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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7월31일 토요일 12 (제175호) 기획 잠야 박지계(1573-1635)선생은 조선중기 선조,광해군,인조대를 살다간 처사형(處士形)도학자(道學者)였다. 함양박씨경팔립(京八立,사촌형제立字항렬8명이대소과에급제)으로유명한명문가에서태어났 다.일찍부터학문적성취에대한인정을받았고,일평생성리학연구를하며도학자로서일관된삶을살았다.그러 나그가살았던시기는조선왕조가내우외환에시달리는시기로서선조때는동서분당으로당쟁이 격화되던중에임진왜란이발발하여국가적수난을겪어야했고,곧이어광해군집정기정치적갈등으로빚어진혼 란과난정(亂政)으로정치세력간에첨예한대립이격화되자이를피해한양을등지는양반사족(士 族)이늘었고,이어진인조반정은기회가될수있었음에도원종추숭과복제(服制)문제로갈등을빚고낙향했다. 이후수차례상소를올려자신의학문적주장을굽히지않으면서뜻은관철되었지만주류학자들 에의해많은비난과모욕도받았다.조극선을비롯한많은학자들을양성하였고,아산에서생애를마침으로서 1636년가선대부이조참판에증직되었고ㅡ인산서원(仁山書院)에배향되었으며,1740년자헌 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성균관제주세자찬선오위도통부도총관으로특증되고시호(문목)가내려졌다. 그리고17세기아산유학(儒學)의형성에초석을놓은인물로꼽히고있다. 박지계는(朴知誡) 선생의 본관은 함양이며 호 는 잠야(潛冶)이다. 명종때의 명신으로 동몽선습 (童蒙先習)의 저자인 소요당(消遙堂) 박세무(朴 世茂)의 손자이자,수안군수를 지내고 노수신(盧 守愼)과 허엽(許曄) 등과 교류한 박응립(朴應 立)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임지였던 송화현 에서 1573년에 태어났다. 부친이6년의임기를마치고1573년(선조8)통례 원인의겸한성부참군으로전직할때서울본제(本 第)로 돌아왔다.(3세) 이곳에서 9세에 등창(痘瘡) 을 앓았고, 10세인 1582년 4월 부친(65세)이 임소 (任所)에서 순직하자 경기도 양주 신혈리(현 고양 시덕양구오금동)으로반장(返葬)해모셨다. 다시 서울 본댁으로 돌아와 성장하면서 선생을 통 해공부하며독서에매진하였다.이과정에조부박세 무가 지은 ‘童蒙先習’과 ‘사기(史記)’를 읽었다. 선생 이 당시(唐詩)를 가르치니 거부하고 논어를 읽었고, 유고경전에더많은관심을보였다.이때부터15세까 지일과를거르지않고열심히공부에정진하여대인 의기상을보였다한다.또래의사표(師表)가되어인 목대비의오빠인김래와종질박유일등이비슷한나 이인데도 머리 숙여 배웠다고 한다. 잠야공은 이렇게 반송방 냉정동 월랑암촌에서 1 0년을 살며 공부하였는데,20세인 1592년 임진왜란 이 일어 나자 모 친을 모 시고 제 천으 로 피 난하 였다 . 당시 장인 이유간(李惟侃)이 제천현감으로 재임중 이 어서 이런 연 고로 이주 한 듯하 다. 1594년 에는 괴 산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중용’과 ‘대학’을 읽 었 다. 모친 전 주이 씨가 병 환이 나자 극 진히 간 호하 였고,1597년 7월에 타계하자 상례를 한 결 같이 주 문공(朱文公)의가례(家禮)에따라행하였다. 잠야공은우리나라선유(先儒)로우계성혼(15 35~1598), 율곡 이이(1536~1584)를 존모(尊慕) 하며 이들 문하에 나가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러 워했다 한다. 그의 성리학 공부의 방향이 우계와 율곡으로 확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란이 끝나자 1604년 잠시 주거지를 괴산에서 다섯째 형 지경(知警)이 있는 인천으로 옮겼다. 하지만 얼마 안되어 서울 반송방 냉정동 경제(京第)로 돌아왔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을 떠난지 12년 만 에귀경한것이다. 1606년 10월 박지계는 이조판서 허성(許筬)이 천거하여 왕자사부에 제수되었지만 사임하고 나 가지 않았다. 곧 광해군의 집정이 시작되자 박지 계와 가족들은 다시 주거를 지방으로 이전하는 것으로보인다. 