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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12월31일 화요일 12 (제216호) 기획 고려말조선초격변의시기에불세출의인물이있었으니위남박희중선생이다.태종조에문과에급제하여관로에 오른이후이조(吏曹)·병조정랑(兵曹正 郞),동궁(東宮,훗날세종)서연관(書筵官)을지냈고,예문관지제교겸춘추관기주관을역임하였으며해동명필(海東 名筆)이라칭송을받았고,춘정변계량 春亭卞季良)과는도의(道義)의사귐이깊었다.호정(浩亭)하륜(河崙)의문하에從遊(종유)하여호정(浩亭)의선친(先親 )하윤린(河允潾)의신도비문을쓰기도 하였다.전농시윤(典農寺尹)으로있을때일본국회례사로국위를선양하였으며,명나라에조선건국의승인을받으 려고사신으로다녀오는등외교에 있어 탁월한재능을발휘하여예문관직제학에제수되었고,특히고조선의6대저수지의하나인김제의벽골제(碧骨提)수 축때경차관(敬差官)으로공사를완성 하였다.남원부사(南原府使)에임명되었고,결연(決然)히진원(珍原)땅에귀향하여위남어수(葦南漁 쑴 )라자호(自號 )하고후진양성에전념했으며청백전가 (淸白傳家)의가훈(家訓)을남기는등진원박씨의중흥기를이끌었다.사후(死後)에학림사(鶴林祠,장성군진원면)에 배향(配享)되었다. 위남공의 휘는 희중(熙中), 초명은 희종(熙宗)으 로 태종 대왕이 공의 기량을 인정하여 어필로 본명 「熙宗을熙中」으로개명케했다.위남(葦南)은아호 이고,본관은진원(珍原)이다. 고려 말엽에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6世 홍서 (洪瑞)의 아들 휘 온(溫)은 구례감무(求禮監務)를 지냈는데바로위남공의아버지이다.어머니는진원 전씨(珍原全氏)로 공은 외아들로 고려 공민왕 17년 (1368)에 태어났으니 때는 고려가 원의 간섭(干涉) 을물리치고새로운개혁정치를추진하던시기였다. 공민왕 때의 업적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신유학인 성리학(性理學)을크게일으킨일이다.즉성균관을 지어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을 대사성(大 司成)으로 삼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 2)이하여러학사(學士)가참여하여새로들여온성 리학의 경전을 가르친 결과 신진기예(新進氣銳)의 선비가 문하에 모여 들어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 傳),양촌 권근(陽村 權近)등 려말 선초의 대성리학 자(大性理學者)가길러져나오게되었다. 권 양촌(權 陽村)은 바로 뒤에 위남공(葦南公)과 도의의 교분을 가졌던 분이다. 신진사류에 의한 유 학진흥은 경도(京都)의 오부학당(五部學堂)과 지 방의향교설립으로사회저변에크게확산된듯하다. 당시 불교가 지배적인 사회 속에서도 앞날에 청운 (靑雲)의꿈을키운유능한젊은이는새시대의실학 인 성리 경전공부에 몰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남 선생도 20세 내외의 청춘시절을 바로 이런 쪽에 파 고들어 열심히 원전(原典)공부를 했던 것으로 짐작 된다.조선왕조가건국된이듬해인태조2년(1393년) 26세(歲)로 성균생원(成均生員試)에 합격한 것은 그런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원래 生員은 경서(經 書)시험으로 뽑고 진사(進士)는 문예출신(文藝出 身)인 점을 생각하면 위남(葦南)선생은 고려 말 다 난(多難)한시절에도흔들리지않고안으로신유교 (新儒敎)공부에 몰두했다가 신왕조(新王朝)의 거 의 첫 사마시에 응시하여 생원이 된 것으로 보아 틀 림없겠다.그런데 그로부터 또 8年이 지난 태종원年 (1401년)34세 때 태종 즉위 기념의 증광시(增廣試) 에서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선다. 