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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2월28일 월요일 12 (제182호) 기획 14세기후반동북아세아의국제정세는커다란지각변동을겪으며세력판도에큰변화가진행되었다.대몽고 제국을건설한징기스칸의후예,쿠빌라이가중원에세웠던원(元)나라가쇠망하고,한 족(漢族)의명(明)나라가새로일어나패권을차지하면서고려(高麗)의운명도흔들리기시작하였다. 왕건(王建)이개국한고려는원나라의침입으로부마국으로전락되면서자주국가로서의위상을상실하여내 부적으로는부패와갈등으로혼란스러웠고,대외적으로는원븡명교체기의세력충돌 속에국가적좌표가불안정한형세에놓이게되었다.결국,고려를지키려는구세력과개혁을주창하는신진 세력이대립하다가,위화도회군을계기로구세력의중심인물인최영장군과정몽주가 제거되고이성계를정점으로한신진사대부집단에의해정권이장악되었다.고려의마지막왕공양왕을밀어 내고등극한이성계는1392년여름새로운국가,조선(朝鮮)의개창을선포하였다.개 국초기의신도읍지인한성건설에등장한불세출의건축가박자청(朴子靑)에관해살펴본다. 글을마치며 새로운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는 고려 수도 개 경(開京)을 떠나 새 도읍지로 한양 땅을 정하고 민심을쇄신하고자천도(遷都)를단행한다. 왕도(王都) 건설의 시작은 도성의 구역 획정과 궁궐 및 관청의 규모와 위치 선정 그리고 민가의 조성 등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구체화 되었고, 경복궁 건축을 필두로 4대문과 성곽의 축조가 동 시다발적으로진행되었다. 수도의 이름을 한성(漢城)으로 정하고 수도행 정의 책임자인 판한성부사에 성석린이 임명되었 으며, 전국 8도의 백성들을 건설 현장의 인부로 동원하여 도시의 모습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 하였다. 왕자의 난으로 인해 개경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태종에 의해 환도(還都)하는 우여곡절이 있었으 나, 본격적인 건설 작업으로 궁궐븡문묘븡행랑븡성 곽등도성의기본시설이완성되었다. 새 도읍, 한성의 건설은 정도전(鄭道傳)이 설계 하고박자청이실행했다고후세사람들이말한다. 곳곳의 건설현장에서 공역(工役)의 망치 두드리 는소리와짐나르는어영차소리는동에번쩍,서에 번쩍나타나는박자청의동독(董督:감독하고격려) 하는활약에따라도성하늘에울려퍼졌다. 본래 박자청은 군인 신분이었으나 임금(태조) 의 발탁으로 건축물의 관리와 수선을 담당하는 선공감(繕工監)으로 직책을 옮기면서 건축 실무 를맡기시작하였다. 그는 이성계의 고향 후배인 황희석(黃希碩)장 군의 수행 군관이었는데 궁궐 입직 당번군사로 근무할 때, 왕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 이화(李 和)가 무단출입하려 하자 이를 제지하였다. 임금 의 아우인 자기를 가로막는 행동에 화가 난 이화 가그를구타하였으나막무가내막아섰다. 뒤 에 이 사 실 을 알 게 된 태 조 이 성 계 가 그 의 충 직함을 가상히 여겨 호군으로 승진시키고 어전 밖을 지키는 내상직에 임명하였다. 몸을 사리지 않고 경호를 하는 근면븡성실함이 마음에 든 태조 가 은대(銀帶)를 상으로 내렸으며, 선공소감으로 임명하고개국원종공신에봉하였다. 그의 관직 승진을 요약하면, 황희석 장군의 수 행 군관에서 시작하여 중랑장(中郞將)에서 호군 (護軍)으로 승진하고 선공소감(繕工少監)으로 전역하였다가 다시 호익사 대장군이 되고, 이어 서 공조와 예조의 전서를 오른 다음 중군총제를 거쳐판공안부사에이른다. 이후 공조판서를 시작으로 장관급의 관직을 군 부와 행정부를 오가며 조정에서 부여하는 임무에 따라 삼군부의 진무나 지의흥부사를 맡았다가 지 의정부사 또는 판선공감사 등을 맡고, 가장 높은 벼슬로는 판한성부사라는 재상직에 오른 다음 명 예직인판우군도총제를끝으로은퇴하게된다. 이와 같이 화려한 직책과 고속 승진의 영광의 뒤안길에는 백성의 노역이 과중하다느니,불요불 급한 공사를 마구 벌린다느니 하며 갖가지 구실 을 붙여 그를 항상 질시하고 견제하는 불만 세력 이 따르고,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일시적이 나마두차례파직을당하기도하였다. 