1613년계축옥사사건으로인목대비의아버지김 제남과 친구인 아들 김래가 참혹하게 죽임을당하 는 것을 목도 하고 1614년 (광 해6)에 신창 소 동면 수 유리(현 아산시 신창면 수장리)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박지계의 장인 이유간이 쓴 ‘우곡 일기 ’를 보 면 이유 간이 1609년(광해 1) 12월 30 일 천 안군 수로 부 임할 때 이 미 사위 박 지계 는 자기 가 족뿐 아 니라 두 형의 가 족들 과 함께 신창 에 내려 가 살고 있 었다 고 기 록되 어 있다 . 따 라서 이미 광 해 군 초 에 신창 으로 이 주한 것 인데 이 들이 신 창을 택 해 이주한 직접적인 이유나 계기가 무엇인지는 불 명이다.그가 1607년 11월에 포저 조익과 원당 신사 (新寺)에서 만나 논어의 ‘子貢 問貧而無諂’ 장(章) 을 토론 하는 것 을 보아 이 무렵 신 창 수장 리(水踰 里)로낙향한것이아닌가추측된다. 1609년(광해1)에 홍문관 최현(崔睍)이 추천하 여 익위사좌세마에 임명되고 서연관(書筵官)을 겸하게 되었는데 박지계는 사은숙배(謝恩肅拜) 한 다음 사직하였다. 이어 동몽교관에도 임명되 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러한 박지계의 태도 는 광해군 집정이후 새로 등장한 북인정권이 보 인 난정(亂政)으로 점차 서인이 위기에 빠지는 정국상황과 무관하지 않지만 박지계의 집안이 실 제로 큰 정치적 사건에 집접 연루된 일은 없었다. 다만 측근의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은 것은 무관 하지 않을 것 같다. 동서인 윤전의 부친인 윤안성 과 형 윤협 홍주목사에 재직중에 대북파가 소북 파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김직재의 무옥(誣獄) 에 관련되어 파직되었고, 제자 이의길, 조석형이 화를 입었고, 친구인 김래는 계축옥사에 연루되 어 부친 김제남과 동생 김규 등이 함께 죽임을 당 했다. 광해군대 집권 대북세력의 독두와 정치 혼 란으로 서인들이 느낀 위기감을 더해갔다. 이 때 문에 박지계 형제들도 모두 지방으로 이주를 결 정하고은거생활에들어갔다. 박지계가 이주한 신창 수장리는 현 곡교천 중류 에 위치한 마을로 범천(范川, 현 삽교천)과 아산만 의 수로 를 이용 해 경 기도 남 양과 인 천, 서울 로 쉽게 연결되는 편리한 장소였다. 이후 신창에서의 박지 계 일 가의 삶 도 이 공간 속에 서 활발 히 전개 되었 다. 그리고 평생의 지기였던 권득기와 조익 등 많 은 벗들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등 광해군의 혼정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하면 스스로 물러나은거하게된다. 이 무렵 박지계는 권득기, 조익 등과 함께 활발 하게 성리학을 강마하며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 고, 성리학의 여러주제에 대해 격렬히 토론하는 한편, 제자 양성을 위한 강학에도 열심히 종사하 였다. 자제들과 조카들 뿐 아니라 인근에서 찾아 오는 이의길, 권극선, 이중형, 조송년, 민광숙, 변 호길, 변인길 형제, 박내휘, 박재휘 형제, 민기수 등을 가르쳤고 서울에 남은 재경 제자들과도 수 시로연락하고왕래하며활발히교류하였다. 당시 아산지역에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 황, 이언적 등 오현(五賢)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오현의 배 향 요청하는 유림의 요청은 선조대 말부터 활발 해 지지만 광해군 집정 초기에는 전국단위로 문 묘배향과서원건립운동이요청되었다. 이런 사회적 요구가 왕성하던 1610년(광해2) 에 아산의 오현서원(五賢書院)이 세워졌다. 아산 의 사족들과 신창, 온양의 유생들이 힘을 모아 설 립되었는데 당시 아산현 소서면 와천(기와내)상 류에위치하고있었다. 1523년 인조반정은 박지계와 가족들 그리고 제 자들이 반정주도세력에 참여하여 정사공신에 책 봉되는 등 삶의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박지계 도 신정권에서 일할 만한 인재로 천거되었다. 