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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5월31일 금요일 12 (제209호) 기획 이정박열선생은성종조에청백리에녹선 된 바 있고 중종 임금은 ‘청백전가(淸白傳家)’의어서를내려청백함을만천 하에알렸다.성종20년부터 연산조를거쳐중중12년까지무려28년간주요관직을거치면서연산군의폭정과중종반정이후공신정권속에서파 당이즐비하고 모함의극치 를보이는아슬아슬한정권에서그어느쪽으로부터도모함과공격을받지않은것은선생께서매사에공평하였기 때문으로주위의모든사람들 과조화롭게살아온증좌가아닌가싶다. 연산조에서의대간을탄압하는것은언로를방해한다는것,흉작에나례(儺禮)의는부적절함으로폐지를촉구한일, 수차례에걸친사직상소에도 윤허하지않았던일,대신들의모함끝에도다만조심하고근신하여뇌물을받지않았다는추기(追記)는선생의삶을 보여주는대목이다. 그리고그의후손들은선조의이같은청렴함을본받아지역에서성실하고근면함으로보임으로서명문가로떠오르 고있어소개해본다. 이정공의 휘는 열(說)자는 열지(說之)이다.문과 에 급제하여 남양도호부사를 역임하고 의정부 우찬 성에추증된휘사동(思東)과어머니정경부인의창 박씨와의사이에서세조갑신년(1464)에태어났다. 신라 시조왕의 후예이고 관조는 경명왕의 적장자 밀성대군으로 고려에 이르러 휘 언부(彦孚)께서 문 종조(1046~1083)에서 개부이동삼사(종1품),문하시 중(종1품),판도의사(종1품),태사(정1품)를지내고 밀성부원군에봉해졌는데이분이중조이다. 밀성부원군 태사공께서 아들을 둘 두었는데 맏이 는효신(孝臣)차는의신(義臣)이다.고려인종은양 형제를 효의양신(孝義兩臣)이다. 고려주석(高麗柱 石)이라부르고동방대성(東方大姓)이란어필넉자 를 하사 했다.유지는 경북 청도군 풍각 화산에 있다 고하나확증이없다.태사공의둘째아들諱의신(義 臣)은당대의文章家로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내 셨다. 공부상서공(휘 의신)의 장자 사문진사공(휘 원) 과그의아들휘교연(四門博士)은사문진사·국자진 사를 지냈으니 학문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국자 진사는 대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학사(學士) 가 된다. 학사는 정5품의 시독, 시강학사(侍讀學士, 侍講學士)정4품의 학사(學士) 정3품의 학사승지 (學士承旨)가된다.이들은임금의국정자문에응하 게되므로모두존경하고우러러보게된다. 사문진사공의아들휘교연(皎然)은사문박사(四 門博士)를 역임하고, 그 아들 기보(奇輔)는 대관전 직(大觀殿直)으로 첨지정사에 추증되었다. 대대로 고려조에서그이름을떨쳤으며,6세에이르러휘화 (華)는 1252년에 출생 통헌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에 이르고 삼중대광 우정승판전리사에 추증되었다.충 효로서 세인의 칭예를 입었다. 인간(仁幹), 인지(仁 祉), 인기(仁杞), 인익(仁翊), 인우(仁宇) 등 5형제 를 둠으로서 가문이 크게 번성하는 계기를 마련했 다. 넷째 아들인 휘 인익(仁翊)은 고려조에 간의대부 (諫議大夫)로 고려가 망함에 따라 전북 김제로 낙향 조카인 정재공과 함께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슬하에 4형제[염(琰), 종(琮), 정(珽), 구(球)]을 두 었으니 넷째 휘 구(球)는 고려 원종 때 문과에 올라 이조좌랑으로 정순대부 판소부시사 밀직사사 소용 대장 좌우부도통을 지내니 호두금패(虎頭金牌)와 만호후(萬戶候)의 인(印)을 하사받았다. 장남 윤림 (允林)은 한성부 판윤을 역익하였으며, 그의 차남 의림(義林)은 신령 감무를 지내고 호조참판에 추증 되었으며, 그의 차남 유(維)는 목천현감으로 손자 이정공(휘 열)의 귀(貴)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어 병 조판서공파로세계를잇고있다. 아버지 「사동」은 예종 기축년(1469) 문과에 급제 하여 사옹원첨정(종4품), 사헌부집의(정3품), 남양 도호부사(종3품)을 역임하시었고, 의정부 우찬성 (종1품)에추증되었다. 모든분의추증은공이귀하 게된때문이다. 