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20년8월31일 월요일 12 (제164호) 기획 글씨를 잘 써서 당대에 이름이 있었던 귀옹 박경후 선생은 1674년 증광문과에합격하여병조참판,황해·전라 ·경기의 삼도(三道)관찰사를지내고1682 년(숙종8)에 윤지완(尹趾完)·이언강(李彦綱)과 더불어 통신사(通信士,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글씨와 문장으로 미개(未開)한 왜인(倭人)들의 칭송을한몸에받았다.왜인들은본래미개하여문화적수준이낮아노(怒)하기쉬웁고,노(怒)하면짐승처 럼날뛴다는왜인들을순한양으로만든일 화는 그 이후로도 계속된다.선생의 행의(行誼)는 잠덕(潛德,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소행)이 아니라 금세사대부(今世士大夫)가 숙묘조 인 물 류(肅廟朝人物類)를 논(論)하며 말하기를 나라의 중견인물(中堅人物)로 풍의(風儀)에 있어서나 도량(度量 )에 있어서나 인품(人品)에 있어서나 재 혜(才惠)있어서나풍월(風月)에있어서나어느하나빠질것이없는분이다. 특히 관직에 처음 나간 1675년부터 1705년까지 30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 써온 일기 관해부심(官海浮沈 )이라는 친필일기는 사환일기(仕宦日記) 로서자료적 가치가 매우높다.또한 유저(遺著)로 남겨 놓은 귀옹문집(歸翁文集)과 1694년(숙종 20)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편집·간행한 “함양박 씨대동보(咸陽朴氏大同譜)”는함양박씨최초의족보로전해지고있어희귀본으로현재충청남도부여군은 산면가곡리의함양박씨구당종가(九堂宗 家)에 소장되어 있다. 1701년(숙종4)에는 아버지를 도와 실전(失傳)한 것으로 알았던 시조(휘 선)의 분묘( 墳墓)를 새로이 단장할 때 비석의 글씨를 쓰는등위선사업에도정성을다하여귀옹(歸翁)선생의30여년관직생활과그삶에대해알아본다. 기옹 선생의 선대는 대대로 관직이 이어진 사환 가(仕宦家)의 전통을 유지한 명문가이기도 하다. 속함대군의 후예로 고려 선종(宣宗)조에 합격하 여 조청대부 예부상서를 지낸 諱 선(善)을 1세조 로하여세계를이었다. 중시조로부터 10세손에 이르는 약 300년 동안 많은 현관(顯官)과 무장(武將)을 배출하였으며, 5세 휘 신유(臣찮)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 夫), 판리부상서(判吏部尙書)를 지내고 금자광록 대부(金紫光祿大夫) 상주국 판삼사사(上柱國 判 三司事)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 는충질(忠質)이다. 충질공이 여섯 아들을 둠으로서 오늘날 함양박 씨 6지파(之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귀옹선생 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넷째인 휘 지수(之秀) 의 후예이다. 밀직부사공의 아들(2世) 우(王+ 짰) 는 금자광록대부판삼사사(金紫光祿大夫판三司 事), 손자(3世) 인계(仁桂)는 봉익대부 병부상서 (奉翊大夫 兵部尙書)을 지내고 함양군(咸陽君) 에 봉군되었다.우왕 원년 양광도 안무사(按撫使) 재임시 왜구가 연해변에 침입하자 적선(敵船)을 섬멸하고 쫓아버리고,이듬해 공주로 침입한 왜구 를 격퇴시키고 석성(石城)에서 연산(連山)까지 달아나는 왜구를 쫓다 순절하여 정려가 내려지기 도 하였다. 증손(4世) 원렴(元廉)은 문과에 올라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호부상서(戶部尙 書)을 역임하였으며 현손(5世) 덕상(德祥)은 문 과에 정순대부(正順大夫) 부사(府使)를 지내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증직되었다. 