그 는 학문이 독실한 재야에 묻힌 노성숙유(老成宿 儒)로 인정되어 인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그 해 4월 20일에 사포(司圃, 사포서에 두었던 정육 품의 관직)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상소로 사직하 자 하루만에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다. 이때 박 지계는 병현(餠峴, 지금의 이화여대 앞 고개)에 거주하였는데병현도반송방의한동네였다. 하지만 박지계의 사환은 녹녹치 않았다. 왕통 의 계승문제를 예학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조정대신들과 이를 이론적으로 뒷 받침하는 사계 김장생의주장과상충되기때문이다. 김장생은 ‘왕조례(王祖禮)의 특수성을 주장하 며 제왕의 정통은 혈통적 관계가 여하하던지간에 왕위를 계승하면 명분상 부자의 도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지계는 ’칭고칭자설(稱考稱子 說)을 주장하며 ‘왕실의 예도 일반인의 예와 다르 지 않으며 아버지자리가없이바로할아버지를잇 는 종통(宗統)은 없다. 정원군을 대원군으로 추존 하여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중론(衆論)은 그의 주장을 해괴하게 여기고 인조 에 영합한다고 비난하였다. 박지계는 사직하고 남 양으 로 내려 왔다 . 5월 10일 박지 계를 다 시불 러 지평 으로 임명하자 김장생과 함께 인조를 알현하였다. 여기에서도 박지계는 사묘(私廟) 문제를 거론하 며, 나아가 인조에게 주자서 강독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조정 중론(衆論)과 대립되고 특히김장생의주장과는다른것이다. 1528(인조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척화소(斥 和疏)를 올렸다.1628년 실화로 집에 불이 났는데 박지계의 침실만 화를 피했다.박지계는 1629년 1 2월아산중방리로이주하였다. 3차 논쟁은 정원군의 추숭문제인데 계운궁의 탈상이 이루어지 1628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 다. 추숭논의는 공신들인 이귀, 최명길이 주도했 다. 박지계의 제자인 김극형은 상소하여 대원군 을종묘에모실것을강력히주장했다. 추숭론이 국왕의 뜻대로 관철되자 인조는 이 문제에 공훈이 큰 박지계를 사헌부 장령으로 임 명하고 말을 보내 출사를 요청했지만 박지계는 사절하였고,다시 내섬시정으로 임명했지만 이것 도나가지않았다. 박지계는 사후에 오현서원, 곧 인산서원에 배향 되어 이제 아산역사의 일부분이 되었다. 17세기 아 산에 새로 입향하여 학문과 교육으로 아산지역의 유학적 전통과 기반을 넓히고 그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따라서 17세기 아산 유학의 형성에 초석 을 놓 은 인 물이 박로 잠 예 박 지계 라 할 수 있다 . 오 늘날 이런 전통은 아산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 대가 되 었기 에 앞으 로도 계 속 크게 재조 명이 되 어야할것이다.[김일환호서대학교교수] -求是·本實정신을중심으로- 잠야 박지계(1573~1635)는 17세기 초엽의 산 림학자(山林學者)이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숭용산림(崇用山林)을 표방한 집권 서인측에 의 해 유일(遺逸)로 등용되었다. 뚜렸한 사승(師承) 이 없이 사실상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학자다 자 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수립하지는 않았지만 40년 동안 산림(山林)으로 있으면서 독행(篤行)으로 칭송받았으며 마침내 김쟁생·장현관과 거의 동 급의유현으로등용되었다. 