였다고기록되어있다. 둘째부인증정부인전주이씨는정랑(正郞)이강 (李 )의 따님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 었다.성행(性行)이온인(溫仁)하고,절개가곧고바 르니항상이렇게말하곤했다.“사람의일생이백년 이라하나,좋은말도다하지못할만큼짧은데,화를 내고서일을이루는경우는일찍이보지못했다.” 그는이런마음가짐으로자손을교훈(敎訓)하여집안 의 가풍(家風)이 건실하고 알차게 되었으며,종족과 친 척들로부터도칭송을받았다.1596년(丙申)에출생하시 어,1654년(甲午)12월14일에하세하시니수가59세이다.3 남을낳으시니동몽교관내문(乃文),통정대부송화현감 (松禾縣監) 내창(乃昌), 통훈대부 형조정랑(刑曹正郞) 내장(乃章)이다.墓는뻤 左이다. 공(公)은 당쟁의 격화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벼슬에나아가기를사양하고,광해군의혼란한정국 을 피해 남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인조반정 이후에 는당대의명현들과더불어성리학을강론하며한가 롭고 절의 있는 삶을 이어갔다.특히 광해군 집권 시 기에는 북인 정권의 중립 외교 정책(예: 강홍립 파 견)과 인목대비 폐위 시도 등으로 정치적 논란이 커 졌고, 이에 반발한 서인과 일부 남인 세력이 연합하 여인조반정(1623년)을 일 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하게 된다. 이 로써 서인이 정국의 주도 권을장악하였다. 공과 교유(交遊)하던 인 물들역시대부분서인계열 로,반정이후조정의주요자 리에 기용되었다.이에 정계 와거리를두던공도친우(鄭 燁, 대사헌)들의 권유로 인 조2년(1624)늦은나이에마침내벼슬길에나아가,청단 도찰방(靑丹道察訪)으로 출사하게 되었다. 같은 해 10 월 21일, 인조는 자경전(慈慶殿)에서 윤대관(輪對 官)들을 인견하였는데, 그 자리에 공도 참석하였던 것으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이는 공이 조정에서 공 식적으로직무를시작하고왕과의대면을통해정치적 책임을 부여받은 첫 장면으로, 그의 출사의 상징적인 출발점이라할수있다. 인조반정에공을세운무신이괄(李适)이공신책 봉에서 소외되었 다는이유로반정 직후인 1624년 1 월 반란을 일으켰 다. 이괄은 개성 을점령하고한양 을 위협했으나, 관군의 대응으로 결국진압되었다. 그러나 반란의 여진은 이어졌다. 이괄의 잔당들은 평안도 지역 내의 불만세력과결탁 하여 4월경 평안 도 용천에서 또다시 봉기했다. 이들은 반란을 함경 도까지 확산시키려 했으나, 조정은 신속하게 군을 파견하여사태를조기에수습하였다. 공은 인조5年(1627년 정묘)때 이인거(李仁居)의 난(亂)을적발하고진압한공로를인정받아 소무원 종공신(昭武原從功臣) 1등 훈격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이어 조정이 이괄의 난(1624) 이후 잔여 반 란세력을소탕하기위해지속적으로추적과처벌을 이어가던 가운데, 仁祖6年(1628년 무진) 공은 가도 사(假都事)로임명되어이괄의난주동자중한명인 유효립(柳孝立)을직접처단하였다.이공로를인정 받아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1등훈격에오르 는또한번의영예를누렸다. 조정은 이 공훈에 대한 포상으로 아마(兒馬) 1필 을 하사하였으며,이로 인해 그의 부친인 봉사공(奉 事公) 역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은(推恩)되어 가문전체가영광을누리게되었다. 당시유효립은이괄의잔당세력을규합하여반란 재기를 꾀하던 인물로, 평안도 일대를 중심으로 조 정의 골칫거리였다. 공이 가도사(假都事)로 제수되 어 가도사의 치밀한 수사와 단호한 처단이 조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번 포상은 조정이 반란 에 대한 경각심을 유지하고, 충신과 공로자에 대한 명확한 보상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하고 있음을 보 여주는대표적인사례로꼽힌다. 