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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4월30일 금요일 12 (제172호) 기획 영해박씨는충의·정절·효행·염절의가문이라한다.이는 신라실성왕때왕의아들인미사흔(未斯欣)을구하려 다붙잡혀“차라리계림의개돼 지가될지언정왜국의신하가되지는않겠다.차라리계림의매질을당할지언정왜국의벼슬을받지는않겠다 . ”충절을보인관설당박제상선 생과남편을기다리며먼왜국을향해통곡하다몸이그대로화석으로굳어망부석(望夫石)이된국대부인(國大 夫人)의정절,어머니와함께한 큰딸아기(阿奇),막내딸아경(阿慶)의효행,청빈(淸貧)하게살며거문고를즐겼고의복이남루하여백군데나 기운누더기옷을입었던백결선 생(百結先生)의염절은몇번을듣고또들어도우리에게교훈이된다.이에그의57세손초당박순일현종이보 내온자료를소개해본다. 박순일현종 영해박씨 시조(寧海 朴氏始祖)는 신라시조 대왕(新羅始祖大王)이 신 박혁거세(朴赫居世) 의 9 세 손 인 박 제 상 (朴 堤上, 363~419)으로 호 (號)는 관설당(觀雪堂), 시호(諡號)는 충렬공 (忠烈公)이며, 벼슬은 대아찬(大阿 豫)에 추증 (追贈)되었다. 공(公)은 파진찬(波 珍豫) 물품(物品)의 장 자(長子)로 태어나 굳세 고 용렬(勇烈)하였으며 육예(六藝, 禮樂射御書 數 )를 고 루 익 혀 문 무 를 겸비하였다. 금교김씨 (金校金氏)와 혼인하여 아 기 ( 阿 奇 ) , 아 영 ( 阿 榮), 아경(阿慶) 등 삼녀 (三女)와 아들 문량(文 良)을 낳았으며,벼슬길에 나아가 삽량주(揷良州, 지금의경상도양산)의간(干,태수)이되었다. 신라의 18대왕인 실성왕(實聖王)은 내물왕(奈 勿王, 17대왕)의 아들인 미사흔(未斯欣)과 복호 (卜好)를 각각 왜국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실 성 왕 은 고 구 려 의 힘 을 빌 어 내 물 왕 의 장 자 인 눌지(訥祗)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눌 지는 오히려 실성왕을 제거하고 신라의 19대왕으 로등극하였다. 눌지왕은 고구려와 일본에 억류된 두 아우를 그리워하여 신하를 여러 차례 보내 귀환을 요구 하였으나 번 번히 거절당했다. 눌지왕은 신하들 을불러물었다. “나의 두 아우가 왜와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로 가서 여러 해가 되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 제간인 까닭에 그리운 생각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그들을 살아 돌아오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 기를,“신들은 삽량주 간 제상이 굳세고 용감하며 지모가 있다 들었습니다. 그가 전하의 근심을 풀 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당시 공의 나이 57세였다. 이에 눌지왕은 공을 불러 나오게 하여 신하의 말을 전해주고, 고구려로 가주기를 요청하였다. 공은 예를 갖추어 고구려로 들어가서 고구려왕에 게말했다. “신이 듣건대 이웃나라와 교유하는 도리는 정 성과 믿음뿐이라고 합니다. 볼모를 교환하는 일 은 오패(五 , 중국 춘추시대 제후의 5맹주, 이 들은 이익이 된다면 의롭지 않은 것도 쉽게 해서 유교에서는 높이 따지지 않음)만도 못한 것이니 실로말세의일입니다. 지금 저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 은 지 거의 10년이 됩니다. 저희 임금은 할미새가 들판에 있는 듯이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있습니 다. 만약 대왕께서 은혜롭게 그를 돌려보내 주신 다면 이는 마치 아홉 마리 소에서 터럭이 하나 빠 진 것과 같아 손해될 것이 없고,저희 임금이 대왕 께 입는 은덕은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왕께 서는 이 점을 살펴주소서!” 하고 고하자, 고구려 왕은 공의 충의와 외교수완에 깊이 감복하여 복 호와함께돌아가는것을허락하였다. 눌지왕은 복호와 함께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 하고노고를위로하며말했다. “나는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팔처럼 했는 데, 지금 다만 한 팔만 얻었으니 어찌 해야 하는 가?” “신이 비록 재주가 노둔하나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끝까지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 다.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그 왕 또한 어진 임금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마디 말로써 그를 깨 닫게 할 수 있었으나, 왜인(倭人)은 말로써 깨우 칠 수 없으니 속임수를 써야 왕자를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신이 저 곳에 가거든 신이 나라 를 배반하였다는 이야기를 퍼뜨려서 저들이 그 소문을듣게하소서.” 