6世 습(習)은 공민왕 16년(1367년)에 출생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兵曹判書) 겸 팔도순찰사 출척사(八道巡察使黜 陟使)를 지냈다. 태종15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김 제 벽골제를 수축하고 강원, 경상도 관찰사, 대사 헌,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태종과 동갑이고 동 방급제(同榜及第)하여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는 데 애석하게도당시 병조판서 강상인이 도성의 금 위영군사 이동을 상왕의 재가없이 이동한데 연루 되어 영의정 심온,도총관 심정,참판 강상인과 함 께세조즉위년에화를입었다. 병 조 판 서 휘 습 (習)은 휘 의 손 을 생 하 니 문 과 감 찰이오 휘 신동을 낳으니 이조참판이오 휘 중검 (仲儉)을낳으니 증이조판서요,휘 세영을 낳으니 구당공파의 파조이며, 관(官)은 돈영부정이오 증 좌찬성이오 기묘문인(己卯聞人)이다. 휘 대립을 낳으니좌찬성이오 증영의정이오 호는 무환당(無 患堂)으로 귀옹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지술 (知述)부사요 증 이조참판이다.증조의 휘는 유공 (由恭)으로 직장에 증 집의요 조부의 휘 종형(宗 亨), 전부(典簿, 종친부의 정오품 벼슬)에 증 이조 참의오 이천부사 증 이조참판으로 휘 상욱(尙郁) 을 낳으니 이분은 공의 아버지가 된다. 1651년(효 종2) 생원시에 합격하여 1657년 참봉으로 출사하 여 의금부도사, 상의원주부, 제천현감, 공조좌랑, 괴산군수, 나주목사 등 내외관직을 두루 거쳤다. 1 67 8년 동 종 (同宗 )의 휘 염 (恬)과 함 께 함 양 박 씨 족 보 초간본을 편찬하였는데 소위 ‘무오보’이다. 그 러나 무오보는 관계 문헌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한 한계가 있어 귀공 선생이 1694년 마무리한다.귀옹 공의 귀(貴)로 3세가 증직되었는데 아버지는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양천허씨는 양천인으 로 참 판 증 좌 찬 성 계 (啓)의 女 이 다 . 선생은 이조참판에 증직된 아버지(휘 상욱)와 양천허씨와의 사이에서 숭정17년 甲申(1644년) 에 태어나니 어려서부터재주가뛰어났으며,지성 (至性) 또한 있었다. 5세적에 외가에 갔다 외증고 판부사공 곁에놀다가갑자기 아가씨를 부르며 집 생각이 난다고 한다.판부사공은 허락해주지 않았 다. 그때 마침 병아리가 어미를 찾느라 울부짖음 에 공은 불러말하기를저것들도역시 어미생각이 나서 부르는데 왜 나를 보내주지 않습니까? 하자 판부사공은 기특히 여겨말하기를하늘이낸 효자 로다칭찬하다. 즉시 종에게 명하여 데려다 주었다. 차차 자라 매 기우(氣宇)가 늠름하고 숙성하여 남다르거늘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 1595~1671)은 한번 보 더니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타일(他日)에 재상 (宰相)감이로다 하였다. 갑진(甲辰, 1664년)에 성 균관에 출입하더니 이름이 자자하다.이듬해 乙巳 에생원진사양시에합격하다. 공은 文才가 뛰어나고 또 예서전서(隷書篆書) 의 필법이 아름다워 병풍글씨로 필명을 날렸다. 1 669년(己酉)에 상석(上席)에 승진되고 또 책(策) 으로써 한성시(漢城試)에 장원되었다. 1675년(乙 卯)에 숙종 등극에 맞춰 실시된 증광시 병과에 등 제하여 권지(權知,임용대기)가 되고 승문원 부정 자가 되고 섭당후(攝堂后, 승정원 주서)에 입시 (入侍)하였다. 