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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월31일 일요일 12 (제169호) 기획 임진왜란에적국에파견되는통신부사는지략을겸비하고충성심이높은무장을뽑아야하는데선조임금을 비롯한조정에서는많은고민에빠졌다.그 러나조선에는무장박홍장이있어부사로서임무를훌륭히수행할수있었다.조선의대표적인무장이라할수 있겠다. 박홍장은무장으로서함경도북병사이일의군관으로니탕개의난을수습하였고,제주판관재직시임진왜란 을맞았다.제주조방장,영암군수,대구부 사를역임하면서전략적요충지를굳게지킴은물론민심을안착시키고군량을안정적으로확보하였으며,15 96년(선조29)통신사부사로일본으로건너 가왜군수뇌부의동향과외교적교섭상황을선조에게비밀리에보고하는등재침(정유재란)의조짐을알렸다 . 혼란기에빠진대구부를안정시키고둔전(屯田)을두어군량미를생산하는데공헌함으로써부민들이재차방 백으로임명해줄것을요청하기도해그의 선정을짐작해볼수있다.이에충절의가풍에서면면히이어져온충성심과높은학문에서비롯된애민사상을 지닌박홍장선생에대해살펴본다. ▶충절의무신가문에서태어난박홍장 박홍장(朴弘長, 1558~1598)의 본관은 무안(務 安)으로 자(字)는 사임(士任), 호는 농아당(聾啞 堂)이다. 1558년(명종13) 경북 영해 원구리 본가 에서 무과에 급제한 아버지 세렴(世廉)공과 어머 니 영양남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의공 휘 의장(毅長)의아우이기도하다. 무안박씨 영해파의 가문은 대대로 무과 급제자 를 다수 배출하였다. 입향조인 무안박씨 14세 지 몽(之夢, 홍장의 증조부)의 손자대인 16世에서 세현(世賢), 세렴(世廉), 세순(世淳) 등 3명의 무 과급제자를 배출하였고,17世에도 효장(孝長) 의 장(毅長),홍장(弘長),18世에 응원,거,근.유,륵 등 5명이 무과급제하면서 절정을 이루었고, 이들 모두충성스런활약으로가문의명성을이었다. 박홍장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말을 배우기 시작 하면서부터 말이 분명하고 영민했다. 아버지(휘 세렴, 1535~1593)에게 책을 갖고 와서 글을 배우 고 싶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들의 재주가 일찍 드 러나면 좋지 않을까 염려되어 여덟 살이 되어서 야 글을 배우게 했다. 항상 책을 가까이하며 병서 와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특히 소학(小 學)을 가까이 하면서 자신을 조절하고 타인을 배 려하는 습관을 내면화하는 데 힘써왔다. 특히 초 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하고 글짓기를 잘해 학문과무예를겸비하게된다. 무신의 가문으로 일찍이 국왕의 신변보호와 왕 궁 호위 등을 맡은 겸사복(兼司僕)으로 있으면서 1580년(선조13) 23세에 별시무과에서 병과 22위 로급제하였다.전체등수는총44명중30등이다. ▶북방에서이탕개의난수습에공헌하다. 박홍장은 무과에 급제한 뒤로 임진왜란에 까지 여 러 관직을 역임했다. 아이진 만호, 평안병사 이전 군 관,북병사이일군관,선전관,제주판관등을거쳤다. 1586년 북병사 이일의 군관으로 재직시는 두만 강 유역의 여진인 니탕개(尼湯介)의 난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니탕개의 난은 조선 6진 회령 지방에서 야인여진의 니탕개가 일으킨 난이 다. 두만강 방면의 추장 니탕개가 선조 초부터 예 의를 갖추며 6진을 자주 드나들자 조정에서는 그 에게 관록을 주고 후대했다. 그러나 1583년 1월, 인근 여진의 여러 부가 진장의 대우가 좋지 않다 는 이유로 경원부로 침입해 아산·안동의 각 보를 점령하는등난을일으킨것이다.