위남 선생 은 아마도 20세 가까이까지는 시골 전라도 진원 땅 에서아버지휘온(溫)공과어머니진원전씨를모시 고 농사지으며 뜻 펼 때를엿보다가 마침내 개경으 로 올라가 하륜(河崙)의 문하(門下)에 들어간 듯하 다. 이 무렵 태조 초기는 실질적인 건국주역 이방원 (李芳遠, 뒤의 太宗)이 아직 실세를 잡지 못하여 왕 자의 란 등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던 때이다. 이 때 태조의 심복 정도전 등을 몰아 치운 방원파(芳遠 派)대표중의 한 사람이 하륜이고 그의 문하에는 천 하의 젊은 인재가 모여들게 된 바 위남 선생도 그 중 에 들었을 것이 예상된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왕 위에오른태종왕의즉위를기념하는당왕(當王)첫 증광시에응시하는기회포착자체가그런가능성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더구나 급제 후 곧 승문원 정자 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 이조·병조의 낭관으로 거 듭임용된것을보면초임부터청요(淸要)한벼슬길 에 나선 것이니 이미 태종의 노력이 절대화 되면서 위남공은그중에서도핵심적인하륜파의한중추인 물로부상된것이거의확실하다. 이리하여 위남 선생의 관직생활은 신유학의 경서 실력과 특출한 글 및 글씨솜씨에 막강한 하륜파의 배경을 업고 풍랑 속에서도 탄탄하게 이어져 갔다. 즉, 태종5년(1405년) 38세 때에는 인사행정의 본부 인 이조에서 요즈음으로는 기안 책임자라 할 수 있 는 이조좌랑의 요직에 오르고 이듬해 군자감 승이 되었는데곧전라도선위별감겸경차관으로특명되 어 지방출장에 나섰다. 이때 첨절제사 구성미(具成 美)가 왜구와 싸우다가 전상을 입어 王이 내린 어주 를 가지고 가 문병 위로하는 한편 호송 중의 관곡을 왜구에게 빼앗긴 도관찰사 박은(朴 첩 )과 도절제사 김계지(金繼志)등에게는 책임을 추궁하는 등 소임 을 완수하였다. 그런데 이 특사로 남행한 길에 아버 지온(溫)公이감무로있는구례읍을예방하였는바 이때 양친 부모는 아직 시골에 계셨는데 아들이 영 달(榮達)하여내려오니온고을이부러워했던것같 다. 뒷날 이것을 트집 잡은 말썽까지 난 것을 보면 화 려한나들이였음이미루어짐작된다.어쨌든귀경하 고 세자좌정자(世子左正字)에 올라 당시 세자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교육을 맡았는데 이는 葦南공의 실력과 높은 위상을 잘 드러낸 것이다. 특히 가장소 송(家庄訴訟) 문제로 관궁 황도(黃稻)에게 청하여 세자의힘을빌리려했다는말썽으로사간원의지적 을 받아 해직당하기까지 한 것을 볼 때 당시 위남공 은조정내의세력판도에서상당한힘을구사할수 있었고,또 그만큼 주목의대상이되어밀고밀리는 정치싸움의 한 중심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그러기에45세 때태종7년(1407),병조정랑(오 늘의 국방부 총무과장격)의 요직에 임명되고 동료 정랑(同僚正郞)과 다투었다고 벌을 받기까지 하였 지만 다시 곧 이조정랑으로 영전하였으며 태종대왕 이 위남공의 기량을 인정하여 어필로 본명「熙宗을 熙中」으로 改名케 했다는 것이다. 관인(官人) 생활 에서파직되고처벌되는것은일단불명예스럽고치 명적이겠지만당시금방풀리고중용되는것이일쑤 인것을감안하면이런부침은정치판에서현실세력 에따라항용(恒用)되풀이되는소장(消長)일뿐이 를 오늘의 생각으로 기피, 은폐나 변명을 하려들 것 은없다고보여진다.그러므로43세때태종10年(14 10)에는 점마별감(點馬別監)으로 의주(義州)에 가 서 중국에 조공할 말을 점검하는 중임을 치렀는데 이때에도사고가나서해직되었으나곧풀려난일이 있었는바 왕조실록에는 인사기록 대부분이 사건사 고로 채워져 있고 잘 근무한 동안의 사실은 거의 반 영되지 않은 실정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하 여 43세 때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 있으면서 하륜 정승의사위이승간(李承幹)등과같이고양포(지금 통진)에 나가 방조제를 구축했다는 것으로 보면 여 전히하륜정승파의주요인물로활약을계속하고있 었음이 확연하다.