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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10월31일 목요일 12 (제214호) 기획 서붕박병배선생은일제강점기를지나조국근대화의미명아래‘국가유지발전’이라는광범위한정책을제시하며 정쟁이난무하는시대에5선국회의원으로서애민정신을발휘했다.그는부모를 생각하는효자의마음으로국가를걱정하며‘국가유지론’을주창하고,백년대계를세우기위해‘국가유지론서설’을 펴내많은지식인들을깨우쳤다.그의삶을기리는유진오전신민당총재는서 붕선생을조병옥박사의후계자로지목하며“그는유석보다도충무공의상속자가분명하다”고말했다.이는서붕선 생의위국충정의삶을잘나타낸다.특히서붕선생은여성들의사회진출을위 해서대전여자고등학교를설립하고,산아제한에반대하며출산율을높여야한다고주장했다.이는현재대한민국의 출산문제로인한국가적위기를예견한것으로그의혜안을잘보여준다. 서붕 박병배 선생의 본관은 충주(忠州)이 다. 그는 여러 대(代)를 내려 와 대전에 정착 한 참의 공(휘 소)의 후손이 다. 할아버지 휘 준근(駿根) 공(公)은 연재 송병선과 교류 하였고, 간재 전우, 면암 최 익현 등과 함께 성리학을 깊이 연구한 대전의유학자였다.아버지는 지역민의 굶주 림을 걱정하고 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몸소실천한효자휘헌영(憲榮)으로,조 부와부모님의삶을이어받았다. 서붕선생은1917년충청남도대전군(현재대전 광역시 유성구 복용동)에서 태어났다. 대전공립 중학교 3학년 때 충남전위동맹사건으로 투옥되어 퇴교하였다. 1933년 경북공립고등학교에 편입한 후,193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1936 년 의헌병대의 지시로 퇴학당했다.이후 1936년부 터 1940년 2월까지 용산육군창고에서 필생 복무 했다. 1940년 일본 전수대학에 입학하고,1943년경성제 대법문학부로전입했다.재학중전국정구대회에서 일본인의편파적인심판에항의하여퇴학당했다.이 후 학병으로 일본육군예비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 을 받고 2차 대전에 참전했다.1945년 미군정에서경 찰로근무하며충청남도경찰청경찰부장대리가되 었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빨치 산 토벌에 참여했으며, 경무과장, 결찰학교장, 부산 전투소장, 치안국 교육과장, 경남경찰국장, 치안국 특수정보과장, 경비과장, 보급과장, 서남지구 전투 경찰 사령관, 강원도 경찰국장을 거쳐 1956년 서울 시경찰국장이되었다.경찰관료에서퇴직한뒤1961 년까지 대전일보 회장, 사장 겸 발행인으로 언론인 의사명을다했다. 국방부정무차관재임시에는월남을방문하여파 병군인들을격려하였고,주월미군사령부를방문하 여에이브람즈대장의영접을받았다.그는한·미·월 수뇌가추구하는국가이익이각각다르다는점을인 식하고,파월장병철수를주장하기도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에 공천 신청을하였으나탈락했고,무소속으로대덕군선거 구에출마하여현역국회의원인자유당후보를누르 고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같은선거구에출마하여당선되었다.19 61년 국방부 정무차관 겸임 제1차 방화군사 사절단 장으로방중하면서외교에서도두각을나타냈다.19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대 전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973년 1월 유진산에 반대하여 신민당을 탈당하고 민주통일당에 입당했다.같은 해 제9대 국회의원 선 거에서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으나,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하여 재검표를 실시한 결과 2 4표 차로 당락이 바뀌어 민주공화당 김용태 후보와 동반당선되어5선국회의원이되었다. 1979년 중경개발주식회사(유락백화점, 유락예식 원)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1980년 장충정공 (장개석 총통) 송덕사업회 회장을 맡았다. 1980년 5 월 17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 이른바 신군부 인사들 이정권을장악하기위해주도한5·17내란으로정치 규제를 받았으나, 1984년에 해금되어 같은 해 서대 전여자고등학교를설립했다. 서붕 선생은 뷺국가의 운명은 미래를 짊어질 젊은 이들이 어떻게 자라나느냐에 달려 있다뷻라고 강조 하였다.그는인간의 품성과 인격은 중·고등학교시 기에 형성된다고믿어,자신의재산을 헐어학교를 세우고 교육 환경을 개선하는 데 아낌없이 투자하 였다.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과 임야를 자 손에게 물려주기보다는 할아버지의 유훈과 자신 의 철학에 따라 학교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2000년에는 200억 원에 달하는 땅을 대전광역시 교육청에 기증했다. 