그후 현조(顯祖) 실록(實錄)을 꾸미는데 춘추 관기사관(記事官)이되어그역(役)을맡았다. 1677년 정사(丁巳)에 승정원 주서 응교(應敎), 거괴(居魁,으뜸 자리를 차지함 )가 되어 상(上)은 초피난모(貂皮煖帽,단비 털로 만든 방한모)를 하 사하였다. 1678년 무오(戊午)년에 어제(御題, 임금이 친 히 보는 시험) 과시(科試)하는데 주공진무일편 (周公進無逸篇)에 대해서다. 선생은 진무일소(進 無逸疎)에 대해 학문에 힘쓰고 근정(勤政)을 권 계(勸戒, 타일러 훈계함)하였던바 그 글을 잘 쓰 고참고할만한데있는지라칭찬하고받아들였다. 얼마 안 되어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3일후 병조좌랑, 또 3일후에는 홍문관 부수찬을 제수 받 았다.관록(館錄,홍문관의 관원이 될 만한 후보자 를 고 를 때 작 성 하 는 기 록 )없 이 특 제 (特 除 )란 예 (例)가 없었다.대신(臺臣)은 불가하다고 세 번이 나 계(啓)를 올렸다. 그러나 임금이 말하기를 군 말마라 그 위인(爲人)을 아름답게 여겨 내생각대 로 배치하려한 것이다. 특제란 역시 예전에도 있 었던 것이니라. 이에 모든 신하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을 윤합(允合)하고 당록(堂錄)에 임하는 것 은 조모(朝暮, 조석)의 일입니다. 이제 만일 특제 를 할 것 같으면 불안해하니 어찌하오리까? 이에 임금은드디어쫓으니사헌부지평으로옮겼다. 이후 옥당(玉堂, 홍문관) 뽑혀 또 사간원 정언 이 되고 그 후에 송화(松禾)현감에 외보(外補,지 방관에보하여임명함)되었다. 1682년(壬戌)에 나라에서 일본에 통신사를 보 낼 적에 상국(相國,정승)윤지완(尹趾完)이 정사 가 되고 공은 종사관으로 뽑히게 되었다. 처음 종 사관은 여러 번 바뀌었다. 전상(銓相,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통칭하는 말) 이익(李翊, 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문신)은 선생을 천거하면서 그 이유 를 ‘글이 문장이오 글씨도 잘써서 공보다 나은 자 가없기때문이다.’하였다. 드디어 길을 떠날 제 임금은 인견(引見)하고 술 을 하사하고 호피납약(虎皮蠟藥)을 하사받는 등 심히후하게한다. 선생은 성포상홀(猩抱象笏)로 命을 받았다. 떠 나가는데 도로는험하고풍파가심한 바다를 건너 간다.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다. 선생은 색 (色)이 희미하고 바다에 떠서 풍파를 만나니 배가 얼마나 위험하든지 배속의 사람들은 무서워 겁이 나서 얼굴이 새파래지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선생은 상개(上价, 上使)와 더불어 의기자약(意 氣自若)하니 사람들은 모두 장(壯)하게 여기었 다. 일본인 중인삼상서(重人三象胥)의 무리들은 본래 미개하여 문화적 수준이 낮아 노(怒)하기 쉬 웁고, 노(怒)하면 짐승처럼 날뛴다. 이보다 먼저 사행(使行)이 많이 건너갔다. 선생은 청엄(淸嚴, 맑고 엄하며) 하게 몸을 가지고 상서(象胥) 무리 에게 모범을 보이니 서로 경계하며 감히 추호도 범하지 못 하였고, 만인(蠻人븡미개한 종족)은 더 욱공경하며예를차리었다. 사행(使行)은 5월에 갔다가 11월에 돌아왔으니 얼마나 속(速)히 다녀왔는지 모른다.(동사일록 참조)돌아올 적에 선사품은 일체 받지 않았다.만 인(蠻人)은 이제 와서 칭송하더라. 그 후 부터 국 가에서 동사지명(東 汎之 名 , 통 신 사 )이 있 어 다 녀 오는 자는 당연히 임술사행(壬戌使行)처럼 해야 하며 만모(蠻貌)에 충언행(忠言行)을 한 자(者) 라 하며 칭송하였고,만귀인(蠻貴人)은 앞을 다투 어 공 의 시 필 채 전 (詩 筆 彩 큅)을 써 달 라 요 구 하 기 에이른다.<동사일록참조> 이에 선생은 하나도 거절치 않고 써주었다. 사 람마다 하늘을 얻은 듯이 기뻐한다. 