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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1월30일 월요일 12 (제167호) 기획 수서박선장(水西朴善長,1556~1616)선생은157제176수의시작품을남긴뛰어난시인이자문인으로더나아가효자 로도유명하다.노모를위해과거를포기하지 않았고,또스스로에게엄격하며수기(修己)에도치중하였다.‘엄중한도덕성’은그의생애전반을평가하는데빠질수 없는단어이다.벼슬을마치고돌아왔을때독 에쌀이한톨없을지경이었으니평생청렴한선비의길을걸으며성리학적법도를몸소실천한지성인이기도하다.벼 슬하는동안늘인재의필요성을강론하며후 진양성에전념하였으니21세기를살아가는우리들의사표(師表)로삼을만하여선생이남긴오륜가를덧붙여연대표를 근거로소개해본다. 수서水西박선장朴善長(1555-1616)의본관은무 안(務安), 자는 여인(汝仁), 호는 수서(水西)이다. 그의 선원세계를 보면 고려 때 국학전주(國學典 酒)를 지 낸 휘 진 승(進昇)은 관조 이고 , 이 분이 좌 복야(左僕射섬) 휘 섬(暹)을 낳았는데 현종(顯宗) 이 난리를 피해 옮겨 다닐 때 시종(始終) 한결같은 절개를 지켰다. 오세(五世)를 지나 재신(宰臣) 문 오(文晤)가 면성군(錦城君)에 봉해졌다. 조선조에 들어와 의룡(義龍)은 병조·호조·형조판서를 지냈 다. 의룡(義龍)은 강(綱)을 낳았다. 강(綱)은 형조 참판을역임했으니곧수서(水西)의육대조이다. 고조는 해(解)인데 연산군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 임하 다가 세 조가 조 카인 단 종으 로부 터 왕위 찬 탈을하는것을보고벼슬에뜻을버리고여주로퇴 거 일생을 마쳤다. 증조(曾祖)는 지몽(之蒙)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고 통훈대부(贈通訓 大夫)로 증직되었다. 그는 해(解) 공(公)의 4남중 둘째로 백부이신 평강공이 영해현령으로 부임할 때 종사관으로 수행하여 왔다가 영해와 인연을 맺 어 터를 잡 고 세 거, 대 대로 번성 하여 오 늘에 이 르렀 으 며 오늘 날 무안 박씨 영 해파 는 모두 공의 후 손들 이다. 조부(祖父)는 원기(元基)로 성균진사(成均 進士)를 역임했다. 부친 전(全)은 1546년(세종25)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정랑을 거쳐 북평 사(北評事)를 역임했다. 모친은 웅천(신안)주씨 (熊川朱氏)로 사직(司直)을 지낸 행(幸)의 따님이 며전적(典籍)선림(善林)의손녀이다. 수서 선생은 1555년(명종10)5월 11일에 경북 영 해부 익동리 집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수서를 잉태 했을 때 꿈에 이인(異人)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 이하나를주면서“이지팡이는하늘을받치는기둥 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윽고 수서를 낳았다.수서는 태 어나 면서 부터 영 리하 여 일반 아 이들 과 달라 부 친이매우기특해하며“우리집안은대대로일찍부 터 덕을 쌓 았더 니 이 제 그 보 답이 있 으려 나보 다”라 는 시를 지었 다. 또“자식 없으 면 없는 대로 걱정 하 고 있으 면 가르 치지 못할 까 걱정 스럽 네”라는 시 를 지었다.수서는자라나서매번이시를읽고슬피울 지 않 은 적이 없 었다 . 이 로부 터 얼 마 지나 지 않아 수 서 가 네 살(1558) 때 당시 부친 은 호조 정랑 직 을 수 행 하고 있 었는 데 한양 에서 별 세하 여 영해 부 여현 (輿峴)에오향(午向)언덕에반장(返葬)했다. 모친 주씨는 수서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교육을 받지 못해 학문을 이루지 못할 까 마음 아파했다. 남 편의 삼년상을 마치고 친정인 울진으로 이주해 오라 버니에게 부탁하여 수서를 가르치게 했다. 이로부터 몇 해가 지나 수서가 10세(1564) 때 어느 날 밤에 남편 이 꿈에 나타나 “영천(榮川)고을 남모(南某)가 글을 잘하고학문과덕행이뛰어나아들을가르칠만하다. 그가 사는 마을에 산단화(散丹花,명자나무)가 있어 자손이번성할것이니그를찾아가학업을청하라”고 알려주었다.이에모친은뜻을굳히고울진에서12령 을 넘어 현재 경북 영주(榮州)인 영천(榮川)으로 이 주했다.