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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7월31일 수요일 12 (제211호) 기획 곧은성품은사림의귀감이되었고,평생청빈한삶은옥구슬처럼빛나고정승으로천거되었으나정승에오르지못했 다.이는조선전기의문신으 로조선전기도승지,대사헌,지중추부사등을역임한박소립(朴素立,1514~1582)선생을말한다.‘경팔립(京八立)’은 설립(立)자를 돌림자로 쓰고 있는데사촌간8형제가모두현달(賢達)하여진사와사마시에입격하고앞다투어문과에급제하여관계에진출하여 얻은명성이다.이또한선생 을두고하는말이기에소개해본다. 박소립(朴素立)선생은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이며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자는예숙(豫叔)이다.본관은함양(咸陽)이고, 거주지는 서울 돈의문 밖 월랑암촌이다. 증조할아버 지는사복시정에추증된박신동(朴信童)이고,할아버 지는승정원좌승지에추증된박중검(朴仲儉)이다. 선생은병조판서를지낸박습(朴習)의5대손이며 돈녕부 정을 지낸 구당 박세영(朴世榮)과 이조참의 를지낸명헌박세옹(朴世 죕 )의조카이며의정부좌 찬성을 지낸 무환당 박대립(朴大立)과 종형제간이 다. 또한 공은 성리학의 일가를 이룬 승정원 동부승 지문목공잠야박지계(朴知誡)의숙부다. 아버지는 세계최초 아동교과서인 동몽선습을 저 술한 군자감정, 증 예조판서 박세무 (朴世茂)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포은 정몽주(鄭夢 周)의문인으로예문관대제학을지낸매헌권우(權 遇)의 현손녀이며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권잉(權 仍)의딸이고2남을낳으니,공은형제중장남으로1 514년 (중종9년:갑술) 서울에서 태어났고 수안군수 를지낸박응립(朴應立)과동기간이다. 배(配)는 평해손씨(平海孫氏)로 봉렬 대부(奉列 大夫) 의서습독관 (醫書習讀官), 통정대부(通政大 夫) 행(行)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를 지내고 증 이조참판인 손숙겸(孫叔謙)의 딸이고 전라도 관찰 사와호조참판을지낸손식(孫軾)과동기간이며,손 위 동서로 풍천임씨 관찰사 임내신이 있다. 1남1녀 를 낳으니 아들은 소격서 참봉을 지낸 생원(生員) 박지언(朴知言)이고 딸은 문하부(門下府) 내사사 인(內史士人)심종수(沈宗壽)에게출가하였다. 공은어려서한번들으면잊지않을정도로영민(英 敏)하고 총명하였으며,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 며,동몽선습을 지은 아버지 소요당(逍遙堂)에 이어지 는가학(家學)을계승하여사서삼경(四書三經)을탐독 하였고, 가정에서는 장남으로서 부모에게는 조석(朝 夕)으로예를갖추어문안드리고효(孝)를실천하였다. 공의아버지(소요당)는물론백부(돈영부정박세 영)와 숙부(이조참의 박세옹) 들이 문과에 급제하 고 관계에 진출하여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주요 요직을섭력(涉歷)하고당대명현들과교류하며시 회(詩會)와학문을논하며우의(友誼)를다졌고,당 대주요벌열(閥閱)집안과통혼을하면서정치적입 지를구축하니집안이승승장구하게된다. 평온하고고요하며주관이뚜렷하였고산업을경영 하지 않고 시임(時任, 현임 대신 등)에게 가지 않으며 외모를꾸미는일이거의없고선(善)을즐기고의(義) 를 좋아하는 일에 독실하였고,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 진 자의 일일지라도 그것이 부당하면 가차 없이 직언 (直言) 하였다. 또한, 집에서는 장남으로서 부모를 효 성(孝誠)으로섬기고형제와우애하여화목하였다. 공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 다.그는성품이평온하고고요하며훌륭한행실로명 망이있었다.그가의정부사인으로임명받았을때실 록에서는그에대하여말하기를,“마음을곧게갖고몸 가짐은 청렴 근신하게 하였는데 지난 날에 이량 등의 미움을받아 무거운화를 입었다.”라고 하였다.