선생은 환조 (還朝)하니 관백(關白, 간파꾸, 메이지 유신 이전 까지는 조정대신 중에서 사실상 최고 위직 역임) 이 또 금병(金屛)을 보내오며 청한다. 선생은 조 명(朝命)을 받들어 써주니 만인(蠻人)은 기뻐하 며 영광으로 여긴다. 이미 복명하거늘 임금은 인 견하고 노고를 치하하며 술을 하사한다. 이튿날 병조정랑을 배(拜)하고 또 승숙(陞叔)하니 1683 년(癸亥)부터 1687년(丁卯)까지 외직으로 경기 도사, 밀양부사, 성천부사, 영암군수를 지내고 내 직으로 통례사예(通禮司藝), 봉상시정(奉常寺 正),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냈다. 한가히 만직 (漫職,한가로운벼슬자리)을맡기도했다. 이 해에 온성부사(穩城府使)로 나가고 통정(通 政)에 오르고 1688년(戊辰)에 파하고 이듬해에는 수원부사, 홍주목사로 나갔다. 일삭(一朔, 한달) 만에 돌아와 호조참의를 拜하고 1690년(庚午)에 병조참의, 은대좌우료(銀臺左右寮)를 지내고, 임 금은 문득 예방(禮房, 승정원에 딸린 육방의 하 나)에 있게 했으니 그때는 부묘( 뻤廟, 삼년상이 지난 뒤에 종묘에 모시다)와 왕세자를 책봉하는 예(禮)가 있기 때문이다.病으로써 우승지를 바꾸 어 장악원판결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을 배하고, 1691년(辛未)에는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를겸하다. 황해도 감사를 배하고 1692년(壬申)에는 청국 오귀신(淸國五貴臣)이 백두산 경계를 답사해보 기 위해 온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면 접대하고 설 득시킬 접반사를 뽑아야 한다.적임자를 물색하는 데 좌상 육래선은 계(啓)를 올려 ‘황해도감사 박 모는 본래 재사(才士)가 아닙니까? 일본에 종사 관으로 보낸 적도 있습니다. 청의 사절을 접반하 는데 적임자라 생각되기에 천거하나이다.’라고 역 설(力說)한다. 이에 숙종대왕도 마음에 드는지라 선생을 불러 올려 한성부좌우윤을 삼고 형조참판 을 제수하였다. 그 후에는 온다던 청인(淸人)은 오지 않았다. 선생은 접반사로써 행세는 수행 못 했지만 근세(近世) 명관이다. 선생은 대성(臺省,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통틀어 이르던 말)으 로부터 경제(卿宰,임금을 보좌하며 모든 관원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은 이품이상의 벼슬이 나 그 벼슬에 있는 사람을 이르던 말)에 이르기까 지 병(病)이 아니면 어려움이 많았다. 위로는 임 금섬기는것부터아래로는사람 접하는데 이르기 까지 접물(接物, 물건을 접함)에는 성의(誠意)로 위주(爲主.으뜸을 삼은)하고 자랑을 힘씀으로써 명성을 날린다.구차하게 수법(守法)에 이르되 선 생은 손을 대면 굽히지 않고 꾸준히 해나간다. 장 례원(掌隷院)에 있을 적이다.어려운 송사를 해가 넘도록 처리하지 못한 건이 있다. 선생이 즉결(卽 決)하니도민(都民)은원망이없었다. 1693년(癸酉)에 전라감사에 올라 인견하고 백 성을 구제할 것을 논하니 모두 허락한다. 이 기간 동안 홍섬의 인재집을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 다. 1694년(甲戌)에 미사(微事,작은 일을 아무렇지 도 않는 것처럼 소홀히)로 파(罷)하고,1695년(乙 亥)에 이천부사로 나갔다. 그해는 노친(老親)의 칠순연(七旬筵)이라 공귀(公貴)로 임금에게 아 뢰었더니 추은(推恩)하여 가자(加資)하니 즉 첨 추(僉樞)를 배(拜) 하고, 모부인에게는 숙부인 (淑夫人)을 봉해주니 선생은 천은(天恩)에 감격 (感激)하여 대연(大宴)을 베풀고 손을 접대하는 데 선생은 사제(師弟)와 더불어 손을 올리며 축수 (祝壽, 부모님께 술잔을 올리는)하며 그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부자(父子)는 비옥(緋玉, 당 상관의 관복)이 빛나는 듯 하더라. 