서붕 선생이 교육 사업에 헌신 한 것은 확고한 신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 는 국민 개 개인 의 자질 과 역량 이 향 상되 어야 민 주 시민으로서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믿었다.그는 사재 를 아끼 지 않고 사 학 경영 을 통해 교 육 발전 을 이루고자 하였다. 여성 교육과 문화예술 발전의 중 요성을일찍이깨달은그는서대전여자고등학교를 개설 할 때 교정 에 신사 임당 동 상을 세 워 교육 의 이 정표로삼았다. 서대전여고는월평공원도솔산자락에넓은터를차 지하고있으며,수령200년에달하는소나무숲과햇볕 잘 드는 본관 건물에 도서관, 급식실, 강당이 조화를 이 루는최적의교육환경을갖추었다.이학교는명문사 립일반계고등학교로성장하여지난1월까지38회졸 업생을배출하며13,603명의여성인재를양성하였다. 또한,1992년3월에는조부의유훈인“有限人生樂 在育英”(유한인생낙재육영)을받들어학교법인돈 운학원의 설립인가를 받아 대전예술고등학교를 개 교하였다. 이는 꿈을 품은 학생들이 끼와 재능을 발 휘할 수 있는 고등교육 체계를 만든 것이다. 대전예 술고는충청권에서처음으로개교하여음악과미술, 무용등의 중부지역 예술교육의요람이 되었고,최 근까지5,783명의졸업생을배출하며역사와전통을 자랑하는명문예술고등학교로성장하였다.이는예 술 문화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우리나라 예술 교 육발전의주인공이되었다. 서붕 선생은 방송에도 관심을 갖고 서울방송이 출범할 당시 주주로 참여하여 고문으로 활동하였 다. 2004년에는 대전외국어고등학교가 선생이 기증 한땅으로신축 이전하여,다목적시설을 븮서붕관븯으 로 명명하였다. 선생의 자신의 철학 애민사상과 교 육의숙제를후학에게맡기고2001년7월12일밤,숙 환으로별세하였다. 서붕 선생은 1970년 5월 16일, 국회의원으로서 제7 대국회본회의에서국가의 위기를방치한책임을지고 전 내각의 총사퇴를 촉구 하며 븮국가유지론서설븯을 발표했다. 이 440페이지에 달하는 저서는 태국이나 일본이 독립을 자랑하는 민족이 된 이유를 반추하며, 한국 이왜븮침략과예속븯이라는슬픈운명에놓여야했는 지를질문하고그해답을제시한다. 저서에는 븮한국독립을 유지하는 길븯,븮나라의흥망 은어디서유래하나븯,븮공허한명분보다국가이익을븯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이는 그가 일생 동안 국 가 유지의 위기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며 쌓은 신 념을담고있다는평가를받고있다. 특히 븮국가유지에 필요한 사람들븯에서 그는 뷺국가 유지란국력신장과국민발전에서시작되고종결된 다.뷻며,국민을억압하고구속하는것이어떻게국가 를유지할수있는지를반문한다. 그는 청년들이 해외로 나가 경험을 쌓고 취업 기 회를 얻는 것을 촉구하며,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산 아제한 정책에 대한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 를"국가쇠망을자초하는철없는짓"이라고지적하 며즉각중지를요구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산아제한을 목적으 로한가족계획이정부주도의국가사업으로추진되 는 상황을 ‘근시안적 쇠망 정책’이라며 중지할 것을 주장했다. 현재 인구 감소로 인해 각 지자체에서 소 멸을막기 위한비상이 걸린상황을보면,그의주장 이 시의적절 했음을 알 수 있다.서붕 선생의 통찰력 은당시뿐아니라오늘날에도여전히중요한의미를 지닌다. 이와 함께 당시 선생이 주장했던 행정도시 대전 이전이 오늘날 세종행정도시 이전으로 이루어 진것을보면선생의혜안에놀라지않을수없다. 후학들은 지난 8일, 서 대전여고 교정에 선생의 동상을 세우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한 다짐을 새로 이 했다. 국가의 백년대계 를 이루려 했던 선생의 철 학과 정신을 이어받으려 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 어, 같은 날 서대전여고에 서 열린 흉상 제막식에는 500여 명의 내외빈이 참석 하여선생의국가유지론과교육에대한열정을계승 하려는의지를다짐했다. 선생이1967년에설립한아세아평화문제연구회에 서는 선생의 저서 븮국가유지론서설븯을 54년 만에 재 발간하며, 젊은 청소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순한글로출간했다.선생의손자인돈운학원박영철 이사장은 뷺서붕 선생께서는 해방과 6븡25 전쟁 이후 국가의 장래에 대한 고민과 해결책을 븮국가유지론 서설븯에담으셨습니다.그의혜안이절실한지금,이 책의재발간은큰의미가있습니다.뷻라고말했다. 박이사장은뷺이저서가발표된시점은광복후25 년이 지난 때로, 국가의 정체성과 지향점이 모호한 상황에서침략이나예속없는국가유지를위해깊은 고민을 하셨다뷻며, 뷺그 고민을 바탕으로 정계 은퇴 후 인재 양성과 교육에 헌신하며, 여성의 사회참여 와 문화예술, 세계 외교를 위한 교육시설을 세우고 토지를기증하셨다뷺고설명했다. 