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25년1월31일 금요일 12 (제217호) 기획 매포박동립선생과청류당박동현선생은형제분으로사계김장생선생의제자중에수많은현인(賢人)중에서도가 장학문이뛰어나고절개(節槪)가뛰 어난제자이다. 옛명신(회재이언적)을모시는서원에이름을지어편액을내려주기를청하는상소문을올리는것은 도의(道義)를중시하는곧은심성의 표출(表出)이었고,또광해군이인목대비를폐모(廢母)하였을때장문의상소문을올려만류한것은굳센절의와오상 (五常)의법도를중시한것이고,이괄 (李适)의난(亂)과병자호란에의병을일으킨것은진정한충의(忠義)에서비롯된것이니어찌사림(士林,유림)의거두 인것이다.이처럼양형제분의절의 사상은스승사계김장생선생을주벽으로배향한전주청하서원에서후인(後人)으로인해세속(世俗)에이어지고있 다.특히매포선생이지은충효잠(忠 孝箴)에는지극한효애를찾을수있어형제분의우애를짐작할수있으며,성리학에심취하여더욱학문에힘써일가 를이루어소개해본다. 선생은 신라시조왕의 후예이다. 본관은 밀성(밀 양)으로 밀성대군 휘 언침은 관조이고,고려 문종조 에밀성부원군에봉해진태사공휘언부(彦孚)는중 시조이다.7세 전하여 휘 간(幹)은 문과급제로서 병 부참정(兵部參政)이었고,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배위는 추화군부인(推火郡夫人) 밀성손씨(密城孫 氏)인데여지승람에기록되어있다.두아들을두었 는데영균(永均),세균(世均)형제이다 행산공파파조가된차남세균은벼슬이고려조의 보문각 태학사이며 전문형(典文衡)과 중국 元나라 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셨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원나라 문관 구양현이 이별을 슬퍼하며 지은시(詩)“송고려박학사”는지금도전해지고있 다.귀국하여벼슬이평장사(平章事)에이르고,밀성 부원군(密城府院君)에봉해지고시호(諡號)를충정 (忠靖)이라별세후에받았다.또한수연(壽宴)을맞 으니임금께서기로치사(耆老致仕)와함께선(膳:궁 중요리)과 악서(樂書)와 광효(廣孝)라는 두 글자를 내리시어고향에서도임금의극진한대우속에만년 (晩年)을보내셨다.슬하에아들둘을두었는데장자 는 휘 문빈(文彬)이시니 도은공(挑隱公)이시며 차 자 소감공(少監公)은 휘 문익(文翊)이시다.도은(逃 隱)公은 포은(정몽주),목은 (이색)과 도의(道義)의 교분(交分)을 맺어 고려가 망(亡)하매 절개를 지키 고 새로운 조정(朝廷)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며 절 의를 지킨 채 세상을 마치었는데 이분들이 행산(杏 山)의삼학사(三學士)요,삼현(三賢)이다.라고화산 (花山)권용현(權龍鉉)先生께서글을남겼다. 도은공이아들신열·신경·신보·신총등사형제를두 었는데 매포·청류당 형제분은 이조참의를 지낸 넷째 휘(諱)신총(臣寵)의 팔세손으로 전북 전주 입향시조 승지(承旨) 휘(諱) 결(潔)의 칠세손, 판결사(判決事) 휘(諱)적손(迪孫)의 오세손이다.조(租)의 휘는 이화 (而華)니생원(生員), 아버지는종사랑(從仕郞)휘정 민(廷敏)으로어머니는면천복씨(沔川卜氏)이다. 매포 선생의 부인 부평이씨(富平李氏)는 선비 덕 창(德昌)의따님이니아들과딸은없고아우청류당 진사(進士)동현(東顯)의둘째아들증전(曾傳)으로 뒤를 삼고 진사 양시익(楊時益)의 따님에게 장가들 어일남(男)과삼여(三女)를낳았다 청류당 선생의 배(配)는 전주최씨는 첨지중추부 사(僉知中樞府事)식(寔)의따님이다.공으로더불어 나이가같으니낳아서부터심(甚)히부도(婦道)가있 었다.아들오남을두었으니맏이는증수(曾守),증전 (曾傳),증구(曾求),증도(曾道),증학(曾學)이다. 