하여튼 그는 태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좌고우면 하지 않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몸을 던져 일했다. 임금(태종)이 그를 위해 변명해 준 이 한 마디 가그것을웅변한다. “박자청이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다만 부지런 하고 곧기만 하다,종묘븡사직을 짓고 수리하는 일 은 모두 내가 명하여 역사(役事)를 동독(董督)한 것 이 다 . 어 찌 한 몸 의 계 책 을 위 하 여 이 일 을 하 였 겠 느 나 ? ~ ~ 중 략 ~ ~ 내 가 비 록 박 자 청 을 파 직 시 키더라도 대신 하는 자가 바라보기만 하고 한 사 람의 백성도 역사시키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느냐 경 등 은 다 시 말 하 지 말 라 .” 그는 창덕궁 감역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았으 며, 경회루븡문묘븡행랑븡건원릉 등 조선을 대표하 는건축물을영건하였다. ①창덕궁(昌德宮) 원래 창덕궁은 이궁(離宮)으로 지어졌다. 1차 왕자의 난으로 피에 얼룩진 경복궁이 꺼림칙했던 태종 이방원은 새로 궁궐을 지어 살고 싶었을 것 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향교동 이궁이라 불렸는 데 궁궐의 체모를 거의 갖춘 다음 창덕궁이라고 궁이름을새로지었다.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正宮) 역할을 한 창덕궁이 도성 가운데에 지어져탄생한것이다. “새로 지은 궁궐이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 고,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았다.”(新作宮室 儉 而不陋華而不侈) 건축 미학의 절정을 이룬 창덕궁에 대해 그 형 용(形容)을아주걸맞게잘나타낸표현이다. 창 덕 궁 내 의 모 든 건 물 과 시 설 은 태 종 재 위 기 간 내내 영조營造된 것이다. 대신들과 정사를 논 의하던 인정전(仁政殿), 임금의 사적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사신 접대와 대신들과의 연회 등에 활용하였고 태조가 승하한 광연루(廣延樓),태종 의 생모인 신의왕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 은 인소전(仁昭殿) 등이 주요 건조물이었으며, 이에 따르는 왕의 편전(便殿)인 희정당과 선정전 등 부 속 건 물 과 궐 내 각 사 (各 司 ) 등 각 종 시 설 이 계속지어졌다. 오늘날 UN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 궁에서는 특히, 인정전 내부의 늘어진 커튼과 전 등의 설치를 보면서 오백년 조선 역사가 태종의 거룩한 창업에서 고종의 참담한 몰락으로 급전직 하하는 유산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는 인상을 지 울 수가 없다.또한 단청을 하지 않은 검소한 낙선 재(樂善齋)에서 대한제국의 잔영(殘影)이 좁은 마당에 드리워져 가을바람에 굴러가고 있음을 느 끼게한다. ②경회루(慶會樓) 경복궁 안 근정전 서북 편에 세워진 경회루는 박 자청이빚어낸건조물중가장뛰어난작품이다. 그는 단순히 공사의 감역을 잘 하는 능력 있는 관리로서만이 아니라, 건축적 심미안이 빼어난 인물로평가해서무리가없을것이다. 원래 태조 때부터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기둥 이 기울어져 이를 수리하였으나, 연못의 물고기 들이 죽자 태종은 박자청에게 하명하여 규모를 키우고연못을늘려새로짓도록하였다. 48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굉장(宏壯)한 누각을 올렸으며 연못은 물이 새지 않도록 바닥 을 검은 진흙으로 빈틈없이 메워 안정감과 화려 함이함께어우러진환상적경관을이루었다. 사신을 접대하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연 회장소로 사용하였던 경회루는 임진왜란의 와중 에 누각이 소실되어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재건축되었다. ③문묘(文廟) 문묘는 1410년(태종10)에 성산군 이직李稷과 동지총제박자청이감역을맡아완공을보았다. 