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20년5월31일 일요일 12 (제161호) 기획 갈충(竭忠)은충을다했다는뜻으로임진왜란당시분조(分朝)를운영하던광해군을도운공로로책봉된공신 80명을책봉했던훈호 (勳號)이다.우암 송시열 선생은 갈충공 박종남 선생의 묘갈명에서 『영지(靈芝)는 뿌리가 있고 예천(醴泉)은 근 원이 있으니,어찌 근 본이없이생긴사물이있겠는가?이는부옹( 뻠翁,송나라시인황정견의호)의명언(名言)이다.그산을보지 못했을경우에는그나 무를보아야한다.벗을볼적에도그러한데더구나할아버지븡아버지븡아들븡손자의피붙이야말할것이있겠는 가?내가참의공의자 손을 보니, 가정의 법도가 비롯된 바를 알겠도다. 자신이 실천하여 세도(世道)에 빛나니, 아! 백세(百世)토록 인멸되지 않을 것이도 다.』라고 하였다.이는 갈충공의 아들 충장공(휘 영신)으로 이어지는 충신집안의 내력을 드러내는 것으로 송 죽 같은 절개와 충절의 상징이라할것이다. 갈충공박종남선생은임진왜란을겪으면서몸소왜적을무찌르며정의(正義)로움을보인무장으로여진족의 추장니탕개의난을진 압하는등충의(忠義)의인물로꼽고있어소개해본다. 갈충공의 휘는 종남(宗男)으로 字는 자윤(子 胤)이다. 밀성대군 후예로 중조 사문진사공(四 門進士公)의 휘(諱)는 원(元)으로 고려조에 사 문진사 또는 국자진사를 역임했다. 밀성대군 (密城大君 휘 언침)의 10世 支孫(시조 39世孫) 으로 太師公 언부(彦孚)의 둘째아들 諱 義臣의 長子다. 5대 전(傳)하여 정승공(휘 화)의 사남 휘 인익 (仁翊)은 고려조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고려가 망 함에 따 라 전북 김 제로 낙 향 조카 인 정재 공과 함 께 불 사이 군의 충 절을 지 켜 충절 의 모 범을 보 였으 며,공의 넷째 휘 구(球)는 윤림(允林),의림(義林) 을, 윤림(允林)은 한성부판윤으로 아들 서(曙)를 낳으니 휘 서는 명산(命山)을 덕천군수(德川君守) 를지낸명산(命山)은휘종(種)을낳으니사헌부 감찰이다. 이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훈(薰)으로 통훈대부 영흥판관 승정원 승지이고, 증조의휘는 효간(孝幹)으로 증 호조판서로 행 돈 용교위(敦勇敎尉), 조부의 휘는 세형(世馨)으로 통정대부 영흥판관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 증되었으며, 아버지 휘(諱) 호(虎)는 무과(武科) 에 오르고 병절교위 용양위부사과, 상장군을 지 내고 가선대부 형조참판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증직되고 어머니는 정부인 경원박씨(慶源朴氏) 로公은1551년(명종6,辛亥)년에태어났다. 갈충공은 대대로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불러 지는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공은 태어날 때 아름다운 기질을 타고나 기개가 호탕하고 아울러 문재(文才)가 있었는가 하면, 필력(筆力)도 굳건 하였다. 처음에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잘되지 않 자 포기하고 무과를 보아 2등으로 합격하였고,같 은 해에 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곧바로 선전 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가 기장 현감(機張縣 監),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어 머니 상(喪)을 당하였다가 3년 상(喪)이 끝나자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 진하여호조(戶曹)로옮기었다. 만력(萬曆)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 에 조정에서 장수를 파견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 랑캐 니탕개(尼湯介)를 토벌할 때 공이 따라가 난을진압하는데크게기여했다. 동북지역의 여진족에 대한 통제는 6진 개척 이후 한때 잘되어갔으나 중종 이후 내정의 문란 과 함께 차츰 약화되었다. 선조 때 이들 여진족 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지다가 결국 니탕개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두만강 방면의 추장 니탕개가 선조 초부터 예의를 갖추며 6진을 자 주 드나들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관록을 주고 후 대했다. 그러나 1583년 1월, 인근 여진의 여러 부가 진장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경원부 로 침입해 아산·안동의 각 보를 점령했다. 조정 에서 급히 원조군을 파견하고 신립이 평소에 길 렀던 기병 500명을 동원해 반란군을 소탕하고 6 진을 보존했다. 공께서는 니탕개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선조(宣祖)가 금낭(錦囊)에다 옥(玉)을 담아 하사하였다. 