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 도 수군절도사로 있은 이일을 그해 4월 함경도 경 원부사로 임명되면서 함경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이일은 니탕개의 난을 수습하는 등 공로로 함경도북병사로부임하게되었다. 북병사 이일은 여진 방어책을 마련하기 위해 ‘적로의 형세와 부락의 다소와 산천의 험악과 평 탄,도로의 멀고 가까움,성을 지키는 절차와 적을 추격하고 요격하는 등의 일’을 틈나는 대로 순찰 하면서 조사해 북방지역에 적합한 제승방략을 마 련했다. 이일이 완성한 제승방략(制勝方略)은 유 사시에 북도의 병마절도사를 중심으로 도내의 전 체 병력을 동원하는 체제였다. 북방의 제승방략 은 현지 병마절도사가 중심이 되었다며, 북방의 제승방략은 현지 병마절도사가 중심이 되어 군사 를통솔했다는차이점이있다. 1588년 이일은 장계를 올려 선조에게 본인이 연구 한 제승방략이 담긴 책자를 바치면서 제승방략을 시 행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장계의 끝에 “(이 책자 를) 소신의 군관 훈련원 참군 박홍장에게 잘 주어서 올려 보내도록 하였습니다.”고 적었다. 당시 제승방 략이담긴책자를갖고서울로간군관이바로박홍장 이었다.박홍장이 이일의 휘하에 있으면서 『제승방 략』을서울로갖다바쳤다는사실은아주의미심장 하다.이일은‘이일이아니면북방오랑캐를진압할 수 없 다.’고 할 정 도로 북 방의 이 름난 장 수였 다 . 이런 이일이 박홍장에게 제승방략이 담긴 책자 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는 점에서 박홍장에 대한이일의믿음을읽을수있다. 요컨 대 박 홍장 은 무 과 급 제 이후 북방 에서 보낸 세월이 길었다. 조선의 최전방지역에서 근무한 후 중 앙으 로 돌아 와 무반 청 요직 이라 할 수 있 는 선전 관 (宣傳官)을 거 쳐 제 주 판관 에 임명 되었 던 것이 다.예나지금이나공직에서승진할수있는것은공 적을 우선하기에 박홍장이 북방에서 이일의 군관 으로 니탕개의 난을 수습하고 제승방략을 세우는 등 그 에 상응 한 역할 이 있었 음을 보 여주 는 것 이다 . ▶임진왜란과박홍장장군 박홍장은 임진왜란 중에 제주조방장(1592, 35세), 영암군수(1594,37세),대구부사(~1596.6),상호군(159 6),일본통신부사,순천부사, 상주 목사 및 상주진 병 마첨절제사(1597) 등을 지냈다. 호남은 곡창지대로 호남에서 군량미를 보급하는 길목인 영암군수,대구 와 순천은 왜군들의 주요 전력요충지이기에 박홍장 장군의업적이두드러져상세히소개해본다. △제주판관시절의박홍장 박홍장이 제주와 인연을 맺은 때는 32세로 1589년 (선조22) 10월이었다. 제주 판관으로 임명된 박홍장 은 30개월을 근무하고 1592년 3월에 임기를 마치고 후임으로양집이부임하였으나,육지로나올무렵에 임진전쟁이 발발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되 어 다시 제주에 남게 되었다. 이로써 제주에 머무른 기간만 5년이었다.이는 군사 경력을 높이 사 전략적 비중이높은제주를방어하고자한것이다. 박홍장은 바로 제주목의 판관(종5품)으로 부 임하였다. 제주판관은 제주도에서 목사 다음의 지위로써 제주목사를 보좌하여 일반 행정과 교 육,군사,목장등의일을관장하는직책이었다. 제주판관시절 매일 낮에는 활쏘기를 연습하고 밤 에는항상손에책을놓지않았다.특히소학(小學)을 좋아하여 유교 윤리관을 체득하며 임금에게는 충성 을부모에게는지극한효사상을돈독이하였다. 제주판관시절 그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한양에 있는 왕자(王子) 한사람이 하인을 시켜 말을 사오게 했다.이 과정에 서 하인이 왕자의 권세를 믿고 백성들을 혹심하게 괴롭혔다.