인조61629년)통진현감으로부임한공(公)은지방 행정의 폐단을 바로잡고 백성을 위한 위민정치(爲民 政治)를 실현한사례로주목받고있는데통진현(현경기 도김포시일원)에부임한직후선정을베풀며고을민심을 다독였다.이듬해6월4일,호조참판이경직(李景稷)이통진 에서실시되던증미(徵米,구호용으로거둔쌀)상환 제도 의문제점을지적하며중앙에폐단을알렸다. 이에 현감인 공은 다시 상소를 올려 "고을의 형 편을 고려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간청하였고,임금은 호조에 명하여 원래 상환해야 할600석중 절반인300석만징수하도록감면조치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인조 8년 경오(1630) 6월 4 일(임자)] 이 결정이 내려지자 통진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현감의 덕정을 칭송하였다. 이는 단순한 행정 개혁을 넘어, 백성을 위한 실천적 정치 철학인 ‘위민사상’(爲 民思想)이구체적행위로드러난사례로평가받는다. 인조임금은 인재 등용에 있어 학문과 덕행을 겸 비하고언론활동에소신있는인물을중용하는기 조 속에서 공(公)을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에 제수하였다. 공은 그동안 지방관으로서의 탁월한 선정과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으며,특히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두 려움없는언론자세,말솜씨와문장력을고루갖춘인 물로평가받아감찰직에적임자라는평을받았다. 재임 중에는 특별히 상현궁(上弦弓) 1장을 하사 받는 영예를 얻었는데, 이는 무인의 상징이자 충성 과 기개를 상징하는 예우로, 조정의 신임을 나타내 는표징이라할수있다. 인조 7년(1629년) 사헌부 감찰로 활약한 공의 이 름이 기록된 『상대계첩(霜臺契帖)』 이 현존하는 것 으로 확인되어 있다. 이 계첩은 사헌부 감찰 15인이 모여친목을도모하며계회(契會)를가진모습을그 림과함께기록한귀중한사료이다. ‘상대(霜臺)’는 조선시대 언론과 감찰을 담당한 사헌부(司憲府)의 별칭으로, 그 이름처럼 서릿발처 럼 엄정하고 매서운 감찰 기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 다.계첩 속에는 감찰로 재직 중이던 공을 비롯한 동 료 15인의 이름과 함께, 계회 당시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묘사한회화가담겨있다. 이 그림은 단순한 모임의 기록을 넘어, 당대 언관 들이지녔던사명감과결속력을보여주는역사적상 징물로 평가된다. 공이 감찰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동료들과의 유대감을 유지하며 관직을 수행 했음을알수있는소중한단서이다. 전문가들은 『상대계첩』이 조선 언관 문화와 관료 사회의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 시각 사료로, 인물 연구 및 관청 문화사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고 보고 있다. 인조8년(1630),공은선혜청랑(宣惠廳郞)으로제 수되었다. 그는 대동법에 따라 징수된 대동미(大同 米),포(布),전(錢)의 효율적인 운반을 위해 선박과 주차(舟車)의설치를건의하였고,이는처음으로실 제운행에이르게되었다. 대동법은 이원익이 방납(防納)의 폐단을 절감하 고 공정한 세금제도의필요성을강조하면서그도입 을제안한데에서시작되었다.이후이정구,김육,이원 인 등의 인물들에 의해 구체적 시행이 이루어졌다. 