(『명종 실록(明宗實錄)』명종18년12월28일)또그가홍문관 직제학으로 임명받을 때는 실록에서는 “온유(溫柔) 한 가운데 주관이 뚜렷하였고 친구사이에 신의가 있 었다.”라고하였다.[『명종실록』명종22년3월20일] 학문이가득했던집안에서태어난선생은1534년(갑 오)진사시에입격하였다.천성이매우간묵(簡默:말수 가적고태도가신중하다)하고일찍부터명망이있어 성균관의 추천으로 음직(蔭職)에 제수되었다가 참봉 (參奉)으로서 1554년(명종 10,을묘) 식년시(式年試) 을 과(乙科)2등으로문과에급제하였다.사림출신의신진 관리로촉망을받아승정원주서를시작으로관료생활 을 시작 하게 되는데, 그 당시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사 건을살펴보면명종연간은전체적으로보면사림파의 실세기(實勢期)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명종 말 ~ 선 조 초의 사림정치 시대의 막을 여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묘사화이후사림은상당기간동안위축되었다 가 이후 중종 말부터 정계에 재등장하였지만 명종 초의거듭된사화로또다시상당한피해를입었다. 집권세력의 집권 정당성(正當性) 확보라는 필요 에의한것이라는한계는있었지만사림파의정치적 역할이 잔존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이 시기 훈척 세력 (勳戚勢力; 공로가 있는 임금의 친 척)이자파세력의일부를도태(淘汰)시키는과정에 서 사림의 공론을 일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도 역시이러한분위기에서나온조처였다. 이후소윤정권(小尹政權)이어느정도안정되어가 는시점에도일부새로운사림파가계속해서등용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사림파가 척신(戚臣)집권 하에서도 계속정치세력으로기능할수있음을보여주는것이다. 특히명종친정이후소윤세력과이량(李樑)세력간 의갈등이표면화되는시기에오면사림파의존재가중 요한 관심사로 대두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예컨대 이시기사림세력은이량(李樑)이그의아들인이정빈 (李廷賓)을 전랑으로 천망(薦望; 윗자리로 천거하는 일)하려하자이를박소립을중심으로윤두수등이적 극반대할정도로정치적으로성장하고있었던것이다. 선생은 이러한 시기에 홍문관 정자, 예문관 대교, 홍문관 부수찬, 병조 좌랑, 홍문관 수찬, 이조 좌랑, 사헌부지평,홍문관부교리등청반(淸班:지위는낮 으나 높은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관직으로 과거출 신자로서 임용)을 두루 역임하고,핵심 요직인 병조 정랑,이조정랑이되었다. 그무렵이량(李樑)이자신의아들이정빈을알성시 문과에우수한성적으로급제시키고요직인좌랑에추 천하였으나 상피제(相避制, 친족이나 기타 긴밀한 관 계에있는자들사이에같은곳에서관직생활을피하게 하던제도)에의해아들이취임하지못하자아들의친 구인 유영길(柳永吉)을 후임으로 추천하니,이조정랑 박소립이이를못마땅하게여겨처음에머뭇거리며난 색을보였고이조좌랑오음윤두수(尹斗壽)등과함께 이를끝까지반대하였다.이문형(李文馨),허엽(許曄), 사정(司正)기대승(奇大升)등도 이에 함께 반대를 동 조하니이로인해혐원(嫌怨:싫어하고원망함)을품고 국정을 농단(壟斷)하는 이량과 이감에 의해 “부박(浮 薄,마음이들뜨고가벼움)하며선동한다.”는죄명으로 삭탈관작(削奪官爵)하여문외출송(門外黜送:죄인의 벼슬과품계를빼앗고한양밖으로추방)되었다. 정랑(正郞) 박소립(朴素立)븡좌랑(佐郞) 윤두수 (尹斗壽) 등 정론(正論)의 지지파와 이문형(李文 馨)븡허엽(許曄) 등은 그에 추종하지 않아서 벼슬을 쫓겨나는등한때잠잠했던사림(士林)의화(禍)가또 일어나려했다.그때이량의생질손암심의겸(沈義謙: 심강의 아들)은 우연히 그들의 흉악한 모의를 엿듣고 평소에많은사람들과교제하면서이량의처사를미워 했으므로 이때 비밀리에 임금에게 알려져 내지(內旨) 를 얻고 부제학(副提學) 기대항(奇大恒)을 유인하여 상소로써이량의죄를탄핵케하여1563년(명종8)이량 은강계(江界)로귀양가고이감등간신(奸臣)도모두 멀리귀양을가게되었다.