선생은 종사랑 (從仕郞) 휘 정민 ((廷敏)공과 어머 니 면천복씨(沔川 卜氏)와의 사이에 5남1녀 중 둘째 아 들이다. 1566년 12 월 13일 전북 완주 (현 전주)에서 태 어난 선생의 이름 은 동립(東立), 자 (字)는여신(汝信),호는매포(梅圃)이다.타고난성 품이 강직(剛直)하고 총명함이 또래보다 월등했다. 성장함에사계김장생선생을찾아수학(受學)하였다.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받아 전심(專 心)으로 탐구하여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더욱 부지런 하니사계선생께서특별히아끼고허여(許與)하였다. 어머니께서 당(堂, 집)에 있어 연세가 많아 함께 할 시간이 머지않아 벼슬(강릉참봉)을 버리고 시골 로돌아와더이상벼슬하지아니하였다. 집에 거처(居處)함에 부모(父母) 받들기를 효 (孝)로서 하고 형제(兄弟)를 벗처럼 사랑으로서 하 고 자질(子姪)을 가르치기를 의(義)로써 하고 비복 (婢僕, 노비)을 시험(試驗)하기를 순(順)함으로써 하여향당(鄕黨,지역사회)에서도(道)를간직한군 자(君子)라고하였다. 선생이집에서어머님을모심(奉養)에어린아이같 이 하여 잠시(暫時)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에는 부모의잠자리를보아드리고이른아침에는어머님의 밤새 안부를 묻는 등 효성을 다했다.어머니께서 구심 구세(九十九歲)에 평안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나니 선 생의 나이 칠십칠세였다. 초상(初喪) 치루기를 예경 (禮經)과 같이하여 삼년을 지내고 일 년을 더하여 마치 니사람들이이르기를효성(孝誠)이지극하다하였다. 선생이 지은 충효잠(忠孝잠)에 이르기를 그 처음 에백성이나니잡은떳떳함이고르도다.충(忠)이라 이르고효(孝)라이르매그이치가어찌갈렸다하리 오 마음이 체( 흐)를 궁행(躬行)하고 잠간(暫間) 사 이에 터럭만한 것이다.새에는 반포(反哺)하는까마 귀가있고풀에는해바라기가있도다.사람이가장신 령(神靈)한데감히소홀히잡고가지리오.어찌 자기 (自棄)하여 저 무지(無智)함이리오. 이로써 스스로 일깨우니때때로보인것에부칠지니라.하였다. 선생께서 1646년(丙戌) 9월 24일에 졸(卒)하시니 향수 81세로 어진 사람은 반드시 장수한다는 말을 믿어헛되이않은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일취 월장하여 1603년(선조 36)에 생원(生員)븡진사 시(進仕試)에 모두 합 격하였는데, 생원으로 는 1603년(선조 36) 계 묘(癸卯) 식년시(式年 試) 생원(生員) 3등 51 위(전체100중 81위)에 올랐으며,진사시의성적 은 1603년(선조 36) 계묘 (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2등9위(전체100명 중14위)였다. 초시(初試)에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전주태조이성계)이되었고성상(聖 上,仁祖)께서개옥〈改玉:즉위(卽位)〉하신다음해에말 미암아 유능(裕陵, 고려 예종의 능)과 강릉참봉(康陵 參奉,조선제13대명종의릉)을역임(歷任)하였다. 선생은 1622년 생원의 신분으로 선정신(옛 명신) 이언적(李彦迪)의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였다.그리고그기록은광해군일기[정초본]184 권,광해14년12월6일정묘2번째기사전주생원박 동립 등이 선정신 이언적의 서원을 사액토록 청하 다.전해진다. 광해조에 혼미한 정국에 폐모론을 반대하는 장문 의상소문을올리니이는굳센절의와오상(五常)을 따르는굳은심성에서비롯되었다할것이다. 광해군은 어렵게 왕위에 올랐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폭군이되었다.