지금의봉화군봉화읍화천리이다.이때삼송 당(三松堂) 남몽오(南夢鰲, 1528-1591)는 그곳에서 서당을열고있었고수많은학동이몰려들었다. 이에 수서는 삼송당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 받 기를 시작하였다. 삼송당은 수서의 재주가 기특 하여 소학을 주면서 매일 학습 과정을 독려하였 다. 12세(1566) 때에 삼송당이 ‘연기 연[烟]’자 (字)로 연구(聯句)를 지으라고 했다. 수서는 “산 골 두어 집에 서 연 기 피네 ”라 고 했 다. 삼송 당은 또 서리 상[霜] 자로 연구를 지어보라고 했다. 수서는 “서리 힘으 로 어찌 할 수 없 어도 언 덕이 절로 비 네” 라고 하니 삼송당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삼송당 은수서가지은연구를소고(嘯皐)박승임朴承任(1 517-1587)에게 보여주자, 소고는 “기이하도다! 시 의 기상이 시원하고 시 의미가 맑고 깨끗하니 장차 크게 되리라”며 감탄하였다. 13세 때(1567)에 지녕 초 시 를 지 었는 데 이 를 지은 계기 는 일 찍이 고 문 격 사홀명(擊蛇笏銘)을 읽다가 ‘요임금 때 지녕초가 있었다’는대목에이르러감동을받아시를지었다. 14세(1568)에삼송당의장녀에게장가를들어화천 (花川)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17세(1571)에 심경 과 소학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시를 지었다. 당시 수서는 15세(1569)부터 사장(詞章)에 뜻을 두지 않 고 유교 경전의 가르침을 연구하며 실천했다. 그는 삼송 당을 통 해 선비 가 지닐 몸 가짐 의 큰 방도 를 배 웠고 모친으로부터 몸가짐과 삼가는 행동의 가르 침을 받았다. 19세(1573)에 장남 경(璥)이 태어났 다.22세(1576)10월에차남한이태어났다. 23세(1577)에 서애 류성룡(1542-1607)을 배알하 며 도의로서 교유하였다. 이에 앞서 부친이 북변에 서 공무를 수행할 때 관찰사 류중령(1515-1573)이 감군어사(監軍御使)로 북변을 순무(巡撫)했다. 부 친은 매일 그와 함께 종유하면서 시를 주고받은 적 이많았다.당시서애는의정부검의(議政府檢議)를 역임 하면 서 휴가 를 내어 양 친을 뵈 러 왔 기에 찾 아 가 뵈었다.25세(1579)에 이산서원(伊山書院)에 가 서 독서 하고 오는 길에 백암 김륵 (金 莉 ,1540-1616) 븡취수박록(朴륜, 1542-1632)븡죽유 오운(吳澐, 1540 -1617)을방문했다.이무렵수서는‘위기지학(爲己 之學)’ 공 부에 충 실하 였다 . 특히 심 경(心經) 근사 록 (近思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심도 있게 연 구해 전체 내용을 이해했으며 요지를 터득하는 학 문 성취가 커서 동류배(同類輩)로부터 공인을 받 았다. 백암븡취수븡죽유 제공도 당시 수서의 학문 경 지가‘노성(老成)하다’고인정하였다. 26세 (1580)에 봉화 현감 을 역임 하던 월천 조 목 (趙穆,1524-1606)을 찾아뵈었다.돌아오는 길에 두 릉서당(杜陵書堂)에들러간재이덕홍(李德弘,154 1-1596)을 방문하고 심경(心經)을 강론하며 의심 나는 것을 질의했다. 28세(1582) 8월에 여현(輿峴) 선산에 성묘하러 가는 길에 경북 영덕군 창수면과 영양군 경계에 읍령(泣嶺)에 이르러 감회시를 남겼 다.33세(1587)에심경을힘써읽었다.일찍이 퇴계도 이 심경을 ‘신명(神明)처럼 믿었으며 엄한 부친의 훈계처럼 여겨 가슴 깊이 간직하며 실천했다’고 전 한다.36세(1590)에셋째아들로( 僚 )가태어났다. 37세(1591) 봄에 향중(鄕中)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였다.그해 7월에 스승이자 장인인 삼송당이 별세하였다. 수서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으 로부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가르침에 따라 삼송에게 가르침을 받은 지 20여 년이 되었는 데스승을잃자산이무너지는슬픔을겪었다.심상 (心喪) 3년 과 초 하루 와 보름 삭망 일에 참 례하 여 추 모의 예를 다했다. 38세(1592) 봄에 삼송당 스승의 장례를 치렀는데,수서는 제문과 만사를 지어 스승 을잃은슬픔을표현하며애도하였다.