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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0월31일 일요일 12 (제178호) 기획 임진왜란발발초기조선은이를감당하기어려울정도로국력이쇠약해지고국론은분열되어왜적들은순식 간에조선을유린하면서우 리나라백성들이씨가남지않게되었는데그때수령(守令)방백(方伯)으로부터조정의관리,지방의선비들에 이르기까지의병을일으켜 왜적과 싸운 기록이 많으니 우리나라가 다시 있게된 것은 모두가이분들의 공로이다.전북 남원의 만인의총 은56인 의사의 위패와 정유 재란당시치열한싸움에서희생한무명용사등을모시고있다.그리고그중심에는초곡박계성장군이있어 그의충의정신을엿볼수있 다. 전북남원은임진왜란과정유재란에왜적들이부산에상륙진주를거처북진하는중요한통로이기에치열한 싸움이전개되기도했다.충 신 박계성은 금산전투와행주대첩에공을세우고남원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박승성과 박언정은 진주성에 서순절하였고,박계성의 부 인 창녕조씨는 남편을 따랐다.이에 한 집안에서 세 충신(忠臣)과 열녀 한분이 나왔으니 전북 남원의 죽산박씨 충현공(휘 문수)의 후예이 다. 지난 달 26일 남원 만인의총에서 정유재란 당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호국선열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순의제향(殉義祭享)행사를 거행되어,이곳에배향된의사들을추모하며죽산박씨삼충일열(三忠一烈)을소개해보고자한다. 삼충일열(三忠一烈)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에서 순절한 죽산박씨 충현공 가문의 후예를 말 한다. 충현공파는 휘 문수(門壽) 公을 파조로 한 다. 1342년에 태어난 선생의 호는 송암(松菴), 고 려 수성보조공신(輸誠輔祚功臣) 가정대부(嘉靖 大夫) 중추원사 도평의사 찬성사 우정승(中樞院 事 都評議使 贊成事 右政丞), 초휘(初諱)는 문주 (文柱)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두문동으로 들어간 두문동 현인의 영수 (領首)이다. 「만수산 배록동에서 고사리를 캐고 캐네 아침 에도 캐고 저녁에도 캐지만 그 누구와 함께 먹을 까? 아 고죽군의 두 아들아」 이 시(詩)는 선생께 서 만수산에 들어가 문을 닫고 절의를 지키다가 포은 정몽주 선생이 선죽교(善竹橋)에서 흉변 (凶變)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일의 큰 감회 (感懷)를 금치 못하여 지은 것으로 대개 조석(朝 夕)으로 고사리를 캐 함께 먹을 사람이 없게 된 심정을나타낸것이다. 충현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는 휘 총 (叢)이고, 둘째는 휘 포(苞)이다. 장남 총(叢)은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지신사 겸 판전의시 사(密直司知申事兼判典儀寺事)를 지냈다. 학문 (學問)과 덕망(德望), 충절심(忠節心)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흠앙(欽仰)하여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학문 을 좋아하고 지조 (志操)를 숭상한다 고 허 여 (許 與 )하 였 다. 태조(太祖)가 위화도(威化島)에 서 회군(回軍)할 때 계책을 도와 위 왕(僞王) 신우(辛 禑:고려(高麗) 우 왕(禑王)를 폐위 (廢位)시키고 공양 왕(恭讓王)을 세웠 기 때문에 그 훈로 (勳勞)와 충렬(忠 烈)이 『고려사(高 麗史)』에 보인다.조선 태조(太祖)의 건국이 실로 이 회군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태조가 즉위(卽位) 하였을 때는 공께서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태조 께서 공의 충의심을 생각하여 일등공신(一等功 臣)으로 특별히 공신도감(功臣都監)에 기록하였 다. 차남 포(苞)는 고려(高麗) 때 진사(進士)로 전 의녹사(典儀錄事)를 지내고 조선(朝鮮) 정종(定 宗) 때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 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대장군(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 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大將軍) 죽성군(竹城 君) 개국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 정사공신이등 (靖社功臣二等)에 봉해졌다. 