이복동생영창대군을강화도에위 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사는 집에 가시 울타리를 치 고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시킨 후 증살 (蒸殺,방안에가두고장작불을지펴열기에질식해죽 게한것)하였다.이과정에아들의죽음을지켜보아야 하는인목대비는찢어지는고통을안고살아야했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1615년(광해군 7년) 4월 인목 대비를경운궁에유폐시켰다.이처럼폐모론이기승 을 부리자 기자헌은 종친과 외척, 문무백관 등 무려 1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모아 공개토론회인 수의 를 열고 가부를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참석 자대부분이이이첨의주장에동조함으로써폐모반 대론자인 기자헌,이항복,정홍익,김덕함 등이 유배 형에 처해졌다. 이때에 선생은 폐모론에 반대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저항하였으나 적신(賊臣)유 희분(柳希奮)이물리친바되어세번궐하(闕下)에 이르렀다가마침내뜻을이루지못했다. 이때 선생이 지은 시 한수를 소개하면 『남명유대조 (南溟有大鳥)남쪽바다에큰새가있으니,기우삼천장 (其羽三千丈)그 깃털 길이가 삼천질이요.익격속하시 (翼擊屬何時)날개 친지가 어느 때였던가,풍운한상방 (風雲漢上放)바람따라구름따라한강위로추방되었 지』큰 뜻을 품고 상소를 올리고 폐모반대주장을 폈지 만결국유희분에의해무산된아쉬움을토로한것이다. 선생의 상소를 물리친 유희분은 광해군이 즉위하 자 왕의 처남으로 일문이 요직에 나갔다. 예조참판 때 이이첨(李爾瞻) 등과 함께 소북의 유영경(柳永 慶) 일파를 탄핵해 숙청하였다. 그 뒤 정인홍(鄭仁 弘)과 함께 대북에 가담해 정권을 좌우하며,대사간 ·도승지 및 이조·병조·형조의 참판 등 요직을 역임 하였으나훗날인조반정으로처형되었다. 이에 선생은 고향(故鄕)으로 돌아와 읍읍〈 쳅쳅 : 근심하는 모양〉히 세상을 즐겨하지 아니하고 집을 하파동(河波洞)뒤에쌓고채전(菜田)에한그루옥 매(玉梅)를 심고 자호(自號)를 매포(梅圃)라 하니 대개(大槪)옥(玉)같이깨끗한뜻을취(取)함이라. 선생은그러나나라가위태로울때는비록벼슬을 하지않았지만분연이일어나의병을일으켰다.1624 년(甲子)반정을명분으로왕위에올랐지만,인조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정공신 이괄의 반란으로 즉위1년도못돼한양을떠나야했다.조선시대를통 틀어 내부 반란으로 도성이 점령된 것은 이때가 유 일했다. 이괄의 도성 점령은 불과 며칠 만에 끝났지 만, 이를 기화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인조는 호된시련과굴욕을겪어야했다. 이때 선생은 동지(同志)와 모든 사림(士林)으로 의병(義兵)을모집(募集)하는도유사(都有司)로오 합지졸(烏合之卒)의 장병들을 정성스럽게 가르쳐 병졸(兵卒)을 만들고 재력(財力)을 모아 포미(布 米)를 모았으나 중도(中道)에 난(亂)이 평정(平定) 함을 듣고 포미(布米)등의 물건을 본관(本官)에 헌 납(獻納) 하였다. 