하지만관청(官廳)에서는왕자의위세가 두려워 말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박홍장이 그 하인의 죄를 분명하게 다스려 용서하지 않았다. 당 시 제주 백 성들 은 박홍 장이 큰 화 를 당하 지 않을 까 우려 했으 나 아무 일 도 일어 나지 않 았다 . 왜군의 북상으로 관군이 각처에서 패하고 선조 임금이 몽진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박홍장은 “임금이 피난을 떠났는데 어찌 신하로서 편하게 지낼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전쟁에 신 속하게대처해나갔다. 전쟁중에제일필요로 하는말의확보이다.박홍 장은 조방장으로 제주목사를 보좌하며 이를 훌륭 하게 해낸 가운데 아버지(휘 세렴)의 부음(1593년 12월)을 받고제주를 떠나면서본인이 훌륭하게훈 련시킨 말들을 데리고 나와 1595년 7월에 강원·충 청·전라·경상도의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 이원익이 영남에서 군사를 소집하여 훈련시킬 때 대구부사로 재직 중이던 박홍장은 중군(中軍)이 되어 이 말 들을 유 용하 게 사용 할 수 있 었다 . 제주도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제주의 백성들이 더 남아있기를 희망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백성 중 한벽재(寒碧齋) 공(公)은 다음과 같은시를남기며전송했다. 『큰포부떨치려남쪽으로가는/대장부의풍채 찬란하도다/ 백리를 다스린 명성 소신신((召信 臣, 전한 후기의 학자)과 두보보다 가볍지 않고/ 웅대한 군사 방략은 손자나 오자도 무시하지 못 하 리 / 지 난 몇 년 사 귄 두 터 운 우정에/ 장협가 부 르니 누가 고기 없다고 탄식 하겠는가/ 제주도의 오이가 익어갈 쯤이 마침 임기를 마칠 때라/한가 락이별가에흐르는눈물은수염까지적시네.』 註- 장협가:전국시대 제나라 풍환이 맹상군의 식객이 되어 밥상에 고기반찬이 없자 장검의 칼 자루를 두드리면서 ‘장검이여 돌아가자 밥상에 고기없으니’라고노래했다는고사가있다. ▶애민농상으로대구부를살리다. 박홍장 장군은 1594년 7월 제주를 출발해 천신 만고 끝에 해남에 도착하자 영암군수에 임명되었 다 . 영암은 호남지역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군 량미의보급기지로 임진왜란에중요한기지이기도 하다.2개월여 근무를 그의 벗 황여일(문신,1556~1 622)은 박홍 장이 영 암군 수로 재 임할 때 에 걸림 없 이 다스 렸다 고 평가 했다 . 그 러다 가 서애 유 성룡 의 추 천을 받아 대 구 부 사로 옮 기게 되었 다. 서애 유 성 룡은 1595년(선조29)에 인진왜란의 방어와 수비에 대하여 마땅히 조치해야 할 일을 임금에게 고하면 서 대 구부 의 중요 성과 이 를 위해 박홍 장의 중 요함 을다음과같이아뢰고,이를서애집에남겼다. 『대구는 서울로 가는 바른길이며 도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또 청도 사이는 땅이 매우 비옥합니 다. 금년에 농경을 크게 실시하여 흩어진 유민을 불러 모으면 진(鎭)을 이루어서 후일을 위한 도 모가 될 것입니다. 신임 부사 박홍장(朴弘長)은 박의장(朴毅長)의 아우로 무사 중에 유명한 자입 니다. 다른 일은 시키지 말고 본부를 수리하고 기 르는 일에만 전념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찰사 에게 농우와 종자를 별도로 조치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또 청도·밀양·산촌의 요충지에는 경 기의 예에 따라 따로 둔보(屯堡)를 설치하고, 본 고장의 용감하고 힘센 일을 맡길 만한 사람으로 서 둔장(屯長)을 삼아 농사도 짓고 방비도 하다 가 왜적이 오면 서로 버티면서 형세를 연결하여, 좌우도의 기맥을 통하게 할 일로 급히 하유하소 서. 