공은 대동법 집행의 주무부서인 선혜청에서 근무 하면서, 물자 운반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처음으로 제안하고 실행함으로써 대동법 운영의 실무적 기반 을마련하는데기여하였다. 인조10년(1632)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부임하 여백성들에게큰사랑을받았고,그공적을 기려인 조 15년(1637)에 고을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거사비는 관리가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그 의덕정을잊지못해자발적으로세우는기념비다. 이후 공(公)은 다시 조정에 올라와 인조 18년(164 0)에형조좌랑(刑曹佐郞)에제수되었다. 형조좌랑은 형조(刑曹, 지금의 법무부에 해당)의 정6품 관직으로,형벌·재판·사법행정등국가형률을 다루는 실무를 담당하였다. 공은 이 자리에서 공정한 법집행과청렴한직무수행으로신망을얻었다. 이듬해인 1641년에는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로 승진하였다.장례원은노비의호적과신분을관리하 던 기관으로,사의(司議)는 그 중 판결 및 행정 실무 를 담당하는 종5품 관직이었다.공은 여기서도 제도 운영의형평성과실무능력을높이평가받았다. 이후 1644년(인조 22년)에는 지방 수령직인 풍덕 군수(豊德郡守)로 나아가 백성들의 생계를 살피고 선정을 베풀었다. 군수는 지방의 행정·사법·군사권 을 두루 관할하는 책임자로, 공의 실무 경험과 인품 이 현지에서도 크게 빛을 발한 시기였다. 이어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여 한성서윤(漢城庶尹)에 제수되 었다.한성서윤은한성부(서울)의행정과치안업무 를 관장하는 종4품 관직으로,당시 한성부는 조선의 수도였기에,이 직책은 단순한 지방 행정직을 넘어서 국가수도운영에핵심적인책임을지는위치였다. 공은이처럼중앙과지방을오가며행정력과청렴성을 고루발휘,유능하고신뢰받는관료로입지를굳혀갔다. 효종 5년(1654),공은 장락원첨정(掌樂院僉正,정4품) 에임명되었다.장락원은궁중의의식과연향(宴享)에서 음악과악기를관장하던관청으로,첨정은그실무와운 영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이후 공은 차례로 승진하여 당상관의 반열에 올라 국정의 중추에서 활동하였으며, 마침내 충직하고 청렴한 관료로서의 경력을 완수하였 다.그는탁월한행정능력과민본주의적정치관,그리고 사사로운 이익을 멀리하는 청렴결백한 인품을 겸비하 여,후세에도귀감이되는인물로평가되었다.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지방과 중앙을 두루 거치며백성들에게선정을베풀고충직한관리로명 성을쌓았으며,실무행정,민본주의정치,청렴한인 품을겸비한관리로서후대에도본받을만한인물로 평가된다. 공의 청년 시절은 전란과 정치적 격변, 사림의 분 열이이어지며국가체제가큰전환점(轉換點)을맞 이하던 격동의 시기였다. 그는 당쟁의 격화와 광해 군대의혼란한정국속에서벼슬에나아가기를사양 하고 남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오랜벗이던대사헌정엽(鄭燁)등의권유와조정의 천거로마침내늦은나이에출사하게되었다. 공은仁祖5年(1627년정묘)때李仁居난(亂)을적 발·진압한 공로로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 1 등에책록되었으며,이어가도사(假都事)로서난의 주동자중한명인유효립(柳孝立)을직접처단한공 으로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1등에올랐다. 공(公)은사리판단이분명하여옳고그름의기준 이뚜렷하였다.부모를섬김에는효(孝)를근본으로 삼았고,친구를대할때는의리(義理)와신의(信義) 를 지켜 한 결 같이대하니,당대의 명현(明賢)들 또 한서로존경하는마음을가졌다. 효심이깊어늘녹봉(祿俸:월급)으로부모를넉넉 히 봉양하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였다. 