또 병자년(丙子年,1636)에 청나라 가 침입하여 일어난 난리(亂離)에 의거(義擧)를 하 여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국가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였으나 중도에 화친(和親)이 이루어짐을 듣고 통곡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심(漢諶)은 성(城)을 등지고 맹서(盟誓) 하였으니/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산에 깃드는 것을 참았도다./ 세상에 주(周)나라높이는선비가떨어졌으니/밝은하늘에 통곡(痛哭)한들더위잡지못하리로다.」하였다. 선생의 이 같은 충절은 인조임금도 칭찬하여 그 기록이 조선왕조 실록 ‘인조 4년 병인(1626) 4월 21 일(계사)이조가김신국등에게관직을제수하였다’ 에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중간 생략- 승사랑(承 仕郞)행 강릉 참봉(行康陵參奉)에 박동립(朴東立) 을차하하였다.-이하생략- 선생이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진군하는 도중 화의가성립되었다는소식들듣고통곡하며지은시 (詩)는 비록 단율(短律)이지만은 자세(仔細)히 글 이 나타내는 뜻(文義)을 궁구(窮究)한다면 그 정충 (精忠)과 장절(壯節)이 가(可)히 밝게 우주(宇宙) 에추어올려도부끄러움이없다고할것이다. 일생을 불우하게 지내어 입추(立錐)가 없는데 곤 (困)하여변변하지않은음식또한여러번비었어도편 안한것같았고비록지위(地位)가덕(德)에맞지않지 만그부귀(富貴)보기를뜬구름과같이하였다. 선생은 또한 궁리(窮理)하는 학문(學文)에 힘을 써 일찍이 이르기를 「하늘이 하늘이 된 것은 쉬지 않음으 로서함이니만일헛되이하루를보낸다면하루의직분 (職分)을폐(廢)한것이다.」그래서공(公,선생)이배움 에 젊어서부터 노년(老年)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용 감(勇敢)하게 일찍이 잠간(暫間)이라도 글 읽는데 게 을리하지아니하니날로과정(課程)이있어비록행보 (行步)하는 사이에도 반드시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하여몸이혹(或)병이들어일을살피지못하는데 이르지 않으면 과업(課業)을 폐(廢)하지 아니하였다. 그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함에 통하지 아니하면 그 치지아니하여반드시통(通)해야이에그만두었다. 이렇듯 선생의 학문탐구의 열정은 뛰어난 문장으 로이어진다.그리고그문장은사계집,기봉집(卷之 五)등에전해진다.기봉집에전해진『謹寫二絶敢奉 白先生西赴平安幕左,근사이절 감봉백선생서부평 안막좌,감히백선생(白先生)을받들고서쪽으로평 안의 막차(幕次)에 나아가다.』 등의 시가 전해지는 데『위봉문명서(威鳳文明瑞)봉황새의위엄은文明 의 상서이니, 조양정홰홰(朝陽正 箏箏 ) 아침햇살 울 음소리 정확 하누나. 여하거기하(如何去岐下) 어찌 하여 기산아래를 떠나가, 오우경관외(五羽驚關外) 오색깃털 關西 밖까지 놀라게 해.』 이는 관서별곡을 지은기봉선생을찬양하는詩다.전남장흥출신인기 봉백광홍선생은훗날가사문학의효시가된관서별 곡을지어25년후의송강정철의관동별곡에영향을 준우리나라가사문학의거두이다.선생이백광홍선 생과 같은 문학의 거두와 교유(交遊)하였다는 것은 선생의문장또한엿볼수있다. 청류당 선생은 매포선생의 아우이 다. 공(公)의 휘 (諱)는 동현(東顯) 이요자(字)는여달 (汝達)이다. 1587년 (丁亥) 9월 2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배움을 읽더니 자 람에 능히 스스로 떨쳐 글을 읽어 나 이26세에광해군(光海君)4년(1612)임자(壬子)식 년시(式年試, 司馬試) [진사] 3등(三等) 26위(56/10 0)로 급제하였고, 그 기록이 완산지에 전해진다. 