그리고 의령, 사천, 고령, 함안 등에 금년 농작 을 권하는 일, 또는 둔전 일에 대해 모두 충분히 조치하여때를잃지않게함이어떻겠습니까?』 전쟁으로피폐해진대구를살려낼수인물로박홍장 을꼽았으니,실제로박홍장은농사에도상당한조예가 있었고또이를서애유성룡이알고있었던것이다. 박홍장의 임무는 후일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군사 요충지로 소생시키는 일과 부민의 안정과 군 량확보를 위해 군사요지 부근에 땅을 개간하여 둔 전(屯田)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이를 훌륭히 처리 하 여 수 만석 의 식량 을 얻는 등 믿 음을 변 치 않았 다. 훗 날 형 박의 장의 손 녀사 위 이휘 일(李徽逸,1619~16 72)은 박홍장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뒷받침하고 있 다. ‘공이 마음과 힘을 다하여 병들고 가난한 백성 을 잘 보 듬었 다. 이에 백성 을 모아 둔 전을 일 구기 위 해 이 웃고 을에 씨 앗으 로 쓸 양곡 약 간을 빌 려서 종 자를 삼았다. 군사들에게 먹일 죽과 간장을 실어서 손수 먹이고 농사를 감독하니 드디어 가을에 크게 여물어3천여석을수확했다.이것을비축하여명나 라 군 사를 대 접하 고 굶주 린 백성 을 먹이 니 우뚝 동 남쪽의 거진(巨鎭, 절제사와 첨절제사 진영)이 되 어적의허리와목을누르듯하였다.’라고썼다. 당시 대구부의 부민들은 박홍장이 대구의 재건을 위해 전력투구한 사실을 알고 박홍장이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에도 대구부의 부민들이 조정에 대 구부사로 재임시켜달라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으니 박홍장의 애민정신은 피폐해진 대구부를 살린 것이 니 부민들의 간절한 원함으로 이어진 것이다. ▶전쟁중통신부사로일본에가다. 1596년 당시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소강상태였 다. 1593년 1월 제2차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 연 합군이 승리한 이후부터 정 유재란이 발발하기 전인 159 6년 12월까지 약 4년 동안은 전 쟁 의 휴 지 기 라 할 수 있 다 . 명과 일본이 각각 자국의 입 장에서 이해타산을 따지면 서 이 전쟁은 조선의 입장과 달리 강화교섭이 진행되면 서 외교전이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 조선시대 문신 이정형이 고려후기부터 조선 선 조 때까지 정치와 명신들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 서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당시의 상황이 잘 기록 되어있어인용해본다. 『경략(經略) - 송응창(宋應昌)이 사용재(謝用 梓)와 서일관(徐一貫)을 사절(使節)로 삼아 보 내었더니,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그들을 심히 소홀히 대우하고, 다만 포로 되었던 왕자 임해군 (臨海君) · 순화군(順和君) 및 황정욱(黃廷彧) · 황혁(黃赫) 등을 돌려보내었다. 오랜 뒤에 적장 행장 등이 소리치기를, “명나라에서 만약 강화를 허락하여 책봉하는 조사(詔使)를 보낸다면 우리 는 군사를 철퇴시키겠다.”하였다.심유경이 또 왕 래하여 명나라에 그 말을 전하니, 명나라에서 임 회후(臨淮侯) 이종성(李宗誠)을 상사(上使)로 삼고, 총병 양방형(楊方亨)을 부사로 삼아서 보 내었다. 그들이 부산 왜적의 진영에 들어가자 수 길(秀吉)이 영접하는 사자를 보내지 아니하고, 또돌아가는것도허락하지아니하였다. 