선생의 장학사업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박 이사장은뷺대학교나남자고등학교를세우라는권유 를뿌리치고여성의자기계발을통한성공적인사회 진출을 위해 서대전여고를 설립했습니다. 또한, 문 화예술의 중요성을 예견하고 대전예술고를 설립하 셨습니다.뷻라고강조했다. 1998년,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주변 지인들이 서붕장학회를 설립하였다. 2024년 현재까지 예능 실 기 우수자 5,949명에게 시상과 격려를 하였으며,성적 우수자220명에게장학금을지급하는등박우숙장학 회 이사장을 중심으로 선생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다하고있다. 선생의행정수도대전이전과산아제한폐지는타 고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 고 선생의 저서 ‘국가유지론서설’을 재 발간하고 서 거20년이지난오늘날에이르러선생에대한평가를 섣불리 한다는 것은 자칫 누를 끼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이에재단법인서붕박병배선생기념장학사 업회박우숙이사장이선생을회고한글을인용하여 마무리하고자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새삼 선생에 대한 그리움 이 절절한 것은 현재의 국 가안보와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가 선생님께 서 생전에 외치시던 ‘국가 유지’의 위기와 같은 심각 한 현실로 나타나기 때문 입니다.선생님께서는 197 0년 5월 16일 국회 대정부 질의를 통해 국가 유지를 위태롭게 하는 현실을 통 렬히 비판하며 정일권 국부총리 이하 전 각료의 총 사퇴를요구하셨습니다.‘국가유지’는선생님께서5 선국회의원으로활약하는동안일관된정치목표였 고신명을바쳐투쟁해온신념이었습니다. 그 신념이 얼마나 강하셨으면, 국무총리 이하 모 든 장관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저술하신 ‘국가 유지 서설’을 전부 통독하고 그에 상응한 의견서를 제출 하도록하셨겠습니까?헌법학자이자고려대총장을 하신 유진오 박사는 서붕 선생님의 ‘국가 유지론’에 대해 조국을 사랑하는 그 충정이 눈물겹다고 하며 거국적 호응을 촉구했습니다. 이는 그 내용의 진정 성과열정을이해하는데큰도움을줍니다. 사실 선생님은 일생을 통해 국가 유지의 위기를 직접목격하고체험하며그신념을행동으로옮기신 분입니다. 나라를 잃은 암흑기에 청년 시절을 보내 면서 국가의 자주 독립을 뼈에 새기셨고, 해방 후에 는경찰에투신하여혼란스러운국가치안의안위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국방부 정무차관으로서 베트 남 전쟁의 처절한 현장을 돌아보시고, 정부의 무능 과 부정부패로 인해 국가가 공산화되어 가는 것을 목도하시며절통해하셨습니다. 안보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측면에서도 선생님은국가유지의중요성을일깨우셨습니다.‘국 가 유지론서설’ 174페이지에는 국력과 산아제한의 상관성을꿰뚫어보시고,아들,딸많이낳아잘키우 는방안을제시하셨습니다.그러나선생의충언을소 홀히한현재의우리나라는인구감소로국가위기를 맞이하고있습니다.이는선생의미래전망이얼마나 명확하고적확한지를드러내는예라할것입니다. 국가의 3대 구성 요건은 국민, 영토, 주권이며, 인 구감소는국가유지의체계를흔듭니다.현재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2018년 0.98명에 불과하며, OECD는 인구 구조 변화가 국가 성장 동력을 크게 후퇴시킬 것이라고경고하고있습니다.이대로저출산이계속 된다면국가기반유지에위기가닥쳐올것입니다. 서붕선생님의예리한통찰력과먼미래를투시하 는 혜안은감탄을 금치못하게하며,그의뜨거운 애 국심에는머리가숙여집니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국가유지론’을주창한서붕박병배선 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생애 서대전여자고등학교,대전서구배제로197번길20(도마동) 대 전예술고등학교,대전유성구월드컵로308번길33(상대동) 서붕 박병배 선생 존영(尊影) 서울경찰국장 재임시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을 안내하고있 는서붕선생(오른쪽2번째) 국방부정무차관 재임시 월남을 찾아 파병군인들을 격려하 고 있다. 주월 미군사령부를방문하여 에이브람즈 대장의영접을받 고 있다. 1992년 대전예술고개교기념식과 입학식에서 기념사를 하 고 있다. 2000년200억에달하는땅을대전시교육청에기증, 이후20 04년대전외국어고등학교는 선생이 기증한 땅으로 신축 이 전했다. 국가유지론서설(國家維持論序說) 1970년국회본회의에서국가유지론서설을발표한다. 국정의진상을국민에게알리는서붕선생. 국회발언 선생의추승사업 선생의유지를받든장학사업은꾸준히전개하고있다. 동상제막 박영철돈웅학원이사장 맺음말 박우숙서붕장학회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