세상에서 부자 된자는 누가 선생의 효만 하랴. 첨추공 대부인(大 夫人)의 풍복(豊福)을 축하하더라. 이해에 부총 관(副摠管)을 배하고, 형조참판, 병조참판, 병자 년에특진관연시강연(特進官連侍講筵)하다 1700년(庚辰)에 장단부사를 지내고 1701년(辛 巳)에 친병(親病, 아버님병환)에 이천부사가 되 었다. 1703년(癸未)에 외간(外艱,아버지의 상사) 을당하고1704년(壬午)에내간(內艱)을당했다. 선생은 육순(六旬)의 나이로 집상(執喪)하다 보니 몸이 애약(哀弱)해져 병이 생겼다. 가히 구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제절(祭節)을 친히 했다.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자리를 축였다.종제(終制) 까지 자리 갈기가 여러 번이다.日月은 유시라 4년 에 전후상을 마치다. 25일 만에 두 번 없는 상례를 치루었다. 선왕제례(先王祭禮)를 감히 다스리지 않은 적이 없다. 드디어 선복(禪服)으로 묘를 지 키기를 2년 애통해하며 하루에도 세 번씩 묘에 올 라가 울며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오나 가 리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 효행(孝行)을 칭 찬하지않는자가없었다. 1706년(丙戌)봄에 감기가 걸리고 몸살이 났다. 거적자리에 않아 이 병에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죽 지 않으면 제례(除禮)를 마치리라. 이제 죽은들 무슨 한이 있으랴 하며 정침에서 하세하니 壽63세 이다. 부음(訃音)를 듣고 부의(賻儀)를 보내오고 조 제(弔祭) 여의(如議)하고 애영(哀榮,죽은 후에 얻는 영예)의 은전을 갖추더라 오호라(噫)라 선 생의 효는 왜항(倭巷)에서 나온 것이니 필사(匹 士)라면 탁설풍려( 楔風勵)의 은전이 이르지 않았을것인가? 이제 광(曠)은 행(行)치 못할 것이니라 특히 공 은 우연히 才器가 현저하므로 至行順德은 도리어 가버릴 바가 된다.숙종께서 공을 알게 된 것은 재 기 (才 器 )에 있 어 서 역 시 모 두 알 지 못 한 다 . 바 야 흐로 숙종조에는 국가무사(國家無事)하다. 오직 남쪽 왜(倭)와 북쪽에는 오랑캐가 집적거리니 이 보다 중한 일이 없었다. 그 사람을 택(擇)할 적에 공(公)을 바꿀 수 없다며 ‘南에도 역시 공(公)이 요 북에도 역시 공(公)이라 공은 늘 다사한분이셨 다. 세사(世事)는 이보다 더 큰일은 없다. 세상에 서 공을 구하는 자는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공이 세상에서 쓸모 있는 존재란 이 뿐이 아니다. 우유(優遊)할 수 있는 여가(餘暇)는 군자의 락 (樂)이니라 시비가 있더라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 느니라.’라며후이들은평가한다. 조정에 나아간 지 30여년에 박(薄)하게 굴었다 면 어찌 신상에 미치지 않았으랴 금가시주(琴歌 詩酒)복록(福祿)을누리다가세상을마치었다. 어느 날 늠늠(凜凜) 자(者)는 그 득상(得喪)이 여하(如何)하랴 공(公)은 동생 넷과 더불어 화목 하고 우애가 있으며 큰 이불과 긴 베개를 만들어 여러아우들과한 이불속에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잤다.(장침대금,長枕大衾) 재산을 분배함에는 모두 전정(田丁)으로써 아 우들에게 갈라주며 가로대(曰) 나는 봉급(녹봉) 을 받으니 굶지는 않을 것이니 일가끼리 서로 도 와가며그기한(飢寒)을구해준다했다. 생자녀(甥子女)와 조고(早孤, 여러서 아버지를 잃음)가 있었다. 