어머니 정경부인은 의창박씨 박천군사(정3품) 「전」의따님으로세조 갑신년(1464)에 공을 낳으니, 젊어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목적한데로 일이이루었다. 선생은 성종 계묘년(1483)의 생원시와 기유년(14 89)의 문과에 합격하고,승문원 부정자(종9품)에 제 수되었다가, 계속 승진하여 정자(정9품), 저작(정8 품),박사(정7품)를역임하시었다. 1495년(연산군1)에 사헌부감찰(정7품)에 임명되 었다가 홍문관에 선발되어 수찬(정6품)이 되었고, 이조좌랑(정6품)으로 전직되어 승문원교검을 겸임 하였다. 이로부터당상관(정3품)에오를때까지항 상승문원의직책을겸임하였다. 1497년(연산군3) 중시(重試)에 합격하였고, 10월 에 홍문관교리(정5품)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호 조정랑(정5품)으로옮기었다. ※중시(重試):10면마다당하관(종3품)이하의현 직관원들을위한시험으로여기에합격하면등수에 따라 1계급에서 4계급(장원한자)까지 승진시켜 주 었다. 1499년(연산군5)에사제감첨정(종4품)으로승진 하였다가, 봉정대부(정4품)로서 승문원 교감, 지제 교 겸 교서관 교리를 역임하고, 사헌부 장령으로 임 명되었다. 이해 11월 29일 선생은 대사헌 김심 등이 대간을 하옥시킨 일을 두고 “성준이 간휼하다고 대 간을 지척(指斥)하였는데, 예로부터 대신이 용사하 려고하는자는반드시먼저언관(言官)의입을재갈 물리고 혀를 묶어서 자기를 의논할 수 없게 한 후에 그 술법을 부리었으니, 이렇게 되면 후에 대간을 모 함하는폐단이장차적지않을것입니다.”하였다.이 는 언론의 탄압과 부당한 간섭을 하지 말라는 것으 로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다 시 홍문관으로 들어와 부응교(종4품)가 되었다가, 응교(정4품)에 올라 다시 (사헌부)장령, 군기시 부 정(종3품), 사옹원정(종3품), 봉상시정(종3품)으로 승진하고, 가자(加資;당상관인 正三品 通政大夫 以 上의品階에오르는것을말함)되었다. 1501년(연산군7) 10월 홍문관 직제학(정3품)에 임명되어 예문관 응교(정3품)를 겸임하였는데, 이 는장차주로대제학(大提學)이될사람을선발하여 임명하는 것이므로 곧 공(公)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선발이었다. 1502(연산군8, 39세) 팔월 홍문관부제학(정3품) 으로 승진하였고, 1503년 1월, 승정원 우부승지(정3 품), 7월 좌부승지로 전근되고, 12월에 도승지(정3 품)로 승진되어, 특별히 가선(대부)의 품계를 제수 받았다. 1504년(연산군10) 8월, 형조참판(종2품), 10월에 는호조참판으로옮기었다. 1505년(연산군11)4월에 공을 중국 연경(燕京=北 京)에 보내어 명나라 황제(孝宗)의 생일을 축하하 게 하였다. 공조참판, 동지중추부사 겸 동지춘추관 사,동지성균관사를역임하였다. 1506년(연산군12)1월 남해 진유근리사로 임명되 었다. ※鎭幽謹理使; 위리안치(圍籬安置) 즉 죄인을 배 소(配所)에서외부출입을못하도록귀양간곳의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 람을 가두었던 형벌로서, 이 당시 유배자를 상주 감 시토록하기위해가선대부(종2품)이상인자로파견 한 일이 있는데, 이때 유배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이시기에유배온사람은이인(李仁)과장순손(張 順孫)등이있다.) 1508년(중종3년;1508, 45세)에 이조참판(종2품) 겸 동지의금부사(종2품)에 임명되고 이듬해 6월 자 헌대부(정2품의 품계) 공조판서로 특별히 승진되 고, 11월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고, 12월에는 의 정부 우참찬(정2품)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 으로승진되었다. 1510년(중종5년) 1월 동지경연사(종2품) 겸 홍문 관제학(정2품),예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3월에는 예조참판 겸 지의금부사직으로 옮기었고, 7월에는 이조판서직으로옮기었다. 11월 조강시 근정전 뜰에서 경연관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주악1등을 하사하시었다. 