더욱 48세 때 태종15년(一四一五) 에는 또 경차관이라는 특사가 되어 전라도 관찰사 박습(朴習)과 함께 김제 벽골제(碧骨堤)의 대수축 공사감독을맡았는데이제언(堤堰)은널리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삼한 이래 우리나라 최대의 수이시 설이므로 이 공사는 당시로도 매우 중요한 사업에 속하였던것같다. 『김제(金堤)벽골제기(碧骨堤記)에,“태종(太宗) 15년에 경차관(敬差官) 박희중(朴熙中)을 보내어 관찰사 박습(朴習)과 더불어 다시 중수(重修)하였 다. 그 비(碑)에 말하기를, ‘벽골제(碧骨堤)는 그 내 부의둘레가7만7406보(步)이다.5개의도랑을파서 논에물을대는데그논은모두9840결(結)95부(負) 로서 이는 옛 문서에 기재된 것이다.그 첫째 도랑을 수여거(水餘渠)-한물줄기는만경현(萬頃縣)남쪽 까지 흘러간다.-라 하고,그 둘째 도랑을 장생거(長 生渠)-두 물줄기가 만경현의 서쪽까지 흘러간다.- 라하며,그셋째도랑을중심거(中心渠)-한물줄기 는 고부군(古阜郡)의 북쪽까지 흘러간다. -라 하고, 그 넷째 도랑을 경장거(經藏渠)- 한 물줄기는 인의 현(仁義縣)서쪽까지흘러들어간다.-라하며,그다 섯째를 유통거(流通渠)- 역시 인의현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라고 한다. 이 다섯 도랑이 물을 대 는토지는모두비옥한데,이도랑들은백제븡신라시 대부터 백성들이 혜택을 입어 왔다. - 신라 흘해왕 (訖解王) 21년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축조(築造)하 였다.-고려현종(顯宗)때에이르러옛제도대로수 리하였고,-인종(仁宗)21년인 계해년에 다시 증축 하였다.-우리 성상(聖上)이 을미년 봄에 관찰사 박 습 등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였다. 이에 위에 상주 하여각고을의민정(民丁)1만명과간사(幹事)300 명을 징발,9월 갑인일(甲寅日)에 기공하여 10월 정 축일에 준공하였다. 제방의 북쪽에 태극포(太極浦) 가 있으니 조수의 물결이 세차고 급격하며, 남쪽에 는양파교(楊波橋)가있는데물이깊이고여있어서 옛날부터난공사(難工事)로되어있었다.이제먼저 태극포(太極浦)에 둑을 쌓아서 그 세찬 수세(水勢) 를죽이고,다음에양지교(楊枝橋)에아람드리나무 를 세워서 기둥을 삼고 나무다리를 걸쳐서 목책(木 柵)다섯을만들고속을흙으로채웠으며,또제방이 깎이고 무너진 곳에는 모두 흙을 올려 메워서 평평 하게 하였다.또 둑의 안과 밖에는 버드나무를 두 줄 로심어서견고하게하였으며,둑의하광(下廣)은50 척,상광(上廣)은 30척,높이는 17척이었다.수문(水 門)은마치구롱(丘壟)같이보였다.가운데의세수 문은그대로옛돌기둥을수리하였고,수여(水餘)와 유통(流通)의두수문은돌을깎아서주춧돌로삼고 괴목(槐木)의기둥을세웠다.또양쪽곁의돌기둥이 움푹 빠진 곳에는 괴목의 판자를 가로로 설비하여 안팎에고리로연결된쇠사슬을달아서문의판자를 들게 하였으니,그 문의 너비는 모두 13척이고,돌기 둥의높이는15척이며,땅속에들어간것이5척이다. 아래는 돌로 다지고 쇠를 녹여서 굳히었다. 문의 양 쪽 곁은 돌을 깎아서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다리를 만들어 통행하게 하였다.때는 영락(永 樂)13년이다.”하였다.』이처럼방대한공사를감독 케 한 것은 김포 들 방조제공사를 치른 위남공의 경 험을 높이 사 이때 특명을 내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위남공은고을수령들과먼저현지답사를하고세밀 한 계획을 세워 왕의 윤허를 받고 농사가 대강 마무리 된 9-10 월(陰曆)에 군민 일 만명과 간사자(幹事 者) 삼백명을 동원하 여 수축을 끝냈는데 그 사적이 기적비로 남아 지금에 전하고 있다. 