이량(李樑)은명종의비인인 순왕후(仁順王后)의외삼촌으로당대의척신이었다. 이량(李樑)의사건은모두마무리되면서무고로연 루되었던사림들은복직되었고공또한 그 해 9월15일 복직되어서이조정랑,의정부사인,홍문관응교,의정 부사인,사헌부장령,이조의정랑,홍문관부응교,의 정부사인,홍문관응교,사헌부집의,사복시정,홍문 관직제학을지냈으며1567년(명종22)승정원동부승 지가 되었다.1567년 명종 승하 후 선조임금으로 대통 을 잇게 한 공이 크며 선조 즉위 후 성균관 대사성에 2 번 올랐고, 1571년(선조4년)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72년(선조 5)도승지가 되었다.1573년(선 조6)경상도,충청도,경기도관찰사,한성우윤을거쳐 1574년 대사헌이되었다. 예조판서,이조판서,우참찬 을거쳐이듬해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지내고정 승천을받았으나정승이되지못하고1582년(선조15) 4월졸하였으며청백리(淸白吏)에뽑혔다. 공이정승(政丞)은되지못했어도정승추천을받 은사람을복상(卜相)이라고하는데이또한영예로 운 일이나, 함양박씨로 복상의 영예를 안은 분은 공 (素立)과무환당공(大立)뿐이다. 선조14년 11월 실록을 보면 영의정(領議政) 박순(朴 淳)이호남에성묘를가는데좌의정(左議政)은공석이 고우의정(右議政)은김귀영혼자남게되었다.서둘러 복상(卜相)하라는 명을 받은 박순은 정지연, 이이(李 珥),정유길(鄭惟吉)을복하려하고,우상김귀영은이 문성, 박대립(朴大立)을 복하려 했다.결국 김귀영(金 貴榮)이 박순(朴淳)의 의견에 따라 정지연(鄭芝衍)과 박소립(朴素立)을 추천하니 상감이 정지연에게 낙점 을 찍어 우상이 되고 귀영은 좌상으로 승진하니, 공 (公)과종형인대립이복상으로그치고말았다. 이모두가운(家運)이요,문운(門運)이아니던가? 또한당색(黨色)도작용한듯박순(朴淳)은서인(西人) 쪽이고,공은동인(東人)아니었던가?싶다.(공의종형 (從兄)무환당공이퇴계(退溪)의문인록(門人錄)에올 라있는데퇴계의문인들이 거의가동인(東人)이었다) 서인(西人)의 영수인 이이(李珥)의 적극적인 반 대는공과종형인무환공이복상(卜相)후정승에오 르지못하고탈락하게된다.년기(年紀)로보나벼슬 열력(閱歷)으로 보나 후발주자인 정지연(鄭芝衍) 에게 정승 자리를 빼았기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 다.이리하여조선조(朝鮮朝)오백년에그많은정승 가운데한자리도차지하지못했다. △1534년(21세:중종29)식년시생원에3등으로합 격하였다. △1544년 (31세 :중종39)5월7일 어머니의 상을 당 하여 양주 신혈리 (神穴里)[현 서울 은평구 진관외 동]에묘소를마련하고삼년상을마치다, △1551년 (38세:명종 6) 봄에 양종[兩宗, 선종(禪 宗) 교종(敎宗)]을 회복시키자 태학(太學)의 유생들 이 여러 달 동안 대궐(大闕) 앞에 엎드려 항소(抗疏) 를하여장차성균관(成均館)을비우고떠나게되었는 데, 지금의 감사(監司) 박소립(朴素立)이 그때 소두 (疏頭)가 되어 그들의 거취(去就)를 유희춘선생(先 生)에게 묻자 선생이 말하기를,“신하의 의리는 일이 있으면힘을다하여간할따름이다.무리를이루어달 아나는것은임금을협박하는데가깝다.또어떻게아 주 가버리고 돌아오지않을 수있겠는가?”하였다.박 소립이크게그렇게여기고글을지어제생(諸生)에게 보이니 제생이 비록 끝내 떠나기는 하였으나 사람들 은선생의말을사체(事體)를아는말이라고하였다. △1555년(42세, 명종10) 식년시(式年試) 문과(文 科)에을과(乙科)2위로급제하였다. △1556년(43세, 명종11) 12월 21일 승정원(承政 院)주서(注書)가 되었고, 1557년(45세,명종12) 7월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가 되었으며, 7월19일에 예문관(藝文館)대교(待敎),검열(檢閱), 1559년(47 세)부수찬(副修撰), 그 해 12월22일 병조 좌랑(佐 郞),1560년(48세)1월 홍문관 수찬(修撰),그 해 8월 홍문관 부수찬. 9월 홍문관 부수찬, 1561년(49세) 5 월 이조좌랑, 1562년(50세) 8월 사헌부 지평(持平), 그해12월홍문관부교리(副校理)가되었다. △1563년(51세,명종18)1월20일병조정랑(正郞)이 되었다가같은해2월10일 이조정랑이되었는데,8월1 7일당시명종의총애를받던척신이량(李樑)과사이 가 나빠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 다. 