이후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에 비 변사(備邊司)에서 공이 문무(文武)를 겸전하여 북방을 진압할 수 있다고 추천하자 부령부사(富 寧府使)로 임명하였고, 부령 부사에서 길주(吉 州)븡온성(穩城)으로 전직되었다. 그때 변방의 오 랑캐가 종작없이 반기를 들었으나 공이 갑옷과 무기를 수선하니, 오랑캐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 였다. 그때 왜적(倭賊)이 이미 준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공(公)을 전라도 조방장(全羅道助防 將)으로 옮겨 임명하였다가 이윽고 춘천부 방어 사(春川府防禦使)로 임명하여 북상(北上)하는 왜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공이 누차 접전하여 깨 뜨렸다.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군은 한동안 육상 전 투에서 곤경에 처했다.이 과정에서 지역 요새(要 塞)를 지키던 몇몇 장수들은 종적을 감추거나 도 망가는 상황에 일본군은 승승장구 하며 북상하고 있었다. 이때 공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왜군의 진격 을막아내당시조정에보고된기록을살펴본다.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6일 정해 13번 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가 진주성을 구원하지 않고 도망친 장수들의 처벌 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주가 위급할 때 날마다 외원(外援)을 바랐으나, 우리나라의 제장(諸將)들은 멀리 도망하여 한 사람도 위난 (危難)을 구제하기 위해 달려간 자가 없었습니 다. 유 총병(劉摠兵)이 2천 명을 보내었으나 우 리나라 사람으로서 향도(嚮導)하는 자가 하나 도 없어 중국 군사로 하여금 중도에서 길을 잃 고 방황하게 함으로써 군위(軍威)를 과시하여 진주성을 구원하지 못하게 하여 드디어 성안에 가득한 충의(忠義)의 장사(將士)들이 일시에 도륙되게 하였으니, 말을 하자니 창자가 끊어지 는 듯합니다. 남 하 ( 南 下 ) 한 제 장 들 이 셀 수 없 이 많았는데 도 지금 서성(徐 赴)의 장계를 보건대, 다만 박 진(朴晉)·박명현(朴名賢)·박종남(朴宗男) 세 사람만이 한 결 같이 주장(主將)의 명령에 따라 초 계 ( 草 溪 ) 에 주 둔 하 여 적 의 뒤 를 견 제 하 고 우 도(右道)를 방어하였을 뿐, 그 나머지는 어디로 도망했는지 간 곳조차 알 수 없으므로 중국 장 수가 매우 노하였다 하니, 매우 경악스럽습니 다. 도원수(都元帥)에게 명하시어 그 중에서 더 욱 심히 도망친 자 약간 명을 적발하여 참수(斬 首)하여 효시(梟示)하거나 장벌(杖罰)을 시행 하도록 하게 하소서."하니,상이 따랐다.】 또,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6일 기축 10 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경상 병사 권응수가 대구부의 적이 물러갔고 청도의 적은 추격 중이라고 치계하다’ 경상좌도 병사 권응수 (權應銖)가치계하였다. “대 구 부 에 남 아 있 던 적 은 5 월 1 5 일 에 한 명 도 남김없이 모두 물러갔고, 그날 중국군의 선봉 이 총병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부로 들어갔으며, 청도의 적은 5월 16일에 도망하였는데 평안 좌방 어사 박명현(朴名賢), 의병장 조호익(曺好益), 별장 박종남(朴宗男)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임진왜란에 곳곳에서 활약했던 기록 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어 공의 용 맹 함 을 알 수 있 다 .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光海君)이 세자 (世子)로서 조정을 나누어 거느리고 군사를 어루 만지면서 공을 호행장(護行將)으로 삼았다가 승 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병조참의(兵曹 參議)로 발탁하였는데, 이는 무관 반열에서 최고 의선발이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진주 목 사(晉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그때 왜적이 부산 (釜山)으로 물러가 웅거하고 있었다. 진주는 영 남(嶺南)과 호남(湖南)의 요로(要路)에 위치해 있어 군사의 사무가 복잡하였고 요구하는 것도 갖가지로 많았으나 공이 차분히 수응하여 여러 장수들의 마음을 잃지 않았는데,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 齡)과가장친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공이 관 찰사(觀察使)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자 원수 (元帥)가 자기의 막하(幕下)에 두었다. 어느 날 김덕령 등을 불러 그로 하여금 공과 같이 무예 를 겨루어 보도록 하였는데, 공이 항상 과녁을 꿰뚫었으므로 원수가 공을 응양도별장(鷹揚都 別將)으로 삼았다. 그 뒤 해안에서 싸울 때마다 공이 세운 공로가 가장 많았다. 