현지에는 이때 짚신에서 턴 흙이 산 이 되었다는 전설의 흔적도 있지만 동국 여지승람과 다산 정 약용선생이목민심서에자세한기록이있는것으로 보면 그 중요도를 인식하고도 남게 함이 있다. 49세 때 태종16년(1416년)에는 동관(東官, 뒤의 世宗)의 서연관이되고이어예문관지제교겸춘추관기주관 으로특별승진되는데이는더없이청요(淸要)한중 직(重職)에 임명된 것이다. 당시 좌의정이던 하륜 (河崙)이 그의 선친(先親)증 영의정 윤린(允潾)公 의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문은 춘정(春亭)변계량(卞 李良,조선전기수문전제학,의정부참찬,대제학등을 역임한문신)이짓고그글씨와비음기(碑陰記)는葦 南공이 맡아쓰고 짖게 되어 하 정승의 상주(上奏)로 태종이특별히승진시킨것이다.이비는지금도경남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에 남아 있어 경남 유형문화재 제191호로 보호되고 있다. 위남(葦南)공이 51세가 된 1418년에 특별한 지우 (知遇)를 입은 태종이 승하하고 세종대왕이 즉위하 였다. 이 변동 때문인지 얼마 뒤 위남공은 외포(外 浦)가 되어 중앙무대에서 잠시 떠난다. 즉 54세 때 세종3년(1421)무렵 외직으로 발령되어 고향 근처인 영암의지군사(知郡事)로내려왔다. 당시전라도장 윤화(張允和)가공사집행에부정을너무많이저지 르자위남공은동료수령박초(朴礎)등과함께장감 사의 비행 50여조를 들어 탄핵하는 운동을 벌이고 결국파직케하였다.그뒷자리는하연(河演,조선초 기 유학자. 문종 대에 이르러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평생 조정에 복무하면서 세종을 보필했으며 안평대 군이나 집현전 학사들과 교유하면서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이 임명되었는데 이 하 감사와는 뒷날까지 불화(不和)가계속된듯하다.어쨌든위남공은장윤 화가 말 한대로 다재다능하고 배경이 좋아 방백의 권세도 별로 개의치 않고 소신껏 일을 처리해 나간 듯하거니와관계의속성상이래저래정적대립자도 많이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55세 때 세종4년(1422) 전농시윤(典農寺尹)으로 재임하면서 일본국 회례 사(回禮使)에 임명되어 부사 이예, 서장관 오경지, 통사윤인보등과함께세모(歲暮)에현해탄을건너 갔다. 왕은국사와더불어특히두꺼운옷과털모자, 신발및약(藥)가지를하사하면서위로격려하였다. 이는조선왕조실록에자세히전하고있는데그기사 는다음과같다. 【세종실록 18권,세종 4년 12월 20일계묘3번째기 사】『일본회례사박희중등에게옷등을하사하고국 서를 내리다』일본 회례사(回禮使)박희중(朴熙中) 과 부사(副使) 이예(李藝) 등이 길을 떠나니, 각각 옷 한 벌씩과 모관(毛冠)·갓[笠]·신[靴]과 약품을 내리고, 서장관(書狀官)인 봉례랑(奉禮郞) 오경지 (吳敬之)와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 등에게 각 각 모의관(毛衣冠)·갓·신을 내렸다. 국서(國書)에, 뷺조선 국왕은 일본 국왕 전하에게 회답한다.바다와 하늘이 멀고 넓어서, 소식이 오랫동안 끊겼더니, 이 제 전위하여 보낸 사신 편에 주신 글월을 받아 몸이 편안함을잘 알고,또 좋은선물을받게 되니기쁨과 감사함이매우깊소이다.말씀한바대장경(大藏經) 은 어찌 좇지 않으리요. 또 태후(太后)가 구주 도원 수(九州都元帥)를시켜귀한선물을보내주시고겸 하여 대장경을 청하니, 또한 마땅히 좇아야 할 것이 매,지금신하전농시윤(典農寺尹)박희중(朴熙中) 과 용양 시위사 호군(龍 웹 侍衛司護軍) 이예(李藝) 등을 보내어 가서 후의(厚意)를 사례(謝禮)하게 하 오. 