박지계는 정주의 학설을 준수하였으며,주자의 학설에 일부 이의를 보였던 권두기 조익 등을 비 판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본입장과는 달리 격물 치지설, 임심도심설 등에서 정주의 설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지신의 견해[己見]를 두드러 지게 내세운 경우, 또는 새로운 견해를 제기한 경 우가 있다. 논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견해에 강한 자신감을 보임으로써 권득기 ·조익과 끝내 견해를 좁히지 못했으며, 정치적으 로는서인계인물로인정받는다. 박지계의 학자적 존재감을 예론,특히 원종 추숭 론에서 절정에 달하였는데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 을원종으로추숭함으써논란에종지부를찍었다. 인조대의 전례 문제는 사실상 고례와 주자가례 간의 논쟁의 전조(前兆)를 보이는 것이었다. 뒷 날 현종때의 양대 복제문제(服制問題)에서는 어 디에 논리적 근거를 두느냐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 사로 등장하였고 논쟁이 치열해졌다. 그런데 입각 점(立脚點)에서는 학파·정파에 따라 입장이 전후 가 상반 되는 현 상이 빚 어졌 다. 양대 논 쟁에 서 주도 적 위치에 있었던 김장생-김집-송시열 일파는 고 례를 중시던 본래의 입장에서 주자가례를 중시하 는 쪽으로 선회하여 주자가례를 중시하던 박지계 일파의 입장에 서게 되고, 서인 세력과 반대쪽에 섰던 님인들이 고례를 소의처(所衣處)로 삼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다만 17세기에 들어 조정의 전례에서도 주자가례를 중시하는 분위기 가 일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그 선도자가 박지계 라는사실은예학사에서술될만한점이다. 모든 일에서 옮음을 추구하는 구시정신(求是 精神), 어떤 일에서도 현실(실제)에 근본을 둔다 는 본실정신(本實精神)은 박지계의 삶과 학문을 관통하는 기본정신이었다. 인조대의 전례문제에 서 박지계가 과감히 제 목소리를 냈던 것은 그 자 신으로서는용기있는행동이었을것이다. 인조 반정이후 청의(淸議)와 청론(淸論)을 표 방하고, 산림의 학자를 숭용(崇用)했던 일련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원종추숭을 앞장서서 제기 하는 일은 비판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섰던것은용기와소신때문이었을것이다. 박지계는 원종추숭론 때문에 명성이 높아졌지 만 이 때문에 두고두고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그 비판의근거는 ‘임금의뜻에 영합했다.’는 것이대 대수다. 한 학자의 인격과 관련된 일방적인 비판 이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왔다. 이제는 박지계에 대한공정한평가가이루어져야한다. [최영성한국전통문화대학교무형유산학과교수] 잠야박지계의문집간행경위와서지적인특징 ‘잠야 선생집’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130년이 지난 1766년(영조42)에 간행되었다. ‘잠야선생 집’은 목판본이 아니라 교서관 활자를 이용하여 속활자본으로간행되었다는점이특징적이다. 그러나 ‘잠야선생집(潛冶先生集)’이 간행되기 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잠야선생집’은 발문에는 “이 문집이 일찍이 남계 박세채 공이 고치고 다듬었지만 마치지 못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써 문집 간행을 위한 준비 가 박세채(반남인)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 다. 박세채가 잠야의 글들을 고치고 다듬는 작업 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었이었을까? 박세채는 1631 년생으로 1635년에 사망한 박지계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지만 장인 원두추가 잠야의 문인이었다. 원두추는 잠야가 세상을 떠났을 때 형 원두표와 함께1년동안심상(心喪)을한바있다. 