조선왕조는 유교사상을 국가이념으로 표방하 였으며, 공자(孔子)를 숭상하는 일은 국가적 일 이었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과 우 리나라 명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문묘가 제례행사를 위해 건축되면서 유학 교육기관으로 성균관을 병설하여, 제향과 교육의 두 가지 목적을 하나의 구역 내에서 실시 할수있도록배치해놓았다. 문묘에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 밴) 서무(西 밴) 등 부속 건물이 있고, 성균관에는 강당인 명 륜당(明倫堂)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 서재(西齋) 그리고 존경각(尊經閣)과 양현고(養 賢庫)등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보물 제141호로지정되어있다. ④ 행 랑 (行 廊 ) 조선 초기 1412년(태종12)부터 14년간에 걸쳐 혜정교에서 창덕궁 동구, 창덕궁에서 종묘, 종묘 에서 동대문종루(보신각)에서 남대문까지 간선 도로 좌우에 2,020칸의 가게를 설치한 것이 행랑 또는공랑(公廊)이다. 이 공역의 감독을 박자청이 수행하여 왕실븡관 청븡양반 및 도성 주민들의 경제적 수요를 충족시 키는데기여하였다. ⑤살곶이다리(箭串橋) 박자청이 관직에서 은퇴하고 병들어 힘들 때, 시공 상의 공법에 어려움이 생기자, 그에게 조언 을 구해 현장에 나가 감독함으로써 1420년(세종 2)에완성된돌다리다. 이 다리는 박자청의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 는데, 그를 지극히 총애하였던 태종이 승하하여 대여(大輿)가 무사히 지나간 곳이라 더 의미가 크다. 이 다리는 당시 한양과 강원도와 동남지방 을 연결하는 교통상의 주요 통로였으며, 현재 보 물 제1738호로 지정되어 있다. ⑥건원릉(健元陵) 1408년 5월24일 태조가 광연전 별전에서 붕어 (崩御)하자 약 6천여 명의 軍丁을 동원하여 역사 를시작하였고,9월 7일태종이 백관을거느리고 발 인하여 장지(葬地)에 도착하였다.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으며세계문화유산에등재되어있다. 지금부터 90년 전인 1932년 일제시대에, 강원 도 장양면 금강산 월출봉(1580m)에서 산불 저지 선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석함(石函) 즉 돌로 만 든 상자를 하나 발견하였다. 그 안에는 사리를 봉 안하기 위한 장엄구 일괄이 들어 있었다. 이 유물 들은 현재 보물 제1925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 물관에서전시되고있다. 박자청에 관련된 유일한 개인적 유물로서 그의 묘소조차 없어 추원사업을 해오지 못하던 후손들 에게는매우값진조상의유산이라할것이다. 이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의 팔각형 사리기 의 은판 표면에 사리탑을 모신 내용과 이성계와 그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발원하였다고 새 겨져 있다. 그리고 백자 사발의 명문에는 사기장 심룡(沈龍)이 그릇을 만들고 승려 신관이 발원한 다는 것 하나와, ‘금강산 비로봉 안유기(安遊記)’ 로 시작하는 또 다른 명문에는 “신미년(1391년) 5월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등과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1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 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 하생을 기다린 다.”라는내용이들어있다. 또한 이 사리기의 발원문 가운데에는 여러 인 물 중에 납자 월암(衲子 月菴), 영삼사사 홍영통 (洪永通), 동지밀직 황희석(黃希釋), 박자청(朴 子靑)등의이름이포함되어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황희석에 이어 박 자청의이름이확인된다는사실이다. 