상세한 것은 별록(別錄)에 갖추었으며, 온 사신 이말한대장경동판(銅板)은우리나라에없는것이 니 양해(諒解)하기 바라오.앞으로 더욱 신의(信義) 를 굳게 지키고 길이 많은 복을 받기를 비는 바이오. 뷻라고하였다. 당시 양국 간 왕래는 매우 험한 바닷길을 건너기 마련이며 한 겨울 중요한 사행이라 특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서내용으로 보면 저들의 대장경 구청사(大藏經求請使)가온데대한회례사로간것 인데 여기서 흥미 있는 사실은 대장경의 목판 인쇄 물도 얻어가기 힘들었던 터에 당시 日本은 한 걸음 더하여 동판(銅版,실은 나무로 된 원판)을 희구(希 求)하고있었다는것이다.당시일본인의불교열(佛 敎熱)은 대단했던 것으로 그에 따른 장경(藏經)의 수요가 극심하여 이 대장경구청사행(大藏經求請事 使)이 빈번하였으며 이런 문화갈증이 뒷날 임진왜 란때의문화재약탈전쟁으로이어지기도했던것이 다. 아무튼위남공은이큰외교사행길에전일대마 도원정때의피로왜인간부(被擄倭人幹部)두명을 데리고가 원(願)을 들어주기도 하고체재(滯在)13 개월동안탁월한문필(文筆)로추앙을받았는데돌 아 올 때에는 사행선군금정 왜사준(使行船軍金貞· 魏思俊)을살해한규수하카타(九州博多)거주일본 승려(日僧)인증천·증익을체포 귀국하여창원부에 수감, 엄벌케 하니 사림들이 장(壯)한 일을 하였다 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 하여 사헌부와 사 간원의 모함을 입은 사건이 생기고 왕의 특별 배려 와용서를받기도하였으나그사이승진(昇進)된예 문관직제학자리까지내놓게되었다.이사행(使行) 과관련된말썽은위남공의시원시원한행동의소치 라 하겠는데 어쨌든 이후 조정에서도 자주 언급될 만큼파문을일으킨선례가되기도했던것이다. 한편 전래보첩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건국승인을 明나라에서 받아내는 외교활동이 누대에 걸쳐 전개 되는 가운데 위남공은 58세 된 1425년 그 사행의 일 원으로선발되어중국을왕래하면서많은성과를올 렸으므로 세종왕이 일·중 양국에서의 노고를 치하 하여 예문관직제학에 특임하였다 한다. 이는 유승 (柳乘)의 행장(行狀)에서도 「일사재사(一使再使) 에 군명(君命)을 완수(完遂)하니 진사직지신(眞社 稷之臣)이라」고 칭찬하고 있어 위남공의 화려한 대 일 대중 외교활동상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59세 세 종8년(1426)얼마전에다시외직(外補)으로남원부 사가 되었는데 이는 신물수령(新物守令)에 맞는 요 직으로 역시 시원스레 일을 잘 치러나갔다. 그런데 시기한 사람의 모함이 또 있어 사헌부의 문책을 받 게 되자 20년 가까운 벼슬길을 결연히 내던지고 물 러났다. 이 무렵 이조판서 황희가 위남공을 동정했 다가탄핵을받았다는기사(記事)가실록에있는것 으로 보아 이때 위남공은 상당히 억울한 조사와 처 분을 당한 듯한데, 어쩌면 한편으로는 당시 중앙요 직에올라가있던하연(河演)과도충돌을일으킨듯 하다. 위남집에서는 62세때 세종11년(1429) 河演을 탄핵했다가 벼슬을 물러나 고향 진원으로 돌아왔다 고 했는데 년대나 내용에는 불확실한 점이 있어 보 인다. 귀향한 위남공은 위남어수(葦南漁 쑴 )라고 자 호(自號)하고 농사와 낚시로 유유자적 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때 가훈으로 청백전가「淸白 傳家」라는 四大字를 써서 후세에 남겼다 하니 위남 공의심정(心情)을헤아리고도남음이있다.그런데 64세때 세종13년(1431)의 실록 기사 중에 총제(總 制)이천(李 횡 )이 갑선(甲船)을 제조하면서 기술부 족을탄하다가전에전라도에서갑선을제조한위남 공의사례를참조하여완성시켰다는대목이있어위 남공은실지유용한과학기술면에도상당한솜씨를 보인사실을알게한다. 