공께서는 회안대군 (懷安大君, 방간 芳幹)에게 「사람들과 교제(交際) 를 끊어 죄(罪)를 피 해야 합니 다.」라고 경계 하는 말 을하였으나회안대군이그말을 듣지 않았는데 정 종(定宗) 경진(庚辰) 서기(西紀) 1400年에 도리 어제2차왕자란(王子亂)때연루되었다. 충현공의 장손자 휘 자량(子良, 휘 총의 子)의 호(號)는 杏村(행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행 한성판윤(行 漢城判尹) 전라도 관찰사(全羅 道觀察使)를지내셨다.덕행(德行)과문장(文章) 에 뛰어나시고 명리(名利)를 마음에 두지 않고 후진(後進)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 다. 숙부(叔父) 찬성공(贊成公, 휘 苞)께서 화 (禍)를 당하던 날 회맹연(會盟宴, 임금이 공신에 게 내리는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라 도 관찰사로 좌천(左遷)되어 부임 3일 만에 벼슬 에서 물러나 처가 인근인 남원(南原) 수지(水旨) 현재의 남창리(南倉里) 마을 앞 행정 뜰에 은거 (隱居)하시어명륜당(明倫堂)과화락당(和樂堂) 이란 집을 지어 매월 초하루면 남쪽의 선비들과 함께 경서(經書)의 뜻을 연구하고 인륜(人倫)을 밝히는데 힘씀으로서 남원일대 죽산박씨의 정착 조가 된 것이다. 그 집의 남쪽에다 손수 은행나무 를 심어 단행(壇杏)의 뜻을 취함으로 인하여 호 (號)로 사용한 것이다. 행촌공은 아들 흠·균·갱·감 사형제를 두었는데 첫째와 둘재는 무후이고 셋째 갱은 승위교위 부 사직을 지내고 아들 맹분·숙분계분을 두었다. 장 남 맹분은 무후이고 차남 숙분은 무과에 급제하 여 어모장군 행 선전관을 지냈다. 아들 숭조(崇 祖)를 낳으니 호(號) 三拙(삼졸). 통선랑(通善 郞)이다. 유일(遺逸:훌륭한 재능을 지니고도 벼 슬하지 않은 고상한 사람)로 여러 차례 은혜로운 통정대부(通政大夫) 제지(除旨)가 내려졌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에추증되었다. 아들 세훈·세형·세영을 낳으니 세훈은 충찬위 (忠贊衛) 행 후릉참봉(行厚陵參奉)으로 아들 언 성·계성·승성을 낳았고,차남세형(世亨)은행 경 릉참봉(行敬陵參奉)으로 언균·언평·언강·언기· 언정을 낳으니 계성·언성·언정이 곧 3충신이고, 계성의부인창녕조씨가열부이다. 명종(明宗)계축(癸丑)1553年 남원 수지면(水 旨面) 남창리(南倉里)에서 태어났다. 자(字) 이 술(而述) 초곡(草谷)은 아호이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발분(發憤)하셨으며 성품이 명민(明 敏)하고 일처리를 과단성(果斷性) 있게 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쓰고 예(禮)로써 몸을 검속(檢束)하였는데 전 참봉(前 參奉)으로 임진 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왜적(倭賊)들이 날뛴 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안 재산을 팔아 병기(兵 器)를 장만해 곧장 서울로 올라갔는데 친환(親 患)소식을 듣고 돌아와 병구완을 하면서 동생 승 성(承成)을 시켜 의병장(義兵將) 고득뢰(高得 賚 )의 막 하 로 군 량 을 실 어 가 그 지 휘 (指 揮 )를 받 도록 하였다.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 (侍墓)살이를 하시어 향리에서 효자(孝子)라는 칭찬이 이어졌다. 충장공(忠莊公) 권률(權慄)과 인척(姻戚) 관계여서 사생(死生)을 함께하자는 결의(結義)를 맺었는데 권률의 행주대첩(幸州大 捷) 시(時) 그 이면(裏面)에는 공의 도움이 많았 다. 이런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자 특별히 한성판 관(漢城判官)에 제수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 亂) 때는 집안 하인과 이웃 장정(壯丁) 3천여 명 을 이끌고 싸움터로 가니 군성(軍聲)이 크게 떨 치게 되었다. 