공(公)등이 연회 에 참여하니 적삼녹비 한 벌씩을 하사하시었다. 이 어서 전교하기를 “이것이 비록 변변치 못한 물건이 나나의스승들이존경하고도(道)를중히여기는뜻 이니고맙게생각하지말라”하였다. 1511년(중종6년) 4월에 공(公)이 이조판서 직에 오래있었다 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 다.이때사신은“박열이이조를맡아보니,사람들이 ‘그 정사함이 공평하다’하였다. 같음 마을 사람들이 벼슬을 구하면 박열이 ‘어찌 마을 사람에게 사사로 이 할 것인가.’하고 동년(同年)이 벼슬 얻기를 청하 면박열이‘어찌동년에사사로이할것인가.’하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삿일을 간구(干求)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11월 다시 공(公)이 그 직에 오래있었다는 이유로 이조판서를 사직하니 체직(遞職:직책을 바 꿈)을명하시었고,12월에공조판서로옮기시었다. 1512년(중종7년) 4월에 이조에서 공(公)을 경상 도관찰사로 주의(注擬:임금에게 후보자 세 사람을 정하여올림)하였다.6월에형조판서로옮기었다.공 평함과너그러움을위주로하여형옥에억울하고원 통하게누명을쓰는처사가없었다. 공(公)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옛 부터 곡식을 바 치고 죄를 면제받으니, 부유한 백성은 살아날 수 있 으나 가난한 백성은 반드시 죽게 되어 치화(治化;어 진정치로백성을다스림)에손상이매우큽니다. 또 한 지금 죄를 면해주는 일을 형조에게 마련토록 하 였는데, 백성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죄의 경중은 분별치 않고 모두 죄를 면하고자, 곡식을 바치기를 원하여 소장을 제출하는 자들이 매우 많으니 일의 이치나 정황으로 보아 부당합니다.” 상께서 “그 도 관찰사로 하여금 적합한지 아닌지 상세히 고찰하여 아뢰도록하라”하였다. 1513(중종8년) 6월 다시 의정부 우참찬으로 임명 되고,8월에는다시대사헌에임명되었다. 11월상께서사정전에나아가경전을전공하는문 신들에게시강(施講)을하시었다.시강이끝나고,공 (公)이 나아가 아뢰기를 “임금께서 직언을 듣기 좋 아하면 위의 과실을 누가 숨기겠습니까? 전하가 즉 위하신이후직언듣기를좋아하시었는데,이즈음부 터는대간(사헌부/사간원)의말을잘받아들이지않 으십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처음은 누구나 노력하 지만끝까지계속하는사람은적다’하였는데그러한 것입니까? 근자에 재변이 자주 일어나는데, 전하께 서간하는말을 한결같이쫓으신다면,하늘에 응하 고재변을그치게하는길이이밖에없을것입니다.” 라고하였다.12월에동지경연사겸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1514(중종9년4) 2월 이조판서로 옮기고, 10월에 다시지의금부사를겸직하였다. 1515년(중종10년.52세)윤4월공(公)이병으로사 직하니,전교하기를 “여러 번 사직하므로 그대로 따 른다”하였다. 공(公)을 정헌대부(정2품上)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6월에 다시 예조판서로 옮기셨 다. 9월에지경연사와지춘추관사를겸하였다. 11월 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2월에 다시 의정부 좌참찬으로임명되었다. 1516년(중종11년)2월에 다시 대사헌으로 임명되 었다. 3월에 공(公)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이번 에 서울에서 지진이 있었고,충청,경상 양도와 여러 고을에도 또한 지진이 있었습니다. 전라도에서는 일곱 고을에우박이내렸고, 또한겨울이다 가도록 눈이오지않고,봄이되어서도비가내리지않아,논 밭과 들에는 먼지만 날리므로,백성들은 밭 갈고 씨 앗도 뿌리지 못하는 이변의 빈번함이 지금과 같은 때가없습니다. 