공은 이에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식도 만나지 않은 채 율포(栗浦, 지금의 경주군 남양면 하서 리)로 가서 배를 타고 왜로 향하였다. 공의 아내 가 이 소식을 듣고 포구로 달려와 배를 바라보면 크게통곡하고말했다. “잘다녀오십시오.” 공이돌아보면서말했다. “내가 명을 받들어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당신은다시만날것을기대하지마시오.” 드디어 곧바로 왜국에 들어가 마치 고국을 배 반하고 온 사람처럼 하였으나, 왜왕이 공을 의심 하였다. 그러나 공보다 백제인이 앞서 왜에 들어 와 참소하기를 ‘신라와 고구려가 왕의 나라를 침 입하려 모의한다.’ 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중 왜가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순찰하게 하 였는데, 때마침 고구려가 침입하고 아울러 왜의 순찰병을 잡아 죽였다. 이로 인하여 왜왕은 백제 인의 말을 사실로 여기게 되었고,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공의 집안 사람들을 가두었다는 소식을 듣자.공이정말배반자라고생각하였다. 이에 왜는 군대를 내어 신라를 습격하기로 하 고, 공과 미사흔을 장수로 삼아 길잡이가 되게 하 였다. 행렬이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자 왜의 여러 장수들이 신라를 멸한 뒤에는 공과 미사흔의 처 자를 잡아오고자 은밀히 의논하였다. 공이 이를 알고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면서 마치 물 고기와 오리를 잡는 것처럼 행동하니, 왜인들은 이를보고아무생각이없다고여겨기뻐하였다. 그러던 중 늦가을 아침 인시(寅時, 오전3~5시) 에 공이 집밖에 나와 보니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 앞도 분별하기 어렵자, 왜국을 탈출할 수 있는 좋 은 기회라 여기고, 몰래 미사흔을 깨워 배에 태우 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니 미사흔이 말했 다.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고 있는데 어찌 저혼자돌아가겠습니까?”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난다면 일이 성사되지 않을까염려됩니다.” 미사흔은 공의 목을 끌어안고 울며 작별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공은 방안에서 혼자 자고 늦게 야 일어나, 미사흔이 멀리 도망갈 수 있도록 하였 다. 여러 사람들이 ‘장군은 어찌 이리 일어나시는 게늦느냐?’고물으니,공이대답하였다. “어제 뱃놀이로 노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가 없 다.” 그가 밖으로 나와서야 왜인들은 미사흔이 도망 한 것을 알고,마침내 공을 포박하고 배를 달려 추 격하였으나 안개가 연기처럼 어두컴컴하게 끼어 시야(視野)가 미치지 못했다. 왜인들은 공을 붙 잡아 왜왕이 있는 곳에 돌려보내니, 왜왕이 심문 하여물었다. “너 는 어 찌 해 서 너 희 나 라 왕 자 를 몰 래 보 냈 느 냐?”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뿐인데, 내 어찌그대에게말을하겠는가?” 왜왕은화가나서말하였다. “지금 너는 이미 나의 신하이다.그런데도 계림 의 신하라고 한다면 반드시 온갖 형벌을 가하겠 지만, 만일 왜국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큰 상을 내 려주겠다.” 그러자공이말하였다.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 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매질을 당할 지언정왜국의벼슬을받지는않겠다.” 왕이 화가 나서 공의 발바닥 살갗을 벗겨내고 갈대를 베어놓고 그 위를 걷게 하고는 지금도 갈 대는 7월에 꽃대가 나오는데 마지막 잎을 보면 빨 간 점이 있는데,세간에서는 공의 피라고 한다.다 시 물 었 다 . “너는어는나라신하인고?” “계림의신하이다.” 그러자 또다시 뜨거운 철판위에 세우고는 어느 나라신하인지물었다. “계림의신하이다.” 왜왕은 공의 충성심을 절대 굴복시킬 수 없다 는 사실을 깨닫고, 목도(木島, 지금의 대마도)에 서 공 을 불 에 태 워 재 가 되 게 하 였 다 . 그 러 자 맑 은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리치고 이에 놀란 왜왕은 졸도하고 악형(惡刑)을 수행하던 형졸 들이 모두 피를토하고죽었다고한다. 