그해겨울에 왜구들의 침략으로 주상께서 서쪽 지방으로 파천 (播遷)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 땅을 바라보며 통 곡하였다.당시 수서의 재종(再從)동생 병사공(秉 使公)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이 큰 고을에서 군사를 모아 동경(東京, 지금의 경주)을 수복했다 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멀리서나마 격려하고 축 하한다는 글을 써서 보냈다. 39세(1593)에 명나라 장군과 군사들이 길을 나누어 남쪽 지방 백성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이들이 본 고 을 영 천(영주 )을 지나 게 되 었는 데 수 서는 이 산서원에 있었다.한 장교가수서가 단정히 앉아 꼼 짝도않고있자성을발끈내며구리화로를들고수 서를 향해 던졌는데 빗나가 화로의 재와 숯덩이가 온 좌중에 쏟아졌다. 하지만 수서는 조금도 동요되 지 않고 태 연히 앉 아있 으니 명 나라 장교 가 멍하 니 바라보다가 공경의 예를 표하고 떠나갔다.40세(15 94)에 이 산서 원으 로 가서 도 내 각지 로 창 의(倡義) 를 독려하는 격서(檄書)를 써서 보냈다. 왜구들이 닥치 는 대로 약 탈하 는 만행 을 저질 러 무자 비하 게 성을 함락시켰다. 수서는 고을에서 동지를 규합하 여 의병을 일으키기를 합의하고 각 고을 선비들에 게 격서 를 보내 의 리를 들 어 적개 심을 일 으키 자 격 문을 읽는 이 마다 눈물을 흘렸다. 42세(1596) 7월 에 호여금복고(琴復古, 1549-1632), 공제(公濟)김 개국(金蓋國,1548-1603)과 함께 모임을 가졌다.당 시 김 개국 은 영서 (嶺西) 좌 막(佐幕)으 로 병사 를 훈 련시키고 병기 사용 방법 등을 교육했는데 수서는 그와 함께 왜적 무찌르는 현안을 의논하고 기획하 였다. 43세(1597)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차지했 다. 44세(1598) 이산서원에 가서 향내 유생과 함께 명나라장수에게글을올리는사안을의논하였다.4 5세(1599)에 가학시(假鶴詩)를 지었다. 당시 내암 (萊菴)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명성이 자자 했는데 자호를 ‘야학(野鶴)’이라 했다.그가 사헌부 관원으로 영주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수서는 단 한 번 그 를 보았 지만 단번 에 그 의 사람 됨됨 이를 알고 이 시를 지어 풍자하였다. 47세(1601) 가을에 향해(鄕解)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다. 48세 (1602)에 이산서원에 가서 임란 역사 기록물 1권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초안한 상소문을 보았다.49세(1603)2 월 14일에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1552-1617)를 찾 아 가 만나 고 시를 지 어 주었 다. 이 때 망 우당 은 곡기 (穀氣)를 끊은 지 넉 달째 여서 얼굴 모 습이 매 우 수 척했다.벽에‘호흡(呼吸)’두글자와‘오행(五行)의 상생법칙’을써서붙여두었는데당시사람들은곽 재우 장군을 도가(道歌)쪽 인물이라고 부르기에 수 서가 이 시 를 지 어 주었 다. 그 해 5월 에 이산 서원 에 가서 죽유 오운(吳澐)과 소고 박승임의 문집을 수정하였다. 이어 8월에는 병난 때 ‘사적’ 한 권을 편찬했는데 당시 경상도순찰사가 수서에게 이 책 을편찬케 했다.9월에둘째 아들한 이과거에급제 하였다.50세(1604) 4월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 迪, 1491-1553)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 당시 학관유생들이오현(五賢)을문묘에종사(從祀)해 줄것을상소했다.이때조정에서회재를폄하하여 그 여파가 퇴계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수서는 서애 (西厓)븡월천(月川)에게 가서 아뢰고 소회(疏會)를 개설하여 상소문을 올렸다.