이량이 술책을 써서 자기 아들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갑과(甲科)로뽑히게한뒤전랑(銓郞)으로추 천하였으나 상피제(相避制)에 의해 아들이 취임하지 못하자아들의친구인유영길(柳永吉)을후임으로추 천하니,이조좌랑 박소립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좌 랑오음(梧陰)윤두수(尹斗壽)등과함께이를반대하 였다.졸옹(拙翁)이문형(李文馨),초당(草堂)허엽(許 曄), 사정(司正)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등 당대 의명사(名士)들도이에동조하였으나,국정을전단하 는이량과이감에의해“부박(浮薄)하며선동한다.”는 죄명으로 관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윤원형(尹元 衡)과심의겸(沈義謙)의도움으로그해9월15일홍문 관 부교리로 복직되고,10월에 이조 정랑이 되었으며, 12월에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이되었다. △1564년(51세, 명종19) 윤2월28일에 응교(應敎) 가되고,그해3월4일에다시의정부사인이되었고, 6월13일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6월 26일 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으며, 11월5일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고, 12월6일에 사복시(司僕 寺)정(正)이되었다. △1565년(52세,명종20)2월28일아버지의상을당하 자양주신혈리(神穴里)에합장하고삼년상을마쳤다. △1567년(54세,명종22)3월4일에홍문관응교(應敎) 가되었다.3월20일홍문관직제학(直提學)이되었으며, 그 해 6월24일 승정원 (承政院)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6월28일명종이후사(後嗣)없이돌아가자중전 의명을받들어원상(院相;나이어린왕을보좌하던원 로재상) 이준경(李浚慶), 도승지(都承旨)이양원(李陽 元)등과같이덕흥군(德興君)의셋째아들선조(宣祖) 를 임금으로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우고, 1568년(55세, 선조즉위)10월23일대사성(大司成)이되었다. △1569년(57세, 선조2) 윤6월 9일 우부승지(承旨: 형방)가되었다.9월27일유희춘전별하다 △1571년(58세, 선조4) 성균관(成均館) 대사성 (大司成)이다시제수되다 △1571년(58세, 선조4) 5월12일 승지 박소립이 이 어서 임금이 신하가 할 노고를 대행함을 말하면서, “갖가지 아무렇게나 올리는 상언(上言)이나 백사 (百司)의 자질구레한 공사(公事)가 모두 주상의 정 력을피로하게하고손상시키는일이니지극히미안 한 일입니다.”하였다. 6월2일 주강에 참석하여 승지 박소립이‘맹무백(孟武伯)이 묻기를「자로(子路)는 안합니까?」孟武伯問子路仁乎장을강하다 △1571년(58세, 선조4) 1월 22일 성절사(聖節使) 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3월13 유희찬이 숙배 를 드리기 전에 승정원으로 들어가 도승지 이후백 (李後白)과 좌부승지 박소립을 만나보고 전별주를 마셨는데 이조 좌랑 정지연(鄭芝衍)과 병조참의 홍 천민(洪天民)도와서모였다 △1572년(59세,선조5)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29일에 도승지가 되었다. 7월28일 우승 지 박소립이 퇴계 이황선생 시호를 하사할 것을 간 하다 박소립도 말씀드리기를,“당초 죽었을 때도 명 을 내리시어 특별히 예(禮)를 갖추었으니, 이제 또 특별히시호를하사하시는것이좋겠습니다.” △1573년(60세, 선조6) 3월21일 함경도관찰사가 되고 이어 7월6일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그 해 8 월29일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부친 소요당박세무묘갈을노수신에게부탁하다 △1573년(60세, 선조6) 양주 목사 남언경(南彦經)이 도봉서원건립을추진하자공사비용을적극원조하기 도 하였다.