구례(求禮) 석주(石柱)와 남원(南 原) 산동(山洞) 등지에서 연달아 승리하였는데 남원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남원부 사(南原府使) 임현(任鉉)이 공에게 와서 구원 (救援)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공은 군사를 이동시키다가 율치(栗峙)에서 크게 싸워 무수한 왜적을 베었다. 그러나 화살이 다하고 외부(外 部)의 원조도 끊어져 고전하다가 적탄에 맞아 순 절(殉節)하니 이 날은 진주성(晋州城)이 적에게 함락되던 날이다. 공의 사적은 『해동충의록(海東 忠義錄)』·『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용성지 (龍城誌)』등에 실려 있다. 나주(羅州) 충장사(忠 莊祠)에 배향(配享)되었다. 고종(高宗) 신묘(辛 卯) 서기(西紀) 1891年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셨으며 갑 진(甲辰) 서기(西紀) 1904年에 금산(錦山) 금곡 단(金谷壇)에 배향되었으며 후에 남원 충렬사 (忠烈祠)에 배향되었으며,난중잡록에도 그 기록 이전해져소개한다.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전 남원 참봉 변사 정(邊士貞)이 본부의 부로 박계성(朴繼成)과 흩 어진 군사를 모았는데, 가까운 고을의 관군이 와 서 붙 는 자 가 매 우 많 아 서 수 십 일 안 에 2 천 여 명 을얻고적개(敵愾)라는두글자로군표를하다. [역 문 ] 유 세차 (維歲次 년 월 일에 후학 (後學) 모 (某)는 감히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이조참의 행 통훈대부 한성판관(吏曹參議行通訓大夫漢城判 官)초곡(草谷)박공(朴公)께아룁니다.삼가 천지(天地)의 기운은 지극히 바르고 순강(純 剛)합니다. 선생께서는 천성이 자강불식(自强不 息)하셨는데 오랑캐를 물리치는 춘추대의(春秋 大義)를 먼저 깨달으시고 앞날을 점침이 분명하 셨습니다. 그래서 옛날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헤 아릴 수 없이 날뛰어 우리나라를 유린(蹂躪)하여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피난을 가자 그 흉한 칼 날을 남쪽으로 옮겨 우리 백성들이 거의 씨가 남 지 않게 되었었으니 의기(義氣)가 있는 사람이라 면 그 누군들 분노 하지 않았겠습니까?이때 공께 서는 재산을 털어 군량을 만들고 병기를 만들었 으며 전략(戰略)을 내어 왜적을 물리쳐 해와 달 이 다시 비추이고 나라가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그 런 데 누 가 다 시 정 유 재 란 (丁 酉 再 亂 )이 일 어 나 사나운 왜적들이 감히 남원성을 매우 급히 포위 할 줄을 알았겠습니까? 이때 공께서는 집안 하인 과 이웃 장정을 이끌고 연전연승을 하셨으며 부 사가 구원을 청했으니 이는 실로 공을 중히 의지 하였던 것입니다. 구원하기 위해 가다가 중도(中 途)에서 갑자기 적을 만나 십여 차례 싸워 많은 왜적을 배어 적군의 피가 옷을 붉게 물들였습니 다. 화살이 다하고 칼이 부러져 중과부적(衆寡不 敵)이 되어 하늘조차 찡그리고 근심하게 되었습 니다.오직 나라가 있는 것만 알고 자신의 몸은 잊 어 외로운 남원성이 함락되는 날 살신성인(殺身 成仁) 하셨습니다. 그 충성심과 위대한 의열(義 烈)은 귀신과 사람을 감동시키고 이름이 삼강오 륜(三綱五倫)을 적은 책에 전하게 되었습니다. 때에는 이르고 빠름이 있어 영령(英靈)께서 지금 까지 제향(祭享)을 받지 못해 떠도 셨을 것입니 다. 이에 당시의 제공(諸公)과 함께 제사를 올리 는 것이 도리에 합당하므로 유림(儒林)이 힘을 써서 잘못이 없게 하였습니다.이에경건히제수를 올리오니흠향(歆饗)하소서. 열부 창년조씨는 초곡공 휘 계성(諱 繼成)의 부인이 다. 초곡공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싸움에서 도원수 충장공 권율을 도와 승첩함 으로써 한성판관에 임명되 었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삼 천여 의병을 거느리고 구례 한수내와 산동 등지에서 북상하려는 왜적을 막 다가 남원부사 임현의 구원 요청을 받고 달려가 던 중 율치에서 왜의 대군을 만나 고군분투하다 가 장열하게 산화하시었다. 