박자청을 언급하면서 조선 개국공신 황희석 (黃希碩)을 빼 놓을 수 없다. 황희석의 본관은 경 상도 평해(平海)이고 함경도 영흥으로 이주한 것 으로 추정되는 호족 출신이며, 이성계가 왕이 되 기전부터휘하장수로서맹활약한인물이다. 그 시절에 박자청은 황희석의 가인(家人)으로 수행 군사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해 황희석이 승 승장구하는데 따라 박자청의 임무와 신분이 상승 되었다고볼수있다. 마침내 이성계가 왕에 등극하고 황희석은 정계 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면서 박자청을 궁궐 경비 대의입직군사(낭장)로추천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왕의 이복동생 이화 가 궁문을 무단출입하려는 것을 제지하다 구타당 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호군으로 승진하면서 숙 위군사로서 내상직(內上直)에 임명되었다. 이때, 상으로 은대(銀帶)를 하사받았고,밤낮으로 순행 하여 충성심을 인정받음으로써 태조3년에 선공 소감(繕工少監)으로 옮기고, 이듬해 원종공신 (原從功臣)에책봉되었다. 박자청의 충성심과 임무 수행능력은 태종의 기 대에 부응했으며, 그에 수반한 관직의 승진은 거 의 파격적이라 할 정도로 화려하여서 재상 반열 인 판한성부사븡공조판서븡판우군도총제사 등 고 위직에올랐다.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판한성부사는 조 선 중기에 한성부판윤으로 바뀌어 부르다가 ‘한 성판윤’이라고 통칭되고 있다. 또한 박자청의 출 신 신분에 관하여 노비(奴婢) 여부에 대한 논란 이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곁들이고자 한다. 기록자에 따라 그의 초반 신분에 대해 보종(步 從), 수종(隨從), 수졸(隨卒), 가인(家人) 또는 내시(內侍), 환관(宦官)이라는 용어가 개념상 분 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수(隨)가 붙는 단어는 수 행한다는 의미일 뿐이며, ’가인‘이라는 단어에서 황희석 가문에 속한 인물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가문 안에서 위계상 차별은 있으되 신분 계층상으로는 동격이라고 볼 수 있 다. 노비에게는 조상에 대한 기록이나 성(姓) 또 는관향(貫鄕)이없기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박자청은 노비가 아니다. 시조가 박제상이고, 영해 출신 박씨 즉 영해박씨라는 자 체가노비가아님을입증하는것이다. 다만, 박자청의 입지전적 신분상승에 대해 흥 미를 돋우기 위해 ‘일등병에서 대장까지’ 라는 식 의 초고속 승진을 찬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듯싶다.‘천민에서재상까지’가바로그것이다. 시조는 박제상(朴堤上)이다. 눌지왕 2년 고구 려에 가서 볼모로 있던 왕자 복호(卜好)를 탈주븡 귀국시키고, 왜에 가서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구해내고화형을당한신라충신이다. 박제상은 박혁거세의 9세손이며 파사왕의 5세 손으로, 갈문왕의 손자이다. 따라서 신라 박씨에 서 분관된 성씨이다. 그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바로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이고,이름이 박문량이다. 영해박씨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번성하였다. 신 라에서는 무열공 박용문(朴龍文),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운 박경한(朴京漢),당나라에서 빈공과에 급제한 박인범(朴仁範), 통문박사 박계업(朴季 業), 견훤의 난에 비분하여 낙향한 박술홍(朴術 洪)등이있다. 고려시대에는 광종 때 효행으로 유명한 박광렴 (朴光廉), 문하시중 박도덕(朴度德)이 있으며, 현종 때 전법전서 박명천(朴命天)과 문하시중 평장사 박송비(朴松庇)가 배출되었다. 