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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0월31일 월요일 12 (제190호) 기획 청강공박돈병진사는높은도덕성과토반으로서의책임을다하는등많은후학을길렀으며청류정을중심으 로아름다운시문(詩文)과평소의 삶을 경계하는 계(戒)·잠(箴)을 통해 자녀들은 물론 지역민을 순화하는데 기여했다.그리고 청강유고는 고성 청광리 박진사 고가에 전해지는 고문서 3천 여 점과 증조부 박효근 관련 고문서 18점(경남 문화재자료 350호)등을 국역으로 하여 지난 해 8월 밀성박씨충헌공파나동맹중계 와경송계후원으로종손박상호현종이발간하였다.특히청강유고에는박돈병진사가사람으로서살아가면 서경계해야할계(戒)가다수있 는데이중음주와색에관한글이있어이를중심으로소개해본다. 박돈병 진사의 본관은 밀성으로 밀성대군이후 12중조의 한분인 충헌공(휘 척)의 후예이다. 충 헌공은 고려 충선왕조의 내부시승(內部侍丞)으 로 순충동덕찬화공신 삼중대광(純忠同德贊化功 臣 三重大匡)에 밀성군(密城君)으로 봉(封)해졌 으며, 추은(推恩)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 夫)의 은총이 더하여지고 시호(諡號)는 충헌(忠 憲)이다. 4세(世)전하여윤문(允文)은밀주의풍각화산 (현 청도군 풍각면 화산) 본가에서 출생하여 충 숙왕 원년(1314년)에 급제하여 삼중대광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고 밀성군(密城 君)에 봉해졌다. 충목왕 원년(1345년) 문사(文 士)38명을 선발하여 날짜를 바꾸어가며 시독(侍 讀) 할 때 공(公)은 기거랑(起居郞, 中書門下省 에 속한 관직의 하나. 임금의 일상생활과 주변에 서 일어나는 일 등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 보는 종 5품의 관료)으로서 주참(注 핫)하여 저술(著述) 하였고, 특히 문장이 뛰어나 저술(著述)한 문적 (文籍)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렸고, 포은 정몽 주,목은이색과더불어도의(道義)로사귀었다. 대 제 학 공 휘 윤 문 은 슬 하 에 아들 6명을 두니 세칭 육남대가라 불러지게 되는데 이중 둘째인 대 양(大陽)은 과거 에 올 라 진 현 관 대 제 학 ( 進 賢 館 大提學)으로 삼 중대광전법판서 ( 三 重 大 匡 典 法 判書)로 익조공 신(翊祚功臣)의밀천군(密川君)으로 봉작(封爵) 되었는데 비조(鼻祖)이다. 이분의 10세손으로 생 원 진사 양시에 오른 휘 덕손(德孫)의 호는 완천 당(浣川堂)으로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성균관 에서 수학하던 중 기묘사화의 화를 해해 지금의 고성군 구만면 주평리에 은거하다 함안으로 우거 를 옮겨 명현 석학들과 교유하며 탁영 김일손, 보 덕 안중손과 더불어 영남삼손(嶺南三孫)이라 세 인들은 칭송하였다. 숙종조에 완천당공의 7세손 휘 근(瑾)은 개천면 나동으로 세거지를 옮겨 충 효의 가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증손 효근(孝根) 과 그의 아들 영회(瑛會) 부자에게 효자 정려가 내려져 동몽교관에 제수되고, 효자 근의 장자 한 회(翰會)와 증손 돈병(敦秉)이 진사에 오르는 등 지역의명문가로그명성또한자자하다. 자(字)는 덕응(德應),호는 청강(晴崗)이다.은 안공(隱安公) 휘 승팔(承八)의 아들이자 진사 휘 한회(瀚會)의 손자이다.철종 말년 계해(癸亥,18 63년)에 출생하였는데 지혜로움과 깨달음이 범 상치 아니했다.5세에 모친상을 당함에 능히 슬피 부르짖는 절도(節度)를 알았고, 9세에 부친상을 당했을 적에 곡하고 제전(祭奠)을 드림에 집례하 기를성인과같이했다.