夫人은 이때 견두산 아래 회나무 골짜기에서 피난하고 계시다가 15 97年8月9日에 公이 전사하고 남원성이 함락되 어 왜적이 들판에 가득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 비(侍婢)를 불러 「나는 남편을 죽인 왜적과는 하루도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 이제 公의 뒤를 따르겠으니 너는 부디 어린 아들을 잘 성 취(成就)시켜 다오. 그러면 지하에서라도 네 功 을 잊지 않겠다.」라 유명하고는 서기1597년8월 11일 자결(自決)하고 말았다。 후에 公은 통정 대부 이조참의에 추증되어 나주충장사와 남원 충열사에 배향되셨는데 면암 최익현선생께서 신도비 명을 지어 삼충일렬(三忠一烈)이라고 극구 칭탄(極口稱嘆)한 것만 보아도 公과 夫人 의 忠과 烈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종래에 부인 의 성씨가 미상이라 하였으나 최근 집안에서 고 증한 바에 의하면 초곡공과 동서간인 충장공 권 율의 모부인 친정인 창녕조씨 집안에서 출가해 온 것으로 밝혀졌음을 첨언하며 가계세덕(家系 世德)과 미행의적(美行懿蹟)은 公의 神道碑銘 에 자 세 하 게 전 해 진 다 . 임진왜란은 유사이래 미증 유의 참혹한 병화였고 그중 에서도 진주성 싸움이 더 심 하여 사서를 읽다가 그 대목 에 이르면 저절로 탄식하고 비분강개하게 되는데 죽산박 공휘계성과 그 아우 승성(承 成 )이 바 로 그 런 분 이 시 다 . 公의 세덕의행(世德懿行)은 이미 면암 최익현 선생께서 초곡공의 신도비명에 서 상술(詳述)하였으므로 생략하지만 최선생께 서 비명에「임진왜란을 당하여 시골의 선비들까 지도 義兵을 일으켜 싸웠으니 우리나라가 있게 된 것은 모두 그분들의 공로이다. 죽산박씨 집안 에서는 초곡공을 비롯하여 그 동생 승성과 종제 언정까지 순절하여 3충(三忠)이 되고 더군다나 그의 夫人까지 의롭게 自決하였으니 이는 충열공 제봉 고경명 부자보다 한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 도 나라에서 초곡공만 벼슬을 추증하고 다른 분 에게는 포상이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이다.」 라 극찬하고 애석해 하신 것은 특기할 만하니 이 것만 보아도 公의 충열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고 하겠다. 공의 휘는 승성(承成)이요 죽산박씨 이시니 송암 충현공 휘 문수의 칠세손이요 초곡 공 諱 계성의 동생이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초곡공을 따라 행주성 싸움에 참가하였다가 친환 때문에 귀향하였는데 하루는 초곡공께서 말 씀하시기를 「나는 아버님의 병환 때문에 시측(侍 側)을 떠날 수 없다. 최경회公의 의병이 지금 함 안에 주둔해 있는데 군량이 부족 해 고생하고 있 다고 한다.너는 우리 집안에 있는 곡식을 모두 기 울이고 인근 고을서 군량을 모아 가서 전하거라」 하였다。 이에 종형 언정과 함께 군량을 싣고 가 서 최공의 막좌 고득뢰에게 전달하고 인하여 그 곳 의병과 합류하여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왜병 에 의해 겹겹이 포위 된 진주성은 완전 고립무원 인 상태에서 항전하다가 하늘마저 돕지 않아 장 마비에 성 한쪽 모퉁이가 허물어져 왜군이 물밀 같이 몰려들어 함락되니 황진공과 장윤공이 전사 하던 癸巳年(1593) 6月29日날에 함께 장열한 최 후를 마쳤다. 공은 이때 미취(未娶)여서 후사를 두지 못했으나 세상에서 초곡공 내외와 언정 그 리고 公 네 분을 竹山朴氏三忠一烈이라 부르며 기리고 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종손 환진씨 께서 공의 의이지장(衣履之藏)이 없는 것을 안타 깝게 여겨 이 일을 主管하여 이제 三忠一烈碑가 새롭게 모습을 나타내게 되어 경하할 일이므로 이상과 같이 쓴다.(2003年 癸未 현충일에 옥천후 인조수익삼가씀) 공의 諱는 언정(彦貞)이 요 관향은 죽산이다. 아버지 ( 考 )는 行 경 능 참 봉 휘 세 형 (諱 世亨)이요 어머니는 단 인 초계정씨(端人草溪鄭氏) 현감 형(泂)의 따님이다. 公 은 음직(陰職) 참봉을 지내 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형 초곡공을 따라 종군하 여 협찬한 功아 많았는데 초 곡 공 의 명 에 따 라 종 제 승 성 과 함 께 군 량 을 싣 고 함안에 머물고 있는 고득뢰의 진영에 가서 전달 하 고 는 인 하 여 막 좌 (幕 佐 )가 되 어 여 러 義 兵 들 과 함께 진주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입성하여 싸우다 가 성이 함락되던 날 전사하니 癸巳年(1593) 6 월29일이었다. 