잠야가 세상을 떠난 지 107년 뒤인 1742년(영 조18)잠야에게 시호가 하사되었다.‘잠야선생집’ 발문에는 이에 대해 “선생의 출처의 전말을 문간 공 빅필주(潘南人, 1665~1748)가 정리해서 태상 시(太常寺)에 고했고, 태상시에서 그 사실을 모 아서 시호를 내릴 것을 아뢰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그 결과 잠야에게는 ‘도덕이 있고 학문이 넓 으며 덕을 베풀고 정의를 지켰다.’는 의미로 문목 (文穆)이라는시호가하사되었다. ‘잡야선생집’은 10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문집의 편집 체재는 크게 서문, 목록, 본문,부록,발문의 순으로 이루어진다.서문은 권 수에 오는데 ‘잡야선생집’의 경우 서문이 실려있 지 않 고 권 수 에 총 목 록 이 있 어 책 의 전 체 내 용 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각 권의 머리마다 권 별(券別) 목록이 있다. 본문은 권1~10까지이다. 권1~3은 소(疏)로 구성되어 있다. 1633년에 올린 장편 상소인 ‘만언소(萬言疏)’와 1627년 올린 ‘척 화소(斥和疏)’를 비롯 하여 인조의 생부와 생모 에 대해 삼년복을 주장하는 복제론(服制論) 및 사직소(辭職疏) 등이다. 권4~5는 서(書)로 구성 되어 있다. 주로 중씨(仲氏), 조익(趙翼), 조극선 (趙克善), 김극형(金克亨), 원두추(元斗樞), 이경 직(李景稷), 권시(權 얍 ) 등에게 보낸 편지들인데, 대부분이 예(禮)에 대한 문답이다. 권6은 제문(祭 文), 잡저(雜著), 묘갈(墓碣) 등으로 구성되어 있 다.권7~9는예변(禮辨)에관한글들로이루어져있 다. 인조의 생부인 정원대군을 추숭해야 한다는 내 용의 ‘장릉추숭론(章陵追崇論)’을 비롯하여 김장 생,정경세,장유,윤방,신흠등의예론에대해논변 하는 글들이 실려있다. ‘주역건곤괘(周易乾坤卦)’, ‘논어(論語)’, ‘중용(中庸)’, ‘근사록(近思錄)’ 등 4 종의 책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을 뽑아내 어나름의해석을한내용이다. 책의 마지막에는 부록으로 박필주가 지은 시장 (諡狀)이 실려있다. 시장의 판심(版心)에 ‘券十’ 이라 되어 있어 마치 권10에 차록(箚錄)과 시장 을 함께 수록한 것처럼 보인다. 권말에는 1766년 박명양이지은발문이있다. 아산의 인산서원(오현서원)은 1610년(광해군 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 (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19년(광해군 11)홍가신 (洪可臣)을, 1668년(현종 9)에 기준(奇遵)·이지 함(李之 )·이덕민(李德敏)·박지계(朴知誡) 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 을담당하였다. 그러나 인산서원은 아산시 지역 최초의 서원이 자 가장 대표적 서원이었지만 관련 사실들이 기 록된 자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극히 제한적 이어서지금까지일부사실만알려져있다. 인산서원(仁山書院)은 염치읍 서원리 155번지 에 그 터가 남아있다.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 에는 아산현의 서남8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현재 서원 터의 위치가 일치하는 것을 창건이후 한번 도 이건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 서인지 서원의 터가 ‘서원리’, ‘서원재’, ‘서원골’ 로불러지고있다. 인산서원은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跡, 175 9~1763)’, ‘서원가고(書院可攷)’에는 ‘五賢書院’ 이라고 되어 있으나, ‘조두록(俎豆錄·정조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782)’와 ‘동국원 우록(東國院宇錄)’에는 ‘인산서원(仁山書院)’이 라고 되어 있다. 