어 버이를섬기고모든형(兄)에미치기를효(孝)와우 애(友愛)로서 하고 규문(閨門)에 처(處)하기를 경 숙(敬肅)하고 성품이 준결(峻潔)하여 의논(議論) 갖기를강(剛)하고모나며사람이옳지못한것을보 면배척(排斥)하기를원수같이하였다.특히그의생 애는매포선생과함께하는충의정신을소유했다. 광해 폐조(廢朝)에 중형 참봉공(仲兄參奉公, 매 포 박동립)으로 더불어 붓을 떨쳐 상소(上疏)를 초 (草)하여 궁궐에 나아가 상장(上章)으로 항의(抗 議)하니 적신(賊臣)유희분(柳希奮)이 바야흐로 폐 의(廢議)를 주장하더니 공의 항소(抗疏)함을 듣고 사람으로 하여금 만나기를 요구하여 이해로서 달래 서당중인(黨中人)을삼고자하거늘공이소리를가 다듬어 꾸짖어 이르기를 「사람이 신하가 되어 국가 로 하여금 윤리와 기강(紀綱)을 멸(滅)하고 끊기게 하여 장차(將次) 불궤(不軌)의 흉모(凶謀)를 하니 복재간(覆載間)에한 큰난신(亂臣)이라」하고 드디 어 소매를 떨쳐 일어나 대궐로 나아가 피를 뿌리고 글을 올리니 희분(希奮)이 가(可)히 위협(威脅)하 지못할것을알고그무리에게부탁하여간사(奸邪) 한 백반(百般)의 꾀로 저알(沮 옥 )하여 마침내 이룸에 오르지못하니선생께서시사(時事)의가히어찌할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과거의 업(業)을 폐(廢)하고 세상 일을 사절(謝絶)하니 이에 거두어 품어 물러나 임학 (林壑)에 은거(隱居)하여 세상과 함께 가고 돌아오지 아니하니세상에아는이가적었다. 선생이 은거한 계산(溪山)에 청취(淸趣)가 있으니 머뭇거리며 그 자리를 멀리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땅 이라.그수성(水聲)에 청절(淸絶)함을사랑하여자호 (自號)를 청유당(聽流堂이라 하고 인(因)하여 서문 (序文)을지어서기(記)를하니이르기를아!물이여! 물이여!어찌 물 함이요 종조(終朝)토록 물에 임(臨) 하니 염옹(濂翁)의 탐리(探理)가 깊었도다. 아득한 나 소자(小子)는 수천재(數千載) 아래 낳아서 배움 이 끊어진 쇠(衰)한 끝에 어찌 감히 성현의 취(取)할 바를바라리오.비록간절히나라를위하여진실하고 정성스러워 하나 도리어 어리석고 도(道)있는 성학 에 나가고자하나 스스로 졸(拙)하니 분대 이행(履 行)하는데 편안하여 스스로 정정(貞淨)히 한당(閒 堂)에앉아서흉금(胸襟)이쇄락(灑落)한것은이물 의 흐름이 있어서 귀에 상쾌하고 기상(氣像)이 활발 (活潑)한것이 이물의흐름이맑은회포(懷抱)와같 은 고로 써 호(號)를 하였다. 또한 두어 절구(絶句)를 얽어 읊으니 이르기를 「영주(永州)의 정성스런 전갈이 슬픈 것이 말미암 음이 없으니 더러운 구렁에 애잔(哀殘)한 표주박이 락(樂)을스스로닦았도다.객(客)은금세의일을말 하지 말라. 막연(漠然)히 날로 들으니 산 물결이 흐 르는 도다. 깨끗하되 사람을 멀리 하지 않으리 사람 이 누가 비방(誹謗)하리오.곧으되 세속(世俗)을 끊 임이 없으니 속(俗)된 것이 어이 어기리오.백사(百 事)에 나의 일심사(一心事)는 흐르는 물소리 가운 데시비(是非)를씻는것이로다」하였다. 선생께서일찍이 엄친(嚴親,아버지)을 여위고모부 인(母夫人)을 알뜰히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기를 힘을 다하더니 하루는 중화(中和)를 잃어 설사(泄瀉)를 하 고누워심(甚)하거늘공이숙야(夙夜,이른아침과늦은 밤)에우려하여의원(醫院)을맞아증세(症勢)를관찰 하니의원의말에「별탕(鼈湯,자라를통으로삶아내어 뜯어서갖은양념을하고다시끓인국)이가장좋다」하 니때는바야흐로추운겨울이었다.백천(百川)에얼음 이쌓이고저자에어물(魚物)전이없어구하기가가장 어려웠다.선생께서눈을맞고몸소삼천(三川)으로가 서 부르짖어 울면서 분분(紛紛)히 방황(彷徨)할 때 홀 연히한마리의큰자라가언덕가무너진모래사이로 부터 나오거늘 기뻐하여 잡아 소매 속에 넣고 와서 탕 (湯)을 쓰니 과연 차효(差效)를 얻었으니 어찌 효(孝) 에감동한소치(所致)가아니겠는가. 