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섬김에 혼전신성(昏定晨 省, 날이저물면 잠자리를 정해드리고, 새벽이 되 면 안부를 묻는 일)과 동온하정(冬溫夏 휠, 겨 울 이 되면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는 일)을 한결 아비 섬기는 도리와 같이 하 고,계모를섬김에친모와다름없이하였다. 23세가 되는 을유(乙酉, 1885년)에 성균진사시 에 합격했다. 당시 고종임금이 건청궁(乾淸宮)에 나아가 박돈병 신사를 비롯한 새로 급제한 생원 과 진사의 사은(謝恩)을 친히 받은 기록이 조선 왕조실록에전해지고있어소개해본다. 【고종 22년 을유(1885) 8월 21일(정해) 맑음, 신시(申時) - 상이 건청궁(乾淸宮)에 나아가 새 로 급제한 생원과 진사의 사은(謝恩)을 친히 받 았다. 입시할 때, 행 도승지 오준영, 행 좌승지 김 영목, 우승지 박주양, 좌부승지 신병우, 우부승지 정원화,동부승지 남규희,가주서 박종간븡김석룡, 별겸춘추 김희수(金喜洙)븡이정직(李貞稙)이 차 례로 나아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오준영이 아뢰기 를, “솔방인(率榜人)으로 하여금 함께 예를 행하 도록 할까요?”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찬의가 ‘사배’를 창(唱)하니 생원과 진사 등이 사 배례를 행하였다.오준영이 아뢰기를,“생원과 진 사들에게 선온(宣 좍)하도록 할까요?”하니,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오준영이 명을 받들어 선 온하였다. 오준영이 아뢰기를 “선온을 마쳤습니 다. 생원과 진사들에게 차례로 전(殿)에 올라와 직책과 성명을 아뢰게 할까요?” 하니, 상이 그렇 게 하라고 하였다. 생원 장복규(張復圭), 강준형 (姜浚馨), 이현희(李賢熙), 김하진(金河鎭), 김 제익(金濟翊), 이명익(李明翼),..... 박돈병(朴敦 秉), 윤전(尹鈿), 조하규(趙夏珪)..... 신양균(申養 均)이 직책과 성명을 아뢰고 물러나 계단 아래에 섰다.이어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생원과 진 사 가운데 나이 85세 이상인 사람과 72세인 사람 을 모두 특별히 오위장으로 삼아 가설(加設)에 단부하라.”하였다.....】 완천당(고성 입향조)공의 묘소가 함안에 있었 는데 세대가 멀어져 묘소를 실전하게 되었다. 인 근의 종족들에게 묻고 꾀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비석을 세워서 해마다 한번 제사를 올렸다. 이 또 한의리를말미암아일으킨일이다. 이미 청광리에 거주하고는 그 시내물이 나동 (羅洞)으로부터 흘러나왔으면서 맑고 운치가 있 음을 사랑했다. 그리하여 날마다 소요하고 시를 읊조리는것으로취미를삼았다. 그 아 들이 그 뜻 을 따라 정자 를 지어 서 토 구( 후 세에 퇴직 뒤나노후의 은거처로일컬어짐)에 이바 지 하니 공이 비로소 호를 청강(晴崗)이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편액하기를 청류정(廳流亭)이라고 하 니 소눌 노 상직 공 이 거기 에 기 문을 지 었다 . 평소에 의관과 띠를 갖추고 행동은 가지런하고 삼갔다.언어는맑은소리를울렸으며,내외를두루 보되 일찍 게으른 낯빛을 지음이 없었다. 신묘(辛 卯,1951년)에 정침에서 고종(考終)하니 진주시 이 반성면대천리후산곤좌언덕에안장하였다. 슬하에 아들 3남 1녀를 두었는데 용하(容夏)·용 만(容萬)·용보(容甫)인데 장자 용하(容夏)는 민족 학숙 인 보성 전문 3회 법학 부 5회, 상 업부 를 졸 업한 지식인이었으나일제 치하에서관직생활을 싫어하 여 졸업 후 고 향으 로 돌아 와 추사 김 정희 의 제자 였 던 성파 하 동주 와 추사 체 연구 로 교 유했 다. 