공은 양육하고 교도(敎導)하고 친자식처럼 시집보내고 장가들어 살게 해주었다. 또 붕우(朋友) 중에 액사( 용死)하여 궁한자는 재 물을 기울여 구제해 주기도 했다. 이렇게 종족(宗 族)이나 옛 친구에게는 은애(恩愛)가 도타웠다. (종당고구,宗黨故舊) 선생은 부인 남양홍씨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어 동 생 인 휘 경 승 (慶 承)의 아 들 흥 신 (興 新, 1 704 ~17 66, 監役)을 취하여 후사를 이었다. 홍신은 아버지 와 처부의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벼슬하지 않 았고,말년에감역에주어졌지만출사하지않았다. ▶동사일록(東 汎日錄)에서 신유년(1681,숙종7)에일본에서는관백(關白) 원가강(源家綱)의 뒤를 이어 강길(綱吉)이 새로 관백의자리에서자,통신사를보내주기를청해왔 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듬해인 임술년에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하여 정사 윤지완(尹趾完), 부사 이언강(李彦綱), 종사관 박경후(朴慶後)를 삼사(三使)로 정하였다.그리하여 삼사는 일행 47 3명을데리고일본으로사신길을떠났다. 이 일행은 임술년 5월 8일에 떠나서, 동 26일에 부산에도착,6월 18일에배를 타고 바닷길을 떠나 대마도에 동 24일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14일 동 안을 묵은 뒤 7월 8일에 대마도를 떠나서 동 26일 에 대 판 성 에 도 착 했 다 . 5 일 을 묵 은 뒤 에 8 월 3 일 왜경(倭京)에 도착했고, 여기에서 3일을 묵은 뒤 에 동 21일에는 강호에 도착했다. 20일 동안을 머 무른뒤 9월12일에야 일을끝내고강호를떠나 동 26일에 도로 왜경에 도착했다. 이것은 회로인 것 이다.3일을 쉰 뒤 10월 2일에 왜경을 떠나 대판성 에돌아와4일동안을머물렀다. 이달 6일에는 대판성에서 우리 배에 올라 뱃길 을 떠나 동 18일에대마도에도착하고,여기에서 9 일 동안을 머무른 뒤 동27일에 대마도를 떠나서 3 0일에 도로 부산에 돌아왔다. 여기에서부터는 다 시 육로로 해서 서울에 돌아와 11월 16일에 복명 함으로써이사신들의임무는끝났다. 이 와 같 이 일 본 에 갈 때 에 소 요 된 날 짜 는 도 합 6 6일인데 육로가 20일, 뱃길이 27일이요, 우리나라 역로가 19일로 되어 있다. 길의 거리로 보면 뱃길 이 3245리,육로가 1245리로,우리나라 역로가 104 5리로서 도합 5535리나 된다.그리고 왕래 총 일수 는96일이었다. 이 멀고도 지리 한 여행에는 더구나 풍파의 위 험이 수반되고, 물에 시달린 일행들이 병으로 죽 는 등 , 실 로 많 은 고 통 과 싸 우 게 된 다 . 바 람 에 묶 여 배가 떠나지 못하면 며칠이고 묵어야 했고, 또 파 도가날뛰면 중로에서라도배가 갑자기 정박할 곳 을 찾기에 급급했다. 일행 중의 배가 어느 사이엔 가 행방불명이 되어 일행들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일도 있다. 실로 이 사신 길은 연경(燕京) 길에 비 하여 사뭇 위험한 길이었던 것이다.-이하 생략- (역관김지남지음) 글씨와문장으로왜인을감복시킨귀옹(歸翁) 박경후(朴慶後)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선원세계 뱚뱚뱚뱚뱚뱚뱛 관해부심-30여년관직생활을담은일기. 교서,황해도관찰사보직발령후임금이내린공문서이다. 귀옹문집 귀옹공의교서를비롯한간찰,교지,등은구당종가소장고문서4천여점,고서471종1058책과함께현재학국정신문화연구원에기탁관리되 고있다. 귀옹박경후선생의존영 선생의 생애 홍패(한국정신문화연구원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