도봉 서원 설립을 발의한 사람은 양주 목사 (楊州牧使)로부임한남언경(南彦經)이었고부제학이 었던허엽(許曄)·좌참찬백인걸(白仁傑)·이조참판박 소립(朴素立) 등 조광조의 문인들이 설립을 주도하였 다.도봉서원이설립되어조광조(趙光祖)의위패를봉 안하고, 1696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였다. 도 봉서원은도성에서가까워많은학사와문인,관리들이 출입했으며, 특히 서인, 노론계 중심의 서원으로서 그 위세가매우컸다.옥산서원신도비각을옮겨세우다 △1574년(61세,선조7)9월27일사헌부대사헌(종 2품)이되었으며, △1575년(62세, 선조8) 1월10일 대행대비 시호를 삼공과함께논의하다.1월16일사헌부대사헌(大司 憲)에제수되다. △1576년(63세,선조9)3월29일경상관찰사가되다. △1577년(64세, 선조10) 거업록요어를 발간 권말 이인의 발문에는 평양부에 있던 활자본(活字本)이 널리유포되지못해학자들이책을구할수없었는데, 다행히한책을구해서전방백(方伯:관찰사)박소립 의도움으로책판을새겨간행했다는기록이있다. △1578년(65세,선조11)이조판서가되다. △1579년(66세,선조12)6월8일 이이의상소에대 해 말을 하다. 그 뒤 지중추부지사 (知中樞副知事), 우참찬(右參贊)이되었다. △1581년 (68세, 선조14) 2월6일 계후자에 대하여 논의하다.9월1일 정승천을 받다.정유길(鄭惟吉)을 우의정으로삼았다.이때강사상(姜士尙)은병으로 체직되었고 노수신은 상을 당하여 좌상븡우상의 자 리가 모두 비어 있었다. 이문형(李文馨)은 유속(流 俗)의 구신으로서 스스로 나이 젊은 사류들에게 붙좇 았고박소립도시류들에게추종하여명예를얻고있었 으므로사람들은이들이재상이되기를기대하였다. △1582년(69세,선조15)4월24일신해일세상을떠 나니나이는69세로생을마감하였다. 죽어서도자식을사랑한다.어떤선비가만난박소립 돈의문(敦義門)밖에어떤선비가있었는데부모의 병으로 의원을 찾아 새벽에 나섰다. 기영(畿營) 다리 근처에 이르니 한 재상이 가마를 타고 호위병을 거느 리고지나갔다.선비가작은길로피하니재상이사람 을시켜서할말이있다며선비를불렀다.선비가그말 을 들으려고 가까이 가서 말(馬)을 세우니 재상이 말 하기를 “나는 문내(門內:사대문 안)에 사는 이상(貳 相)박소립(朴素立)인데내가죽은지거의일년이되 어 오늘이 곧 내가 죽은 날이라네. 아이들이 소상(小 祥)이라술과음식을마련하여와서먹고돌아가는길 인데집식구들에게전할것이있으니,원컨대우리집 에이것을전해주기바라네.”하고는유지(油紙)에싼 것하나를주면서다행히말을전할수있다면둘째며 느리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해 달라고 하였다.선비는 그사람이귀신임을알고멍하니그물건받았다.선비 는가는길이비록바빴으나부득이그집에가서상주 보기를 청하였다.문지기가 주인이 소상을 마치고 문 을 닫았으니 만나기 어렵다고 하였다.선비는 사정을 설명하며 비록 제사를 마쳤더라도 만날 것을 청하여 상주를만났다.그는길에서일찍이만난적이없는재 상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면서,매우 이상하여 부모의 병으로 의원을 만나는 일이 절박하나 부득불 와서 그 상황을알린다며유지에싼것을주었다.또그것이작 은 며느리에게 전하는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상제가 놀라며유지를풀어보니약과한개와전복한개가있 었다.또찢어진유지조각에구슬이하나따로있었다. 상주가 아직 거두지 않은 제상을 보니 약과와 전복이 하나씩빠져나간흔적이있고,바닥에있는유지한모 서리가 잘라져 있었는데 구슬을 싼 것과 맞추어보니 딱맞았다.박소립이사망하여반함(飯含)구슬을넣을 때에 구슬 하나가 모자라 찾던 중에 작은 며느리에게 마침 있어서 사용하는데 과연 이 구슬이었다.처음에 작은며느리가곤란해하며내놓기를꺼렸다.