차남 용만(容萬)은 면장이고, 셋째 용보(容甫) 는 ㈜유성 등 기업인으로 크게 성공하였으며, 청 도의 화산재에 대재학공 단비를 세웠다. 오릉보 존회 총본부 이사장,밀성박씨대종회장을 역임하 였으며, 밀성재 건립당시 거액을 출연하였으며, 고향발전에도 크게 기여하는 등 종중사에 큰 족 적을남겼다. 청강공의계(戒) 청강공은많은시문(詩文)을남겼다.이중오상 (五常)을 개우쳐 주는 시(詩) 삼재음(三才吟)과 춘첩시(春帖詩)로 이어지는 선생의 가르침은 글 귀 하나하나에 많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고 있다. 그리고이를자녀들이경계하도록하였다. ▲三才吟(삼재음) 靑天頭上高(청천두상고) 푸른 하늘은 머리 위 에 높고/ 大地眼前厚(대지안전후) 대지는 눈앞 에 두텁다. 萬物中惟人(만물중유인)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貴平五敎有(귀평오교유)오륜이 있 음에귀히되었다. ▲春帖詩(춘첩시) 父母千年壽(부모천년수) 부모는 천년의 수를 하시고/ 兒孫萬歲榮(아손만세영) 자손은 만세의 영화가있으리라./隆壽榮煇屋(융수영휘옥)장수 하고 영화가 빛나는 집안에/ 多男五福竝(다남오 복병)남자가많이나면서오복이함께하리라. 父母兀兀壽(부모올올수) 부모는 높고 높은 수 를 하시고/ 兒孫世世榮(아손세세영) 자손은 세 세로영화가있으리라./父慈子孝順(부자자효순) 아비는사랑하고자식은효도하고순종하면/ 家道自然亨(家道自然亨) 가문의 길이 자연히 형통하리라. 위의시2수는선고(先考)은안재(隱安齋)부군 께서 일찍이 입으로 불러서 불초에게 가르쳐 주 신 것 이 다 . 그 때 는 부 초 가 어 려 서 그 뜻 을 알 지 못 하고, 한갓 글자와 음을 외워서 익힐 따름이었다. 불초가 살펴서 섬길 수가 있게 되자. 부군께서 이 미 세상을 떠나셨다. 비록 다시 슬하에서 모시고 가르침을 받들고자하나 어찌 가능하겠는가? 매 양 이 시를 외움에 줄줄 흐르는 눈물을 자각하지 못했다. 인하여 거실의 오른쪽에 걸어서 일생동 안 매우 사무치는 나의 마음을 부치고자한다. 불 초 고아 돈병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기록함. [원문 石詩二首 先孝隱安齋府君 所嘗口號而詔不 肖者也 時則不肖幼稚不知 其旨而 徒誦習字音而 己 及省事府君己下世矣 雖欲復侍膝下奉承敎誨 豈 可得平 每誦此詩 自不覺泫然涕下也 仍揭居室之石 用寓一生痛慕之私云爾 不肖孤敦秉泣血謹識] 내가 보니, 명문가와 귀족들이 선조의 충효와 근검으로 말미암아 성립하지 않음이 없었고, 자 손의 완악하고 경솔하고 사치하고 오만함으로 말 미암아 전복되고 추락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립 하기가 어려움은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고, 전복 되고 추락되기 쉬움은 털을 사르는 것과 같다. 이 말을 함에 마음이 아리(痛)니, 너희들은 마땅히 뼈에 새겨야 할 것이다. 오른 쪽은 유변이 자제들 을 경계시킨 말인데, 기록하여 경계를 삼게 한다. [원문] 余見名門右族이 莫不由祖先忠孝動儉하 야 以成立之하고 莫不由子孫頑率奢傲하야 以覆 墜之하나니 成立之難如什天하고 覆墜之易如燎 毛라言之痛心하니 爾宜刻骨이니라 石柳玭誡子 弟書而述爲誡也 너에게 술 즐기지 말 것을 경계하노니 미치게 하는 약이요, 아름다운 맛이 아니다. 삼가고 돈후 한 성품을 변이(變移)시켜 흉험(凶險)한 무리로 변하게 하리라. 고금에 (술로 인하여) 실패하고 망한자들을낱낱이모두기억할수있다. 이 셋 구절은 소학의 격언의 훈계와 분명한 담 론이니, 이를 베껴서 경계를 삼는다. 송나라 재상 인노공범질이조카를경계한글이다. [원문 戒爾勿嗜酒 狂藥非味 能移謹厚性 化爲 凶險類 古今傾敗者 歷歷皆可記 此三可小學格訓 明談騰此以誡也宰相范魯公質誡徠子也] 경계하여색(色)을좋아하지말라.나라도패망 하게하니라. 탐욕은 수치심도 잃어버리게 하고, 정기(精氣) 를허비함은목숨을재촉하여짧게하니라. 