매년 부모의 생신이 되면 날짜를 달리해 여러 번 성대하게 음식 을 차려 올리는 일을 집안의 큰 행사처럼 했다.고사 (古史)를 즐겨 살피고, 자손들에게 좋은 것을 남기 기위해바른도리(道理)와훌륭한계책(計策)을나 누어 기록해 두어, 시정(時政)을 논할 때 참고하며 종종감개(感慨)하여탄식하였다. 성품이 신중하고 말을 아껴, 일을 계획할 때 매우 치밀했으며,자신의의견을함부로남에게드러내지 않았다. 자녀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몸소 절제되고 검소한 생활로 본을 보였으며, 관직을 그만두거나 다시 맡을 때에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후 벗과 친척들이 비로소 그 사실을 알 고탄복하였다. 公의 됨됨이를 알기 위해 전해오는 만사(挽詞)중 일부를소개한다. 『평생 동안 충성과 효도로 빛나는 명성을 떨치셨 으니, 거문고 소리를 울리며 예로부터 덕망 높은 분 들이찾는모임에도함께하셨다.백발이성성한노년 에꽃나무화분을두드리며즐기셨고,아흔을바라보 는 대질(大 玲 :80세)의 나이에도 비단 관복(緋衣)을 입는 기쁨이 꿈처럼 바쁘게 찾아왔다.이품(二品)에 오르는새교지(敎旨)에는곱게쓴글씨가빛나고,네 아들모두빼어난인물로장성하였다.그러나병환이 깊어 칩거하시면서 서로 자주 만나 뵙지 못하니, 살 아서나 세상을 떠나서나 그리움과 한(恨)이 끝이 없 구나.』-영돈영((領敦寧:정1품)白軒李景奭 『계(契)로 맺어진 인연이 있어, 한쪽으로 치우친 듯 두터운 정을 나누며 함께 지낸 세월이 어느덧 오 십 년이 되었구나. 은대(銀臺, 높은 관직)는 장수를 크게 기려 주었고,옥수(玉樹,훌륭한 자손)는 집 안 뜰에 가득하였네. 옛집의 용마루 위엔 달빛이 비어 있고, 가까웠던 친구들은 이제 새벽별처럼 하나 둘 사라져 갔다.백발의 늙은 벗이 남아 있으니,상여가 가는길목에서눈물을흘리지않을수없구나.』延陽 府院君 영의정(領議政)李時白 이번을사년윤달을맞이하여412년만에증정부인 광주김씨할머니를이장하여공과합폄(合 )하고묘 비명을 세우니 천년만년 자손의 복록을 빌어 본다.여 기에묘비명의시를소개하며글을마친다.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행실에 있어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벼슬에 나아가 오 래된 폐단을 바로잡고, 여러 공신의 업적을 함께하 였다.먼저아내를맞이하였으나,끝내관을메고돌 아오네.사백년만에다시만나니,천만년토록복록 을 두텁게 내려주소서.(性之英敏 行之孝友 出仕陳 弊參原從勳先娶歸 四百會劍千又萬年厚加福 祿) /함양박씨종사연구위원장박성호 감호박유관선생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1등 선조 유지를찾아븣 가계및생애 1635년 정축생계첩(丁丑生契帖), 소장 양주 사릉 해주정씨 종가.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오빠가 되는 능성부원군(綾城府院 君) 구굉(具宏)을 시작으로 김대덕, 봉사(奉事) 정효준(鄭孝俊) 등 동갑(同甲)인 29명의 계원에 대한 관직과 성명, 자(字), 호 (號),생일,본관(本貫)이기록되어있다. 감호공박유관의묘,금년윤달을기해증정부인광주김씨묘를천묘(遷墓)하여공과합폄으로모셨다. 조선왕조 실록, 고을의 형 편을 고려하여백성들의부 담을 줄여야 한다"고 간청, 이상소로600석중절반인 300석으로감면받았다. 인조 7년(1629년) 사헌부 감찰로 활 약한 공의 이름이 기록된 『상대계첩 (霜臺契帖)』계첩은사헌부감찰15인 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며 계회(契會) 를 가진 모습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귀중한사료이다. 출사와관력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