영산(靈 山) 윤천복(尹天復)이 선비의 자손들에게 들은 것을 김이행에게전한이야기이다.(梅翁閑錄) 공이正卿(정2품이상의벼슬)에오른후일이다.이때 사재공은팔각정(八角亭)냉정동(冷正洞)에집이있어 종택에서두어마장거리에서살고있었다.제사때면의 례자손들이월랑암촌(月廊岩村)宗宅(무환당공)에모 여 제숙(齊宿)하는 것이 家法이었는데 한번은 명절 차 례에 사재공(四宰公 :素立)이 진설(陳設)할 무렵 에야 종가집에도착하는지라,종손(從孫,무환당大立)이들 어오라는말씀을안하시어사재공이감히들어가지못 하고 사당(祠堂)문밖에 서서 기다리는데 차례가 끝난 후에늦게온죄(罪)를질책(叱責)하시며시자(侍者)에 게 명(命)하여 종아리채를 가져오라 하니 사재공이 대 님을풀고매맞을자세를취(取)했다.그제야무환당공 이노기(怒氣)를풀으셨다한다.두분의년기(年期)는1 년차(年差)이시고다같이작위(爵位)가정경(正卿,정 이품이상 참찬)이신데도매를치시려는형님이나,그를 감수하시려는아우님이나모두장(壯)하다않겠는가? 만력(萬曆)8년 (선조13년) 윤4월22일에 문중(門 中) 성문(成文)으로 작성한 가훈(家訓)에 의하면, 그 8항(項)에 【 자손이 공사 간 (公私間)에 유고(有 故)하다고 핑계하고 제사에 참여치 않는 자는 파사 (罷祀) 후에 불참(不參)한 죄를 절책(切責)하여 종 아리30도(度)를칠것】이라고명시되어있다. 우참찬 사재공 박소립은 종형 무환당공 박대립과 함께함양박씨로는가장화려한벼슬열력(閱歷)을가 진 분이다.두 분 다 정승천(政丞薦)에 올랐으나 정승 이되지못함은분하고원통할뿐이다.이는선대부터 조광조(趙光祖)의 신원회복 (伸寃回復)을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 (門下)에서 수학(受學)을 하므로써 자연히 동인(東 人)으로활동하게되었다.서인(西人)의영수율곡(栗 谷)이이(李珥)와영의정(領議政)박순(朴淳)에의해 당색(黨色)이달라정승이되지못했다사료된다. 구당공(世榮),소요당공(世茂),명헌공(世 죕 ) 3형 제의 자제들이 설립(立)자를 돌림자로 쓰고 있는데 사촌간 8형제가 모두 현달(賢達)하여 진사와 사마 시에 입격하고 앞 다투어 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니서울에사는立字를쓰는8명이라하여‘京 八立’이라 칭한다. 서울 월랑암촌에는 박판서(朴判 書)의집이있다고알려질정도였다.이는明軒公이 형제 중 가장먼저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참의(吏曹 參議)에 있으면서 조카들의 관계진출을 도와주지 않았나생각이든다. 사제공(소립)의글을쓰면서화려한열력을가지고 있고,동몽선습(童蒙先習)을저술한소요당공(逍遙堂 公휘世茂)의장남으로써당대의유력인사들과교류 하고 글을 나누었는데, 행장에 의한 묘갈명이 작성되 고묘갈이설립되었을터인데자료가없는것은아이러 니하다.다만,조선왕조실록과고문서,각종문집,연려 실기술 등 자료에서 공과 관련된 자료를 찾을 수 있음 은 다행이었다. 묘갈에 증시(贈諡)부분을 비워두고 설립되었다는 것은 후손들의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 나 사료된다. 성균관 대사성(현 성균관대학교 총장) 을 연이어 두 번 했다는 것은 공의 인품과 학식이 뛰 어났음을 짐작하게 하며 또한, 명종 승하 후 덕흥군 (德興君)의셋째아들선조(宣祖)를임금으로즉위시 키는데 공을 세워,대통을 잇게 한 것은 충분히 시호 를 받을만한 일인데 자료를 찾을 수 없음을 안타 갑께 생각한다. /함양박씨구소명명예기자박성호 청빈한삶이빛나는박소립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생애초반출생과가계 박소립선생묘소,경기도고양시덕양구오금동山121번지(구경기도양주신혈리)단촐하지만정갈한느낌을주며둥근봉분에는 배위평해손씨와단분(單墳)합장묘(合葬墓)로조성되어 있다.봉분(封墳)주위(周圍)에는돌로울타리를造成하였다.봉분앞에는장방형(長方形)대석(臺石)위에월두형(月頭形)비신(碑身) 을세운비좌원수형(碑座圓首形)의墓表가세워져있다. 소년기(少年期) 관료생활과거급제 정 치와생애(연보) 가전잡록 맺음말 주문가례를철저히지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