욕심을 제어하고 덕으로 몸을 윤택하게 하라. 정기를길러가면장수하고복이온다. 이 셋 구절은 내가 스스로 필연의 이치를 추구 한 것을 기록함으로써 경계를 삼고자 한 것이다. [원문] 戒以勿好色 能傾家國 貪慾忘羞恥 費精命 促薄 制慾德潤身 養精壽又福 此三可 五自推必然 之理而述以爲戒也 너희에게 경계케 하노니 도박을 말아라. 유희 는 마침내 투전꾼이 되니라. 따도 잃어도 사람을 망치게 하니, 기쁨의 의혹이 패망이니라. 저것을 피하기를 도적을 피하듯이 하라. 마음이 안정되 어야 의지와 사업이 온전하게 되리라. 이 셋 구절 은 내가 스스로 필연의 이치를 추구한 것을 기록 함으로써경계를삼고자한것이다. [원문] 戒爾勿賭博 遊戱竟偸錢 得失令人誤 歡 惑敗亡然 避彼如避賊 心安志業全 此三句 吾自推 必然之理而述以爲誡也 젊어서 뜻을 세우지 아니하면 늙어서 뉘우치게 되고,풍부할 적에 절제하고 검약하지 아니하면 가 난한때에뉘우치게되고,술을경계하고삼가지아 니하 면 병든 때에 뉘우 치고 , 색(色)을 삼 가 피 하지 아니하면 실패했을 적에 뉘우치고, 사치를 스스로 금하지 아니하면 군색할 적에 뉘우치고,일찍 예를 배우 지 아 니하 면 늦은 때 에 뉘우 친다 . 공 경히 집 안 사람을 거느리면 집안이 화락하고, 어버이에게 효 도하고자식을사랑하면평생즐겁다. 내가 노안(老眼)으로 이것을 써서 경계를 삼으 니, 너희들은 마땅히 벽에 붙여서 항상 보고 명심 함이옳을것이다. [원문] 少不立志老時悔 富不節儉貧時悔 酒不 誡愼病時悔 色不謹避敗時悔 奢不自禁窘時悔 早 不學禮晩時悔 敬率室人家和樂 孝親愛子平生樂 我以老眼書此以爲誡汝當付壁上常目銘心可也 술에대한경계의잠(箴) 사람이 술에 대해선, 즐겨하여 욕심에 방종케 되어선 아니 된다.마시되 취하기 전에 그치면,기 운이 화협하여 좋은 약이 되고, 취함이 심하여 미 치고 망령된 짓을 함에 이르면, 본성을 잃고 자신 을해치게된다. 본성 을 잃 게 할 뿐 만 아니 라, 가정 을 망치 고 단 명 을 재촉 한다 . 두 렵지 아 니하 며 또 한 크게 깨닫 지 아 니할까! 이 때문에 선대의 성인(聖人)께서, 어지러 움에미치도록마시지아니했다고경계하셨다. 음주를 끊고 음주를 절제함이, 내가 헤아려 선 택함에 있다. 진실로 그러함을 알았다면, 감히 마 음에새기지아니할까! 이 잠(箴)은 할아버지 국포 공께서 일찍이 경계 하신바이다.나는나이가팔십이넘도록감히훈계 를 어기지 아니했는데,너희들은 혹 방자하게 마심 이 있 기 때 문에 힘들 여 이를 써서 문의 벽에 걸 어두 니 , 명심 하여 스 스로 경 계함 이 옳을 것 이다 . [원문] 酒戒箴 -人之於酒에 嗜勿從慾이라 飮 止未跡이면 氣和良藥이요 醉劇狂妄이면 性失自 賊이라 不앳性失이요 家敗命促이라 可不懼哉며 亦不大覺가 是以先聖이 戒不亂及이삿다 斷飮節 飮이 在我量擇하니 固知其然에 敢不心刻가 是箴 王老菊圃公 會所戒 我年愈入旬敢不違訓 而悶今 汝曹有或浪飮强作書此揭千門壁銘心自戒可也 사람의욕심을없애는명(銘) 사 람 욕 심 에 가 장 큰 것 은 오 직 여 색 과 음 식 이 니, 음식은 몸을 죽게도 만들고, 여색은 나라를 기 울게도한다.형의팔을비틀고아들을전쟁에끌어 넣어야 음식과 여색을 얻을 수 있다면 팔을 비틀고 끌 어다 넣 은 것이 또 한 큰 의 혹된 점 이 아닌 가? 반드 시 도 (道)를 꾀하 고 반 드시 덕(德)을 좋 아할 진대음식을꾀하지말고,호색을꾀하지말라.음식 과 남 녀는 사 람의 큰 욕 심이 거 기에 있 다. 욕 심에 흘 러 가지 아 니해 야 이내 성 현이 될 수가 있 다. 내가 옛 성현을 생각하여 이치(理致)로 욕심을 제어하고 항상 경계하길 두려운 마음으로 하여 오직 ‘그 홀로 아는 처지’에 삼가라 어진 이를 어 질게 여기되 여색으로 바꾸어 보는 호선의 마음 이 부족하다면 어느 겨를에 여색을 탐하여 뜻을 방자히함으로서눈을기쁘게할것인가! 먹는데 배부를 것을 구하지 말고 학문에 뜻 두 기를 돈독히 한다면 어느 겨를에 먹는데 배 채움 을지극히하려할까! 만약에 혹시 그렇게 아니한다면 그 천진(天眞) 을 잃게 되는 것이다. 탐내고 음탕함의 고혹에 빠 지면 격언에 부끄러움이 있게 된다. 