특히 박 명천은 삼중대광벽상공신에 추증되고 예원군 (禮原君)에 봉해져, 예원은 영해의 옛 땅이름이 라 영해를 현종이 관향(貫鄕)으로 내려 사관 (賜貫)중조(中祖)가 되었으며, 박송비는 김인 준(金仁俊)과 함께 무인정권의 최의(崔誼)를 죽여 위사공신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태자태사 를 지 냈 다 . 박용량(朴用良)이 상서좌복야, 박세통(朴世 通)븡박홍무(朴洪茂)븡박감(朴 鞫) 3대가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다. 고려 말에는 박원계(朴元桂)가 전법판서를 지내고,두문동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충절을보인박심(朴諶)등이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박경(朴經)이 대사헌을, 한성 건설에 크게 공헌한 판한성부사 박자청(朴子靑) 이 공조판서븡판우군도총제사에 올랐으며 시호는 익위(翼魏)이고, 박창령(朴昌齡)은 평양소윤을 지냈다. 이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단종 폐위에 비분 강개한 박창령의 자손들을 포함(박도븡박재븡박규 손븡박효손븡박천손븡박인손븡박계손)한 7인이 매월 당 김시습븡박상치와 함께 산간에 은거븡불복하였 다. <성씨의고향(중앙일보)> 광복 후의 지명인사로는 관븡학븡재계에서 박영 두(호수여객대표븡전 대종회장), 박율선(동양정 밀 회장), 박종수(원호처장), 박하철(영남화학사 장), 박구일(해병대사령관), 박이섭(감리교원로 목사), 박노일(광동실업대표), 박득순(서양화 가), 박용문(연세대교수), 박용운(고려대교수), 박성수(선진그룹대표븡현 대종회장) 등이 활약하 고있다. 15세기 초 판한성부사 박자청 일대기를 살피면 서 20세기 말 서울특별시장 김현옥을 연상해보는 일은매우흥미있는비교일수있다. 태종 이방원의 각별한 신임을 등에 업고 박자 청이 좌고우면하지 않으면서 조선 초기 한성 건 설에 매진하였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절대적 신 뢰를 바탕으로 김현옥은 현대도시 서울을 건설하 는 견인차로서 수도서울을 획기적으로 변모케 한 선도자였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의 추진력을 갖고 도시개발을 했던 김현옥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 타 나 호 령 을 하 며 새 도 읍 지 한 성 건 설 을 독 려 하였던 모습에서 두 인물의 유사성을 상상해 볼 수있는것이다. 필자는 6년 전 저명한 언론인 배병휴가 발행하 는 월간 <경제풍월>에 처음으로 박자청에 관한 글을 기고한적이있다. 600년 만에 환생한 역사적 인물 ‘박자청’에 대 해 독자들의 반응이 나타났고, 그 후 월간조선 등 다른 매체에서도 소개되었으며 최근에는 KBS에 서 팝오페라 형식으로 방영하여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세종시대의 ‘발명가 장영실’을 TV드 라마를통해익히알게되었듯이,‘건축가박자청’ 이라는 또 한 사람의 역사적 영웅과 시븡공간을 넘 어만날수있다. 21세기는 과학의 시대이면서 새로운 형태의 건 축을 추구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의 분 발과 각계의 관심 그리고 후손을 비롯한 일반인 의참여로‘건축가박자청’을이시대에불러내번 영하는대한민국서울을재창조해보면어떨까? /글쓴이:서울역사문화연구소장최종인 조선최고의건축가박자청(朴子靑) 선조 유지를찾아븣 조선개국과새수도한성(漢城) 창덕궁금천교(昌德宮錦川橋)는서울특별시종로구와룡동,창덕궁(사적제122호)에있는조선시대의교량이다.2012년3월 2일대한민국의보물제1759호로지정되었다. 경회루(국보제224호) 경회루는48개의돌기둥이떠받치는2층의누각이다. 경회루는외교를위한사신접대,궁궐내의연 회,문븡무과시험,기우제및군사들이말을타고활쏘기시범을보이는장소로사용됐다. <이성계발원사리장엄구일괄> 치산서원 전경, 박제상을 비롯한 부인과 두 따님을 모시고 있다. 경회루의겨울. 건축의달인박자청(朴子靑) 박자청의 업적 박 자청의 유물 박자청의 출신(出身)배경 영해박씨의 역사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