전하께서는 경계(警戒;미리준비하고 살핌)하고 공구(恐懼;몹시 두려워함)하라는 가르침이 없으시 고, 보필하는 신하들은 우려하는 기색이 없으며, 좌 우에는 진언하는 자가 있지 않으니, 전하께서 깊이 위미(危微)와 선악(善惡)의 분별을 궁구하고 힘써 정대고명(正大高明)한바탕을조성하여,먼저다스 리는 근본을 세우시고, 여러 어진 사람과 바른 사람 을 등용할 길을 넓히어 다스리는 데 쓰이게 하시며, 내용과 외모가 다 갖추고 근본과 말단이 모두 잘되 게 하신다면, 전하께서 위로 하늘의 마음에 보답하 고 아래고 대중의 소망을 위로하는 길이, 이보다 더 할것이없습니다. 상께서전교하기를,“내가이상소를보건대그뜻 이 지당하다. 요사이 가뭄의 징조가 있는 데다 서울 과 지방에 또한 우박이 내리고 지진하는 천재가 생 겨재변이 매우많으니,어찌감히마음에 소홀히여 기겠는가?그러므로경연때매양말했던것이다. 상 소에 ‘전하께서 경계 공구하는 분부가 없다.’고 하였 는데,내가 어찌 경계하고 공구하지 않겠는가?지금 상소를보건대지당한말이다.” 4월에 숭정대부(종1품下;53세)에 승진하여 의정 부우찬성에임명되었다.공(公)이높은품계에오르 는 것을 들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6월에 홍문관 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9월에 공을 이조판 서로삼고임금께서공(公)을불러들여관리들의인 물을심사하여각기벼슬자리들을마련토록하라하 니, 공(公)이 이조를 세 차례나 맡는다는 것은 예전 에도그러한예가없었다는이유로사양하였으나윤 허하지않았다. 당시 사관이 말하기를 “공(公)은 사람됨이 자애 롭고 자세하여 그가 이조와 호조를 맡아서도 모두 그의관직(官職)이이(이조,호조판서)에맞게하였 으며,또한남이말할수없는바를능히말하였으니 어찌어진일이아니겠는가? 10월에 숭록대부(종1품上)에 올라 의정부좌찬성 을 제수 받았다. 공(公)이 오래도록 학식과 덕망을 쌓은훌륭한인품이라는데에대하여는달리말하는 자가없었다. 1517년(중종12;1517) 1월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 다. 2월에 공의 병세가 매우 위중함을 상께서 듣고 의원을 잇달아 보내어 병세를 물어보시고,검열 「유 희령」을 보내어 위문하였으나,하늘은 끝내 그를 이 세상에놓아두지않았으니,이해2월14일향년54세 로세상을떠나셨다. 부음(訃音)이알리자상께서몹시슬퍼하시고,특 별히 은졸지전(사후 관직을 추봉하거나 시호를 내 리는 일)으로 시호를 『이정(夷靖』이라 내리었다.이 는 평소 마음을 편안히 하고 고요함을 좋아했고, 몸 을공손히 하고,말이 적고편안함을즐긴 선생의삶 을 나타난 것으로 추정해보며, 선생의 유해는 길일 을얻어4월25일고양군원당면목희리해좌언덕에 장사지냈다. 공(公)은 명망과 훌륭한 덕행을 지니고서, 삼대 왕(성종,연산군,중종)의 신망을 받아 장차 포부를 펴볼수 있을것 같았는데,장수를누리지못하였으 니 애석한 일이다. 삼가 살피건데, 공(公)의 사람됨 은처신함에간솔하고민활하였다.젊어서부터재주 있다는 명성이 있었고, 두 차례나 과거에 급제하였 다. 서사(書史;경서와 사서)를 잘 기억하였으며, 구 전(舊典;옛날의문물과제도)에대한지식을널리갖 추어대각과경연에드나들었으며,성종실록편수에 참여하는등벼슬이높은품계에이르렀다. 마침폐조(연산군때)를거치되세상따라부침하 여 화를 면했으며, 몸이 청탁지간에 있으면서, 중국 명조의 연경에 사신으로 간 것이 한번이고, 형조판 서 한 번,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두 번,이조판서를 세 번,대사헌을 네 번,대제학을 한 번,참찬과 찬성 을 여섯번,한 번의판부사등을 역임하였지만 누구 도 이에의문을 갖는자가 없었으니,가히현명한 재 상이라고말할수있다. 또한공(公)은늘어려서부친상을당하여미쳐영 화를 뵈어드리지 못한 것을 평생 한을 삼고, 어머니 를 더욱더 마음과 성의를 다하여 섬기었으며, 형제 간에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였으며, 벗을 신의로 대 하였는가 하면,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여 스 스로 검속하여 어떤 일을 대한들 거슬림이 없었다. 이처럼안팎으로닦았으니사람들이한번보고그순 박하고착한군자인줄알게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안동권씨로 상장군「순」의 따님 으로 부덕(여자로서 갖추어야할 떳떳하고 올바른 도리)이 있었다. 