수서는 그 해 12월에 증 광동당(增廣東堂)향시에급제하였다. 51세(1605) 봄에 증광별시(增廣別試) 병과(丙 科)에 급제 하였 다. 3월 9일 복 시(覆試)에 서 궁 양달 시책(窮養達施策)을 지어 올렸으며 3월 19일 정대 (廷對)에서 교양인재책(敎養人材策)을 지어 올림 으로써 합격했다. 수서가 이렇게 늦은 나이에 과거 에 응거 (應擧)하여 급제 한 이 유는 본인 자신 은 과 거를 통해 입신출세하기를 즐기지는 않았다. 하지 만 아들 한 이 과거 에 급제 한 뒤 에 모친 께서 “너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지만 너 자신이 친히 급제하 는 것만 같겠느냐?”라고 하시자, 수서는 부득이 과 거를보아 벼슬길에나선것이다.당시모친은 88세 였다. 여름에 서애를 방문하였으며, 5월에는 약포 (藥圃) 정탁鄭琢(1526-1605)을 방문하고 영해부 (寧海府) 선영에 참배했다. 7월에는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11월에는이조판서인부훤(負暄)허욱 (許頊, 1548-1618)을 방문했다. 이는 허 판서의 모 친께서수서모친과동갑이셨기때문이다. 52세(1606)에 하도(河圖) 낙서(洛書) 역도주 해경계사(易圖註解經繫辭) 예경(禮經) 심경(心 經) 성리 서(性理書) 등 여 러 책을 두 루 읽 었다. 수 서는학문에뜻을둔이래특히성리학관련서적을 많이 읽었지만 항상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다고 여 겼다. 급제한 이후에도 심혈을 기울여 성리 서적을 탐독했으며 시간이 넉넉하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밤이 되어도 독서를 그만 두지 않았는데 매번 마음 에닿는문구가있으면거기에맞춰시를지어읊었 다. 이어 정양시(靜養詩), 자경잠시(自警箴詩)를 지었다. 스스로 기록한 ‘자기(自記)’를 보면 ‘성질 이 편협해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있다.가장 이겨 내기 어려운 곳에 처하더라도 식욕(食慾)과 색욕 (色慾)을이겨내기는가장어렵기때문에잠(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한다’고 해명했다. 이어 욕천시 (浴川詩)를지었다. 53세(1607)6월에는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 620)에게편지를올렸다.이당시한강은이산서원(伊 山書院)원장을맡고있었는데한강이조만간안동부 사임기를마치게된다는말을듣고편지를써서소고 (嘯皐)의문집발간경비보조를요청했다. 54세(1608) 정월에 단산서원 상량문을 지었다. 5 월에 예안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어 6월에 부임 했다.예안현에는 묵은 병폐가 많았다.수서는 부임 즉시 그 병 폐를 조 목별 로 정리 해 감 사에 게 보고 하 고 변통하여 바로잡아나갔다. 수서는 향교의 제기 가 파손 되고 더 러워 진 것을 새 것으 로 교 체하 고 주 민의 송사를 공정히 처리하여 이속(吏屬)이나 주 민에게인심을 얻는등 큰 치적을 남겼다.순찰사가 현에 이르러 수서에게 “부임 이후 공무를 부지런히 처리하여 큰 위안이 된다.”고 칭찬했다. 10월에 월 천(月川)의제문을지어조문했으며12월에는도산 서원(陶山書院)으로 가서 퇴계의 경서석의(經書 釋義) 교정 작업에 참여했는데 순찰사가 종이븡붓븡 먹을보내와이책의간행을도왔다. 55세(1609)4월에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6일에 말을 타고 출발했는데 예안현 주민들이 길 왼 쪽에서배웅하면서“어진현감께서돌아가시니백성 들이복이없다.”라고했다.그때계암(溪巖)김령(金 論 ,1577-1641)이송별시세수를지어주었다.수서가 집으로돌아왔지만집의쌀독이비어있었다.이소식 을 들은 예안현 선비들은 쌀 석 섬을 모아서 보냈다. 소학(小學) 주자서(朱子書)와 퇴계의 성학십도(聖 學十圖)를 읽었다. 어떤 이가 “자네는 왜 이렇게 고생 을 해가면서 책을 읽는가?”라고 묻자, 수서는 “공직 에 임하면 부지런히 공무를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오 면 책을 읽는 것이 나의 일인데 이것 외에 내가 어디 에힘을쏟을건가?”