선생은 매포공(梅圃公)으로 더불어 사계선생(沙溪 先生) 문하에서 예문(禮文)을 강예(講禮)하더니 선생 께서 문득 예경일권(禮經一卷)을 내어 사계선생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글속에 표(標)를 부친 곳의 글 뜻이잘못온오(蘊奧)가있다」하시거늘물음을청하여 논함에 이르매 공께서 옷깃을 걷고 단정히 앉아서 호 (毫)를 나누고 누(縷)를 분석하되 모든 손바닥을 가르 치는것같거늘선생께서크게여겨마음으로말씀하시 기를「이는참남주(南州)의높은선비로다.」하시었다. 선생의성품이엄(嚴)하고법도가있어서집다스리 기를사교(四敎)로서하니근검(勤儉)하고공서(恭恕) 함이요집바르기를사례(四禮)로서하니관혼상제(冠 婚喪祭)이었다.자제가공사(公事)가아니거든감히행 하기를청(請)하지못하고또한자질(子姪)을경계(警 戒)하여이르기를집의형세(形勢)가비록공핍(空乏) 하나빈(貧)이라는한글자는선비의떳떳함이니만약 옳지 않은 재물과 이름 없는 물건은 일체 몸에 가까이 말게하고또한행실(行實)잡기를가(可)히삼가지아 니치못하여의리가아닌말은입으로이르지아니하고 의리아닌행동은문(門)에나서지않아몸을행하고입 을 여는 것을 만약 삼갈 신자(愼子)로 삼아 지키지 아니 하면 군사를 일으키고 화(禍)를 부름이 영향(影響)보 다빠르니조심하고조심할지어다하시고또한「네난 바를 욕(辱)됨이 없게 하라」는 다섯자를 써서 주면서 이르기를「우리집이대대로충효로서서로전(傳)하여 오니 너의 무리는 구업(舊業)을 이어 지켜서 가성(家 聲)을떨어지게하지말라」하시었다. 선생의성품과학문이이처럼높아가히형만한아우 없다하지만,1623년(계해)6월26일에질병으로서마치 시니향년(享年)37세이기에애석하다.선생이절구(絶 句)로서 이르기를 「요순의 임금 돕기를 원(願)하고 공 맹(孔孟)의 스승 쫓기를 원(願)하노라. 성인은 천년으 로멀어졌으니궁(窮)한구렁에서홀로생각에얽히노 라」하여오직충과효를실천한생애이다할것이다. 매포·청류당 선생의 삶에서 우리는 진정한 충(忠) 과효(孝)를알수있다.인격적완성을위해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세속적 이익보다 대의와 의리 를위해목숨까지도버리는선비정신이오롯이베어있 다.그리고그정신은사림의표상이되어려말조선초 문신정수홍(鄭守弘)을주벽으로하고,조선전기문신 정곤(鄭坤),병자호란때창의한정달서(鄭達恕)등과 함께 완주군 구이면 학천서원 학천사에 배행되었다. 그러나대원군의서원훼철령에의해훼철되어전주중 인동의 청하서원 복설과 함께 스승인 사계 김장생 선 생과함께배향되어지역유림이향사를받들고있다. 특히 두 형제분의 우애(友愛)는 21세기 우리들에 게큰교훈이된다.부모(父母)를받들기를효(孝)로 서하고형제(兄弟)를벗처럼사랑으로서하고자질 (子姪)을 가르치기를 의(義)로써 하고 비복(婢僕) 을 시험(試驗)하기를 순(順)함으로써 하여 향당(鄕 黨)에서 도(道)를 간직한 군자(君子)라고 하였으니 매포·청류당 형제분의 삶을 다시 한 번 더 우리 곁으 로소환해밝고아름다운사회가되길소망해본다. 매포박동립·청류당박동현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선원세계 매포박동립·청류당박동현선생을배향하고있는청하서원전경 청하사에봉안된매포선생위패 조선왕조실록, 선정신 이언적 의서원에사액을청한기록 병 자호란은결국삼전도의굴욕적인치욕으로남는다.(그림 인터넷에발췌) 청류당선생의위패 매포박동립선생의생애 [초시(初試)와관직(官職)] [광해에게장문의상소문을올리다.] [이괄의난·병자호란에분연히의병을일으키다] [선생의학문과문학] 청류당박동현선생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