이 종 성 등 이 부 산 왜 적 의 진 영 에 체 류 된 지 거 의 1년이 되었다. 어떤 이가 비밀리에 왜적이 호 의가 없어 사신을 구류하려 한다고 하니, 이종성 이 몰래 도망하여 급히 달려 경성에 도착하였다. 온 나라가 놀래어 왜적이 이종성을 추격하여 덤 빌까 의심하였더니, 적이 마침내 움직이지 않고 다만 양방형을 엄중히 감시할 뿐이었다. 양방형 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연유를 아뢰니,이에 이 종성을 잡아 가고 양방형을 상사(上使)에 승진시 키고,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서 그 일을 완성하도 록 하였다. 수길의 거처하는 곳에 도착하자 수길 이 극히 무례하게 대접하고 말하기를,“만약 황녀 (皇女)를 일본으로 시집보내기를 허락한다면 강 화 가 될 수 있 다 .”하 였 다 . 명 나 라 병 부 ( 兵 部 )에 서 우리나라에 대하여서도 일본에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기에, 이에 황신(黃 愼)을 상사로 삼고, 무관 박홍장(朴弘長)을 부사 로삼아양방형등을따라가게하였다.』 이같은사실에미루어당시의외교전은국가간실 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기에 당시 일본으로 떠나 는통신사일행의막중한임무는짐작해볼만하다. 그러나조정에서는정사로황신(黃愼)을정하였으 니부사를정하지못했다.이는가장믿을만한무장을 선발하여야했기에결국충절의가풍에서문무(文武 가다듬어진무신박홍장을선발한것이다. 박홍장은 일본에 도착하자 정보를 수집 경상도 관찰사를 통해 수시로 선조임금에게 전해졌다. 선 조 는 이 보고 서를 토 대로 명 에 왜군 의 재침 가 능성 을 알 렸고 , 이 원익 을 부산 으로 파 견 재침 에 대비 토 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의 태도는 오만불손해서 조 선에 서 왕자 를 보내 사 례하 지 않는 다며 트 집을 잡아 조선국왕의 국서를 받지 않는 등 수길이 더욱 멸시하여 국서(國書)에 답하지 않았고, 통신사의 신 변에 큰 위 협을 가 하고 있어 통 신사 일행 은 국가 의체면을욕되게하지않고돌아왔다.박홍장은당 시 의 상황 을 적은 동 사록 (東 汎 錄)을남겼다. ▶일본에서돌아온지40일만에세상을뜨다 박홍장이 일본에 통신부사로 다녀온 기간은 약 5개월이었다. 1596년 윤 8월4일 부산을 출발하여 11월 23일에 돌아왔다. 통신사의 길은 말로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고행의 길이다. 파도 와 싸워야 했고, 명나라와 조선, 그리고 일본과의 외교적 협상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였기 에대부분병을얻기십상이다. 통신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 후 전라도 순 천부사로 임명되었다.그렇지만 대구부의 부민들 은 대구부사 유임을 상소하여 대구부사로 돌아가 게 되었고, 이후 상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환 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41세의 젊은 나이로 꿈을 펴지못하고영면하게되었다. 