이는 ‘열읍원우사적’에 실려있는 ‘아산현 원우사실성책(牙山縣院宇事實成冊’이 1 759년에 작성된 점에 비추어볼 때 우너래 오현서 원이라 하였는데 그 뒤 언제부터인가 지명을 따 라‘인산서원’이라부르게된듯하다. 인산서원은 세 번의 사액 청구소를 올렸으나 사액을 받지 못했다. 1차 사액요청은 1669년(현 종10) 4월로 당시 청액상소의 전문은 전해지지 않으며, 누가 올린것인지도 정확하지가 않다. 기 록상 확인되는 ‘서원등록’에 보이는 것으로 아산 현의 오현신을 합향 한 서원에 사액하는 것을 시 행하지말라는건으로기록되어있다. 이로부터 13년 뒤인 1682년(숙종8) 3월에도 2 차 오현서원에 사액을 청원하는 상소가 올려진 다. 그리고 세 번째 상소는 1717년 이다. 이에 의 하면 오현서원은 만력 경술년(1610)에 본현 유생 들이 사적으로 창건하여 5현을 주벽으로 제향하 다가 그후 5선생을 추배하였으나 년대는 기록되 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정유년(1717, 숙종43) 숙종께서 온재시(溫宰時) 본현의 유생들이 청액 소를 올렸으나 승정원이 왕이 인정하여 몸을 조 섭하고 계시므로 봉입하지 않아 결국 사액을 받 지못하였다고이록하고있다. 인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1871(고 종8)에 훼철된 뒤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였다. 인 산 서원 터 를 보면 규 모가 아주 큰 편은 아 니었 으나 사우,내삼문,동·서재,강당,그리고 고직사등의건 물 들이 현 재의 터 에 규모 나 흔적 으로 비 교적 잘 남 아있다고 본다. 가능하면 하루빨리 인산서원 유적 의 기 초 발굴 조사 가 이루 어지 면 그 행태 나 시설 규 모는더욱명확하게알려질수있을것이다. 서 원 의 복 원 과 이 를 통 한 문 화 활 용 은 지 역 사 회에서의 서원이 가진 본연의 기능과 역할, 그리 고 역사적 의미와 변천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산과 인산서원 의 문화유산 특성이 분명 되짚어져야 하고, 이를 토대로 향후 서원 활용에서는 지역 특성과 수요 층과 콘텐트 활용을 경쟁력과 차별성이 있도록 적극적이고 적합하게 대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이해준공주대명예교수] 함양박씨 잠야공파종친회(회장 면용)와 순천 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소장 박동성)는 지난 1 월 26일 협약식을 갖고 아산의 유학자인 잠야 박 지계선생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 등을 개최하고 인산서원을 발굴 복원함을 목적으로 상호 긴밀히 협력키로 하였다. 그리고 이번 학술대회는 ‘코로 나19’의엄숙함속에서도성황리에마쳤다. 국내 유수의 대학에 재직 중인 학자들이 많은 자료를 찾아내 발표한 자료집은 잠야 선생을 재 조명하는데 큰 도움이 될 듯 싶다. 이날 학술대회 는 역사적인 고찰,철학적인 삶,그리고 문학을 재 조명함으로서 잠야 선생을 더욱 현창하는데 앞장 섰다는평가가뒤따른다. 잠야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격동기인 인 조대의 정치적상황과 그것이 뒷날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고,원종추숭과정에서 그의 역할을 살펴 보았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당시에 갖는 성격이 나 그것이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 구 가 이 어 지 길 기 대 해 본 다 . /글 정리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 il.net) 인산서원과잠야박지계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잠야박지계의삶과행적 지난달25일학술대회에서발표자와토론자들이열띤토론을이어가고있다. 잠야박지계의생애와학문정신 아산인산서원과잠야박지계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