라고답했다. 56세(1610)에 심경을 읽고 감회가 있어 자도시 (自悼詩)와 자서잠(自誓箴)을 지었다. ‘기(記)’에 의하면‘가난하게사는것이가장어렵지만‘느긋하 게 살며 천 명을 기 다린 다[居易俟命,거이 사명 ]’는 네 글자를 항상 염두에 둔 연후에야 ‘분수에 따라 편안하게 산다[安分]’는 의미를 지니게 되기에 스 스로 마음 을 다짐 하는 글을 지 었다 ’고 밝혔 다. 57세 (1611)9월에 현 행정구역상 봉화읍 화천리인 구만 (龜灣)위에 서당 지을 터를 잡았다.수서는 마을의 아이들이 배울 만한 곳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도은(陶隱) 권호신(權虎臣)븡송음(松陰) 금복고 (琴復古)븡생원 이흥문(李興門)과 함께 의논하여 강당을 세워 학문을 닦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소 를 마련 하고 자 적합 한 곳을 정 하고 이 일 을 운영 토 록기획했다.11월에서당의상량문을지었다. 58세(1612)에 퇴계의 문집을 읽었다. 8월에는 구 만서당(龜灣書堂)이 완공되어 오륜가(五倫歌)를 지어 어린 학동들을 경계시켰다. 수서는 국문으로 시조 를 지어 마 을 학동 들에 게 노래 를 부 르면 서 자 신을경계하는방침을삼게하였다.이어십물잠(十 勿箴)을지어고을사람들을교화시켰다.모친의장 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당시 모친의 연세 는 95세였 으며 둘 째 아 들 한 이 예 안현 감으 로 재 직 하면서 잔치 준비를 했다. 9월에 청성서원봉안문 (靑城書院 奉安文)을 지었다. 당시 수서는 이산서 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서원의 땅이 낮고 습하여 건 물이 넘 어질 우 려가 있 기 때문 에 여러 유 생들 과 의 논하여 이산서원을 현재 이산면인 임구(林丘)로 옮겨지을계획을하고대지를마련했다.10월에서 원을 세울 개기제문(開基祭文)을 지었다.이어 단산 서원의제주[祭酒]인역동(易東)우탁(禹倬,1263-13 43)의 봉안제문(奉安祭文)을 지었다. 아울러 소수서 원에서 소학을 읽었다. 59세(1613)에 심경을 읽었다. 수서는만년에이책을더욱즐겁게읽었으며책의내 용대로 실천하고자 했다.11월에 경상도도사(慶尙道 都事)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는 그 무렵 수서의 모 친이 연로하셔서 수서가 매일 조석으로 모친을 보살 펴드리는일을비울수없음을알기에본도(本道)아 사[亞使·都事]로천거했다.모친은당시96세였다.60 세(1614) 정월에 대궐에 들어가 주상의 은혜에 감사 했다.지나는길에상공(相公)오봉(五峯)이호민(李 好閔, 1553-1634)을 방문하였다. 오봉은 수서에게 지 팡이하나를주면서“이것은중국의보배로세상에서 일컫는‘무당산(武當山)선인녹옥장(仙人綠玉杖)’일 세.모친의연세가96세시니공경하며드리니이것으 로모친께서더욱오래사시기를바라네”라고했다.2 월에부임하였으며3월에말미를얻어집으로돌아와 모친을 뵙고. 마을의 계약문(契約文)과 서로 권하고 힘써야할일,금해야할조목등약정문을고쳤다.이 와함께병산서원(屛山書院)에서애(西厓)를봉안할 때 제기를 만들어 보냈다. 가을에 우도시(右道試)를 주관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년-1637) 이 부시관(副試官)이었는데 수서와 주고받은 시가 많았다.9월에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 모친의 장 수를빌며잔치를벌였다.모친은97세였으며순찰사 (巡察使)무위당(無爲堂)중명(仲明)권반(權盼,156 4-1631)이 인근 고을 수령에게 수서 모친의 장수를 축 하하는 잔치를 수서의 집에서 베풀게 주선하라고 했 다.이때경정(敬亭)이민성(李民宬,1570-1629)븡단곡 (丹谷)곽진(郭瑨,1568-1633)이시와서문을지어수 서의 효행을 칭찬하며 모친의 장수에 대해 감탄하였 다.우도(右道)의 천재지변으로 인한 농사 작황의 피 해를 자세히 살폈다. 61세(1615) 봄에 임기가 끝나 집으로 돌아왔다. 심경을 읽었다. 9월에 이산서원 위패를 옮겨 모시는 이산서원봉안제문을 지었다.1 1월에이산서원원장이되어명륜당을세웠다. 62세(1616) 3월에 작은 병세를 감지했다가 22일 에 정침에서 별세했다. 모친은 99세였다. 