눌지왕은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공의 충 절을 높이 치하하여 공에게 대아찬을 추증하고 충렬공의 시호를 내렸으며 단양군(丹陽君, 단양 은 지금의 寧海)에 추봉하였고 공의 둘째 딸을 데 려다가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함으로써 은혜에 보답하였다. 시종조 할아버님의 고귀한 생애는 이렇게 처참 하고 장렬하게 순국하시어 하늘보다도 높은 충절 로후손들에유훈을남기셨다. 앞서 공께서 왜국으로 떠날 때, 부인은 그 소식 을 듣 고 뒤 륍 아 갔 으 나 끝 내 공 을 따 라 잡 지 못 한 채 망덕사(望德寺) 절 문 남쪽의 모랫벌에 누워 길게 울부짖었으며, 후에 그 모랫 벌을 장사(長 沙)라고 이름 하였다. 친척 두 사람이 겨우 그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부인은 펄썩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일어나려 들지 않았다. 부 인이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버린 곳, 그곳을 벌지 지(伐知旨,뻗치다의옛말)라이름하였다. 오랜 뒤에도 부인은 공을 향한 그리움을 억누 를 길 없어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 述嶺) 고 개 위에 올라가서 바다 건너 아득히 먼 왜국을 바 라보며 힘이 다하도록 통곡하다 몸은 그대로 화 석 으 로 굳 어 망 부 석 (望 夫 石 )이 되 었 으 며 넋 은 새 가 되었는데 이를 치술3조( 述三鳥)라 불렀 다.치술3조는 목도에서 순절하신 공의 영혼을 모 셔왔다고한다. 치술 3조는 은을암(隱乙菴)에 머물러 치술신 모 ( 述神母)로 추앙받았다. 나라에서는 이를 기려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봉하고 치 술신모사( 述神母祠)를 지어 제사지냈으며, 후손들에게정렬(貞烈)의도리를전래케하였다. 공의 큰 딸 아기(阿奇), 막내딸 아경(阿慶) 또 한 어머니이신 치술신모를 받들어 모시고 치술령 에 올라 목도에서 산화하신 아버지를 목놓아 외 치고 치술가인 간간수월래(看看水越來)를 부르 며 통곡을 하다 화석이 되니 망부석 좌우에 두 돌 이 되었다.2女인 아영(阿榮)은 내마저 따라 죽으 면 부 모 와 동 생 을 누 가 묻 어 주 며 또 동 생 문 량 (文 良 ) 을 누 가 양 육 하 랴 하 고 죽 지 않 고 5 세 의 어 린 동생과 함께 걸인 생활을 하다가 눌지왕의 배려 로후에눌지왕의동생인미사흔과혼인하였다. 충렬공의 장자인 문량 (文良)은 5세에 양친과 누나를 잃고 졸지에 천 애고아(天涯孤兒)가 되 었으며 둘째누나인 아영 (阿榮)의 보호로 성장하 였다. 천성이 청렴결백 (淸廉潔白)하여 항상 가 난 속에서 청빈(淸貧)하 게 살며 거문고를 즐겼 고 의복이 남루하여 백 군데나 기운 누더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사람들 이그를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불렀다. 자비왕(慈悲王, 제20대 왕) 21년인 478년, 이찬 (伊飡)의 벼슬에 올랐으나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 음을 개탄하여 천재(天災)·치폐(治弊)·처경(處 境)·흥인(興人)·지인(知人)·화인(化人)등 여섯 장 ( 章 )의 상 소 문 을 올 리 니 이 상 소 문 은 너 무 도 유명하여 많은 선비들이 따랐다. 그리고는 모든 관직을 떠나 향리(鄕里)로 돌아갔는데,이 때 <낙 천악(樂天樂)>이라는 귀향곡(歸鄕曲)을 지어 불 렀다. 어느해 섣달 그믐날 사방에서 떡방아를 찧는 소리가 요란하였으나 선생의 집안은 여의치 않아 부인이말하길 “남들은 곡식이 풍부하여 떡방아를 찧는데, 우 리는 당장 먹을 양식조차 없으니 어찌할꼬” 하며 탄식하자,그는태연하게 “사람에게는 수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것 이 니 오 게 되 면 받 는 것 이 요 , 가 게 되 면 막 을 수 없는것인데부인은왜쓸데없는걱정을하시오” 하며 거문고를 당겨 방아소리를 구성지게 내어 부인을 위로하였다. 이 방아타령은 우식곡( 憂息 曲 , 눌 지 왕 이 무 사 히 귀 환 한 두 아 우 를 맞 이 하 는 잔치에서 지어 불렀다는 가요)을 대신하여 서라 벌에 온통 퍼져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충효열염(忠孝烈廉) 은 시종조 할아버님의 유훈(遺 訓)이므로 우리 후손들은 박정 신(朴精神)의 신념(信念)으로 간직하여야 함을 역설하는 바 입니다. /자료제공박순일현종 영해박씨세적(충의·정절·효행·염절 ) 선조 유지를찾아븣 - 忠 義 - 만화신라김경선글최병용그림,박순일제공. 관설당박제상존영. 오륜행실도,제상충열. 백결선생박문량존영. -貞烈- -孝行- -廉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