무신의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국왕의 신변보호와 왕궁 호위 등을 맡은 겸사복(兼司僕) 으로 발탁되었고, 무과에 급제 후 함경도 지방의 군관으로니탕개의 난을수습하는데공헌하고,영 암군수, 대구 부사로 훌륭한 목민관으로 가는 곳 마다 선정을 펼쳤고, 통신부사로 일본에가 정보 수집을 통해 재침을 알려 1598년 8월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에 종지부를 찍 을 수 있었으며, 선생은 1665년(현종6) 지방유림 의 공의로 영덕 원구리의 구봉서원에 배향되고, 이후부조지전(不 튐之典,부조묘)이내려졌다. ▶맺음말 박홍 장 선 생의 생애 를 보면 고초 가 많 았던 인물 로기록될것이다.1580년23세의나이로무과에급 제하여 1598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실로온갖풍상을겪었다.그러나세상을떠나고났 을 때에 남아있는 물건이라곤 말 3필,활과 화살 두 어 상자뿐이었다고 한다. 대략 일본 통신사로 가면 푸짐한 선물을 제공 받는다. 그러나 박홍장은 강직 한 성 품으 로 많은 선 물을 물리 치고 오 로지 일 본도 2자루만 가지고 나왔다.아마도 무장으로서 조선의 칼과 비교하려 했을 것으로 청렴한 그의 성격을 대 변하는대목이기도하다. 학사 김응조(1587~1667)는 묘갈(墓碣)에서 “어 지러운국난을당해그충성은금석을뚫었고그용 기는 삼군(三軍)에 으뜸이라! 난리를 평정하고 위 태로움을 부지하는 것이 그의 본분이어늘 변란의 당시에는 몸이 해외에 머물렀고, 사신에서 돌아오 자 하 늘이 그 의 목숨 을 빼앗 아서 뜻 을 펴지 못 하고 재 주를 알 리지 못 했으 니 하늘 의 뜻 은 과연 무 엇이 었던가?”하면서그죽음을안타까워했다. 조선통신사 부사로 간 박홍장 선생이 체류 중 보고 듣고 경험한 일을 기록한 ‘동사록(東 汎錄) 이 1999년 발견되었다. 이를 보면 통신사행의 주 요행적, 게이죠 대지진의 피해상황과 여진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 일본에서도 일급 사료로 평가 받는다. 이처럼 선생의 생애는 조선은 물론 적국 일본까지도중요한인물로기록된다. 선생의 사후 영해부의 사림(士林)은 선생의 유덕 을기리기위해영덕군영해면원구리서편구봉산아 래에 사당 정충사(精忠祠)를 건립하여 제향을 모셨 고,1666년(현종7)구봉정사(九峯精舍)로 이름이 바 뀌면서 형 무의공(휘 의장)이 추배되었다. 이후 무 의공이 시호를 받은 이듬해인 1785년(정조9)에 구 봉정사는 서원으로 승격되고 사우(祠宇)는 불천지 위(不遷之位,부조묘)로명(命)되었으나대원군의 철폐령에의해훼철되어후손들은농아당종택(경북 문화재자료 제320호)으로 묘우를 이건하여 향화를 받들었으나 1960년 12월 화재로 소실되어 지난 해 11 월18일(음10.4) 60년만에복원되었다. 그리고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에서 선생의 업적을 조사한 연구 총서가 발간되는 등 현창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선생의 삶을 돌 아보고 재조명 할 수 있어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충절과 목민관으로서의 삶과 정신 이 길이길이 이어지질 간절히 기대해 본다.(참고 문헌 박홍장 행장,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연구총 서,조선왕조실록,서애집,난중잡록,동각잡기)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임진란조선의무장박홍장 선조 유지를찾아븣 농아당종택전경-경북영덕군축산면칠성1길5-10,12(①부조묘정충사②농아당종택③농아당종택재실④농아당종택외삼문⑤ 농아당종택재실내삼문⑥관리사) 농아당종택(경상북도문화재자료제320호) 농아당종택재실 동 사록-일본 나고야 박 물관이소장하고있다. 농아당공묘소-영덕군영해면묘곡리(초수골) 농아당박홍장선생의부조묘.1960년12월화재로소실된농아 당(聾啞堂)박홍장(朴弘長)선생의묘우(廟宇,불천지위)정충사 (精忠祠)가지난해11월18일(음10.4)60년만에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