한강(寒 岡) 정구(鄭逑, 1543-1620)가 문인을 보내서 조문 했다. 4월 20일 도사(都事)에서 통정대부(通政大 夫)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겸 경연(經 筵) 참찬관(參贊官)븡수찬관(修撰館)븡예문관(藝文 館) 직제학(直提學)븡상서원정(尙瑞院正)으로 추 증되었다. 12월 19일에 군의 동쪽 성지동(省知洞) 오향(午向) 언덕에 장례 치렀다. 묘소는 수서가 살 던 마을 과 7리 정도 거 리에 있고 조 문객 은 수백 명 이었다. 모친 신안 주씨는 수서 사후 2년 뒤인 1618 년(광해10)에 101세로 별세하여 아들 수서 묘소 뒤 편에 안장되었다. 1885년(고종22) 4월에 도승지에 서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븡홍문관 제학븡동지춘추관 성균관사로 증직이 더해졌으며 숙 부인淑夫人남씨가정부인貞夫人으로추증되었다. 수 서 의 「 오 륜 가 」 는 1613년 8월에 구 만서당이 완성되자 ‘오륜가’ 8수를 지어 동네 학생들이 노래 하며 자신을 경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는 임 진 왜 란 이 후 인심이 더럽혀지고 삼강오륜이 해이해 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물욕에 사로잡혀 쉽 게 헤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바른길로 이끌고자했음을알수있다. 오륜을 하나씩 차례대로 다섯 수를 노래하고 나머지 세 수는 오륜을 마무리한다는 뜻인 난 (亂)을 덧붙여 오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륜 가는 작품 서문과 함께『수서집』에 전하고 있다.? [촌 (寸 )마 도 못 한 푸 리 봄 이 슬 마 잔 후 에 / 잎 넓 고 줄기 길어 밤낮으로 자라났다/이 은혜 하 망극 하니갚을줄을몰라라(부모와자식사이)] [임금님 날먹이시고임금님날입이시니./아무 리 어려운들 임금님 덕 잊을쏘냐./ 혹여 이 큰 뜻 모른다면짐승이나다를까(임금과신하사이)] [두 성씨 한데 모아 함께 늙어 죽자하니/ 끈끈한 정분이야이보다 더하랴마는/그래도 공경할 줄모 르면물수리에금술을배워라(남편과아내사이)] [먼저나고후에나고순서야다를지라도/앞뒤 로 매 달 려 한 젖 먹 고 자라났네./ 사람이 이 뜻을 모르면금수만도못하리라(형과아우사이)] [남으로내어나 이토록친밀할까/술잡고말할 적에 어깨만 두드리랴./세상이 변한대도 벗의 믿 음잊자마라(친구사이)] [당우(唐虞요순시대) 망하고 한당송(漢唐宋) 이었으니/ 세월 흘러가면 세도는 변하는 것이라/ 그래도사람이면인간의도리를익히어라.] [옷 과 밥 이 부 족 하 니 예 의 차 릴 겨 를 없 어 / 글 방도 서당도 필요 없다 여기느냐/그래도 보고 들 으면배울길이있으리라] [이웃을 미워마라, 이웃 미우면 갈데없다./ 한 고을 피폐하고 한 나라가 기울 것이다./ 백년도 몰살인생이니화합하며살지어다] 이렇 듯 오 륜가 는 삶 의 가장 근본 적인 내용 을 담 고 있 다. 마 지막 8수는 이 웃과 두루 화 합하 며 살라 고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는 ‘우리’라는 공동체 윤리로마무리되고있다. 수서는 타고난 자질이 독실하고 지조와 행동거 지가 단아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학문에 대한 열 정은 식지 않았다. 성리학 관련 서적에 전심전력 하여 매일 독서 과정을 정해 두고 연찬 활동을 지 속했다. 수서는 공직을 수행할 때를 제외하고 여 가가 있을 때나 집에서 한가히 지낼 때 손에서 책 을 떼지 않고 평생 성리학 공부에 치중했다. 성품 역시 어질고 효심이 깊어 모친을 지극한 정성으 로 모셨으며 집안사람들과 아래 사람들을 후덕하 게 대했다. 이러한 수서는 선비의 전형이라 하겠 다. /박대훈명예기자(경북봉화군지부) 수서박선장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생애 경북봉화군봉화읍화천리전경(수서공후예집성촌이다) 몽화각(경북문화재자료제155호).수서공의어머니신안주 씨유덕을영모하기위해후손들이지은정자이다. 수서공부조묘. 오륜가(五倫歌) 오륜가시비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