이때 진주성에는 명나라 군사와 왜군 사이에 잠 시 화의가 성립되어 남하하던 적이 전쟁 초기 김시 민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분을 풀기 위해 모두 진주 성으로 집결해서 세 겹으로 포위 공격하였다. 외부 의 원 조가 완 전히 끊 어진 진주 성에 는 창의 사 김천 일 절 도사 최 경회 부 수장 고 종후 등 이 거느 린 의병 이 집 결하 여 외롭 게 항전 하다 가 활 과 화살 이 동이 나자백병전으로대항했으나마침내중과부적이어 서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장수와 의병들 은 전 사하 고 살아 남은 자 들은 남강 에 뛰어 들어 마 지 막 단심 (丹心)을 나타 내니 칠 년전 쟁에 서 가장 치열하고처참한전쟁이었다. 임진왜란 때 호남 점령의 실패가 임진왜란의 패인이라 판단한 왜적은 11만 대군으로 1597년 전라도를 침공하기 위하여 우군은 전주성을 좌 군5만6천은 남원성을 공격하였다.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1천여의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 였다.적은 8월 12일 남원에 당도하여 성을 겹겹 이 포위하였으며,13일부터 16일 밤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민 6천여 명 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혈전 분투하다가 장 렬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초곡공 박계성과 그의 아우 승성, 그리고 종제 언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원 만인의총의 충렬사에는 초곡공 박계성을 비 롯한 56인의 위패를 모시고 이들의 충렬을 기리 고 있다.그러나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승성,언 정 공의 충절은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으나 종손 고 상진(보명 煥珍,2020년 작고) 공께서 설단을 세우고 향화를 받들어 3충1열의 추모공원을 완성 하였기에그사적이드러나다행스러운일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일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기에 후손 환성 현종의 추모시를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참의공 가시던 그 길 어느 하나 나라 위함 아 니 랴 / 의 로 운 길 푸 른 서 리 굳 은 충 의 붉 은 넋 은 / 마침내 뜻 다 이루지 못하셨으니 그 마음 오죽 하셨으리/ 깨닫고 바치시다 공의 운명 초개 한 알/ 이 강산 근역(槿域)에다 대의 명분 뿌리 심 어/ 의(義)어린 그 빛깔 끝도 없이 흐르는구나/ 크도다 의에 가신 삼종행(三從行)의 붉은 넋은 / 이루어 헤아려도 예도 이제 드물거니/ 때 함 께 일문삼충일렬(一門三忠一烈) 빛난 천추(千 秋)리라/ 숙부인(淑夫人) 가신 지가 네 세기 (世紀)가 가까워요/ 엎드려 살피거니 섭섭함 을 못견디어/ 이제사 붓과 종이 들어 심정 새겨 봐 요 (1 3 대 손 환 성 삼 가 짓 다 )』 죽산박씨삼충일열(三忠一烈)박계성(朴繼成)·박언성(朴彦成)·박언정(朴彦貞)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원세계와 남원 정착 초곡공박계성을비롯한삼충일열의묘원으로정충위열(精忠偉烈)의고귀한정신을계승하고뜻을기리기위해조성되었다.앞줄 비석왼쪽부터박승성,박언정,창녕조씨정려,초곡공박 계성신도비,정충위열비,뒤쪽둥근봉분박계성묘. 낙남조 휘 자량(子良)사적비, 수지 면내호곡 박계성의묘.전북남원시수지면산정시산1번지 박계성 교지, 1880년(광서17 고종28)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만인의총,전북남원시향교동636.충렬사에초곡공박계성 을비롯한56인의위패가봉안되어있다. 충신초곡공박계성(朴繼成) 남원충렬사(忠烈祠)봉안문(奉安文) 열부昌寧曺氏 충신박승성(朴承成)설단비명 맺음말 충신참봉박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