노년을산수와더불어오히려뜻있게보낸위남공 은 세종28년(一四四六) 4월 21일 78세를 일기로 돌 아가시니옛진원땅성상동(현진원면학림리)계좌 에 안장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영광오씨로 3남 4녀 를 두었는데 세 아들이 다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특 히 長子는 보성 선씨에 장가든 인연으로 보성에 들 어가세거하면서크게번성하고문강공죽천박광전 (文康公竹川先生)같은현손(賢孫)을보게되었다. 위남공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화기에 태어나서 신유학(新儒學)을 공부하고 조선왕조 창업기에 정 치·외교면에서중요한역할을한분이었다. 이제그 인품과 자질을 종합해 보면 태종실록의 한 언급에 「세계비미(世系卑微)」라 하고 또 전라도에 봉사하 여아버지의감무처소인구례읍에가서찾아뵈옴으 로써 결과적으로 어버이를 욕되게 하였다. 운운한 것이 있어 당시 위남공의 가세와 조건은 별로 힘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왕조 거 의 첫 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시 당대 최고 실력자의 하나인 하륜 門下에 들어가 태종 즉위와 동시에 대 과에 급제하고 입신출세의 길에 나선 것을 보면 대 세파악의 혜안이며 기회포착의 정치력이 매우 뛰어 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 천품을 타고난 면도 크겠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새 경전공부와 작문및서예솜씨가특출하여소대과에실력으로합 격하고 하륜의 아버지 신도비 글씨를 맡아 쓰고 또 음기(陰記)를더지어썼다는엄청난실적은중국을 덮을만한 능력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이다. 나아가 실 록기사중의「자위다능(自謂多能)」 운운의 실례는 두세번의경차관과회례사등일본및중국봉행,그 리고 갑선 제조의 경우와 같이 남이 못한 난공사 및 지난 외교사행(外交使行)등을 성과 있게 완수하는 솜씨에서 잘 들어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위남공은 탁월한 능력을 갈고 닦아 발휘하는 한편, 그 과정에 서 소신 있게 과업을 추진한 부작용 또한 적지 않아 누차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본의 아 니게 해직도 당하고 벌을 받기도 하였지만 금방 풀 리고 더욱 영달해 나간 것은 국초의 관계가 아직 불 안정한 탓도 있겠으나 능력과 배경이 이를 극복해 나간 것으로 보여 지며 결코 수단으로 자리를 유지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륜과 태종왕의 신임이 그토록두터운것은위남공의자질과능력이확실한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위남공은 사고 가 났을 때에도 조선조 최상의 청백재상(淸白宰相) 황희(黃喜)의 각별한 협조를 받을 만한 분이었으며 詩文에 보이는 바와 같이 하륜 말고도 권근·변계량 등과 도의의 교분이 두터운 처지에 있었다. 그리하 여 초예(草隷, 초서와 예서를 아울러 이르는 말)글 씨가뛰어나국중(國中)에이름나고해동필원(海東 筆苑)에게재되어있는등자료까지종합해볼때벼 슬자리의 높낮이 등 여러 가지를 더 곁두릴 것 없이 위남공은 당대 최상급의 능력보유와 실력발휘를 한 인물임을확인할수있는것이다. [자료인용-20세손文學博士박성봉지음‘위남선 조의생애와위상’,조선왕조실록등] 위남박희중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위남선생의생애 전남장성군진원면학림리전경(위남공묘역아래는배위진원전씨묘소). 학림사전경.전남장성군진원면학림리. 하윤린신도비 위 남공묘소,학림사앞에있다.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