중종 계사년(중종20년;1533) 3월 8 일 서거하므로 공(公)의 묘소 왼편에 장례하였다. 딸하나를두었는데진사「조성」에게출가하였다. 공(公)이아들이없어조카「세정」을후사로삼으 니, 평시서직장(종7품)을 지냈으며 좌승지를 증직 받았다. 좌승지 또한 아들이 없어 조카「옹」을 양아 들로 삼으니, 「옹」은 무진년(선조1년;1568) 문과에 급제하여부사(종3품)를역임하였으며,이조참판을 증직받았다. 선생의 비문은 조선전기 이조판서, 예조판서, 병 조판서등을역임하고문경(文景)의시호를받은송 계(松溪) 신용개(申用漑) 선생이 지었다. 송계선생 은 먼저 떠나는 친구 보내는 아쉬움을 함께 담았으 니소개해본다. 『마음을 다잡아 요약됨을 지키려 했고(操心要守 約)/덕을지니어앞선현인들에비견됐네(秉德擬前 賢)/ 자연스러운 나의 천성을 얻었으니(自然性分 得)/어찌외물에마음이이끌리리(寧爲外物遷)/이 른나이에학문에독실하였고(早歲篤於學)/선을얻 는 데에 항상 마음 썼지(得善常拳拳)/ 재주를 드날 려 거듭 계수 가지를 꺾어(馳英再折桂)/ 달리는 준 마에채찍을더하듯했으니(逸驥加策鞭)/그의명성 은조정에가득하였고(聲譽滿朝著)/문장은빛나는 청동전같았었지(華藻耀靑錢)/다스림을도와경상 의 직임 맡아서는(佐理歷卿相)/ 덕화를 널리 펴는 일 다시 온전히 하였네(弘化事更全)/ 어찌하여 두 녀석의침범이(如何二侵)/이순에미치지못한나이 였던가(不及耳順年)/ 까마득히 죽음에 이르렀으니 (冥然乘大化)/그모습중천에막혀볼수없네(眉宇 隔重泉)/사람들은의지할곳잃은듯하고(衆心如失 倚)/친구의마음이야더욱애가타네(朋舊意益煎)/ 생각건대나와는일찍마음이통해(念予心夙契)/걸 음걸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步武相後先)/ 청춘 의나이흰머리가되어서도(靑年到白首)/뜻이항상 굳건함 오래도록 공경했네(久敬志常堅)/ 그대 지금 나보다앞서떠나가니(公今先我逝)/강물을매단듯 눈물이하염없네(有淚長河懸)/저승과이승사이뜻 이 통한다면(幽明意可通)/ 나의 이 만사를 그대는 들으시게(聽我露篇)』 선생의훈로(勳勞;나라와군주를위해세운공로) 와 이룬 업적은 국사(國史)와 실록(實錄)에 소상하 게실려있으니무려320여건이다. 중종실록27권,1517년(중종12)2월15일2번째기 사 ‘우찬성 박열의 졸기’에 공(公)의 사람됨이 성격 이 간솔(단순하고 솔직) 민활하고 문장(文章)에 재 간이 있어 두 차례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청탁(淸 濁)간에 처신을 살펴 하여 세 차례나 전조(銓曹)를 맡고누차헌부(憲府)의장이되었지만다른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니,현명한 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라 고 전해진다. 중종반정 때 연산조의 도승지를 역임 하였음에도 화를 입지 않고 중용되는 관리로 남았 다. 성종조에 청백리에 녹선된 바 있고 중종 임금은 ‘청백전가(淸白傳家)’의어서를내려청백함을만천 하에 알렸고, 후손들은 현재 18대 종손 박철진 현종 에 이르기까지 530여 성상이 흐르는 동안 선대의 청 빈함을계승하고있어더욱빛이난다. 전북 완주군 비봉면 수선리 평지마을은 500여 년 의오랜세거지이다.지명‘서당터’가있으니이는공 명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탐구와 후학양성을 하였음 을 알 수 있다. 공(公)의본손과지손이번성(蕃盛)하여문무의높 은벼슬을거친분들이많았으며,벼슬과명성이끊이 지않고지금에이르렀으니,이에뒷날그자손들이받 는경사의이어짐이끝이없기를기대해본다. / 글·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청백리 이정 박 열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이정공의 선원세계 지난해3월전북완주군비봉면수선리평지마을입구에운봉공·이정공입향세거비를세우고유희태완주군수를비롯한지역기관장 과유림,그리고후손들이제막식에함께하고있다. 선생의생애 중종임금이내린‘청백전가’4자를서예가이자고산향교전 교인 야정 박석재 현종이 직접 써 종중의 원로인 박전근 전 회장에게선물하고있다. 맺음말 500여년세거지인평지마을에세거지비를새우고선생의청백한삶을길이길이전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