호색을 원하 면 덕에 좋아함을 볼 수가 없고,나쁜(고급스럽지 못함) 음식을 부끄러워하면 도(道)를 충분히 알 수가없다. 아! 음식과 여색을 이제부터 경계할지니라. 경 계하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강(剛)함으로써 다스 려가야하니라. 날마다성찰銘 사는 곳은 따뜻하게 거처할 것은 기약함이 옳 다. 비록 비용이 크게 들더라도 이러한 일은 방을 따뜻하게 거처할 것으로 기필한 연후에야 마땅하 다. 비록 보약과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방이 따 뜻하지 않으면, 감기가 들기 쉽고 체기(滯氣)가 들기 십상이다. 따뜻하게 거처하는데 적당히 따 뜻하다면참으로좋다. 배우 고 돌 아오 는 길 에 묵 묵하 게 기 억하 여 알 아 라.쉬는 날에 혹 벗들을 방문하여 매번 난해(難解) 한 것 들을 질 문하 고 살짝 이라 도 희 롱하 는 말을 하 지 마 라. 혹 유람 을 할 때라 도 묵묵 히 학업 임을 알 고,동작주선을반드시삼가며그홀로를삼가라 붕우와 사귀면서 희롱하는 말을 하지 마라 매 번반드시순수함과진실함과신의로써하라. 기이하고 사랑스런 물건을 몰래 마음에 두지마 라 . 그 보 다 먼 저 자 잘 한 이 야 기 책 춘 랑 전 은 서 안 (書案)에가까이하지마라. 독삼탕을 혹 마실 때면 처음에 다린 뒤에 뿌리를 생청(生淸)에 섞어서 먼저 씹어 넘기고 또 마실 것 이니인삼물은적당히따뜻해야한다.인삼물을뜨 겁게마시지마라.따뜻하게해서마셔야한다. 독침당 약(藥)에는 옛날에 격언이 있었으니 색 계에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 하다. 또한 격언이 있으니 설혹 가까운 벗들을 만 나 정담을 나눌 때에 반드시 그 정의 성그러움과 친구의 장단점을 말하지 마라 작심하고 작심해야 한다.간혹애일잠과주자의계제자훈을외워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다. 몸과 마 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 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한다. 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 주변에는 술과 여자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이다.모 광역단체장이 여비서와 의 부적절한 관계, 또는 여비서에 대한 성희롱 사 건, 동료교사가 교실에서 부적절한 행위 등은 최 근 몇 년 사이 벌어진 사건으로 이로 인해 불명예 스럽게 퇴진하고 자살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그 리고 유명인들이 음주운전 등 사고로 언론지상에 자주 등장한다. 이들이 박돈병 진사의 계(戒)와 잠 (箴)을한번이라도읽어보았다면어떠했을까?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제하지 못한 경우가 있 다 이러할 때 마음속 깊이 경계하는 훈(訓)을 되 새긴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아름답고 서로를 신 뢰할 수 있는 사회가 될 듯싶다.박돈병 진사의 훈 계 문 은 몇 편 더 있 으 나 지 면 상 다 소 개 하 지 못 하 고다음호에소개해보고자한다. 진사박돈병선생의청강유고 선조 유지를찾아븣 박돈병 진사의 선원(璿源) 고성청광리박진사고가전경(①안채②장독대③잔고방④곡간채(현소운예다원) ⑤사랑채⑥중사랑채⑦마구간⑧사랑채정원 ⑨대문간채(정려) ⑩차종손주택⑪박돈병진사차자용 만(容萬家) 박돈병진사의생애 박돈병진사존영. 청 류정,박진사께서시인묵객들과함께교유하며많은시문을남긴곳이다.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