이순신이 조정 에 요청하여 공을 주사 조방장(舟師助防將)으 로 삼아 연해안 다섯 고을을 떼어 관할하도록 하였고 그 뒤 한산(閑山)ㆍ장문(場門)ㆍ영등 (永登)ㆍ견내량(見乃梁)의 전투에 참여하여 모두 승전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이 참소를 받아 하옥(下獄)된 바 람에 공의 공로도 드러나지 않고 말았다. 상주목 사(尙州牧使)ㆍ광주목사(廣州牧使)를 거쳐 회 령부사(會寧府使)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북방의 백성이 왜적에게 빌붙어 두 왕자(王子)를 붙잡아 그들에게 주어 미끼로 삼고 있어 조정에서 걱정 하였기 때문에 회령에 임명한 것이었다. 공이 방 도 있게 어루만지고 방비하니, 오랑캐들도 귀의 한 자가 있었다. 그런데 대사헌(大司憲) 홍여순 (洪汝淳)이탄핵하여해임하였다. 공이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 6월 10 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나 양주(楊州) 마산(馬山) 자좌(子坐)의 자리에 묻히었는데, 부인 이씨(李 氏)도그곁에묻히었다. 공의 부인 정부인 태안이씨는 군수(郡守) 이 세준(李世俊)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바로 풍천 부사(박영신)이고, 둘째 아 들 박영민(朴榮民)은 일찍 죽었고 큰딸은 최사 순(崔士恂)에게, 둘째 딸은 진사(進士) 서몽열 (徐夢說)에게 시집갔다. 풍천 부사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박지병(朴之屛)은 봉사(奉 事)이고 둘째 아들 박지원(朴之垣)은 첨사(僉 使)이고 셋째 아들 박지번(朴之藩)은 현령(縣 令)이고 넷째 아들 박지용(朴之埇)은 병사(兵 使)이고 딸은 군수(郡守) 이문주(李文柱)에게 시집갔다. 풍천부사 휘 영신은 이괄의 난 때 순절(1624) 한 충신이고, 그의 부인 정부인(貞夫人) 광주(廣 州)이씨는 열녀이고, 아들인 휘(諱) 지병(之屛) 은 국가적으로 역적이며, 집안의 원수인 이괄(李 适)의 수하 장수인 이수백(李守白)을 처단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은 효자로 마을 입구에 삼정문 이세워졌다.(다음호소개예정) 공의 사후 1613년(광해군 5) 임진왜란 당시 분조 (分朝)를 운영하던 광해군을 도운 공로로 갈충진성 위성공신(竭忠盡誠衛聖功臣,3등)에책록 되었다. 공의 충효(忠孝)와 청렴(淸廉)은 천성으로 타고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슬퍼하 고 사모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길 적에 뜻을 어긴 적이 일체 없었다. 오랫동안 먼 변방에 있자 항 상 선영의 생각이 간절하여 명절을 만날 때마다 저녁 내내 슬퍼하였다. 누차 주(州)와 부(府)를 맡았으나 기와 한 장도 경영하지 않았고 논 한 두락도 늘어나지 않았다. 육적(六籍, 육경(六 經))을 모두 꿰뚫고 자사(子史)에 두루 통달하 여 문장이 뛰어났다. 글을 가르쳐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사양하지 않았고 병풍이나 족자를 써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큰 잔으로 술 한 잔을 마신 다음에 써주었다. 주량(酒量)이 매우 컸으나 자제할 줄을 알았는가 하면, 앞서 지 않고 뒤로 물러나 군자(君子)의 기풍이 있었 다. 특히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고 임진왜란에 용맹 함이 세상에 떨쳐 충절(忠節)의 표상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1613년(광해군 5) 모두 80명을 공신으로 책봉 하였는데 1등은 최흥원(崔興源)·정탁(鄭琢)·윤 두수(尹斗壽)·이항복(李恒福)·윤자신(尹自新)· 심충겸(沈忠謙) 등 10명으로 갈충진성동덕찬모 좌운위성공신(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衛聖功臣) 이라 하였고, 2등 17명은 갈충진성동덕찬모위성 공신이라 하였으며, 3등은 박종남을 비롯한 53명 을갈충진성위성공신이라하였다. 이들 공신 중에는 환관·액정관(掖庭官)·서리 등도 다수 포함되었으며, 이미 호성공신(扈聖功 臣)에 책봉된 자도 20명이나 된다.공신에게는 각 각 등급에 따라 은·마필·노비·토지를 지급하였는 데, 공신으로 책봉된 자 가운데 이미 사망한 사람 이 많았으므로 그들의 자손이 대신 받기도 하였 다. 상훈으로 등급별 차등하였는데 3등에게는 영 정을 그려 후세에 전하고 초계일작(자신은 물론 부모처자의 계급을 1계급 높임)하여 품계를 1계 더 가자(加資)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장자는 세습 하고 영세토록 사유의 특전과 반당(호위병) 6인, 노 비 3 구 , 구 사 (관 노 ) 3 명 , 밭 2 0 결 , 은 5 량 , 표 리 (表 裏,임금이 내린 옷의 안감과 겉감)1단, 기마(騎 馬)1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이 훈호는 광해군 이폐출됨과함께삭탈되었다. /자료제공박병수갈충공파종친회장 /사진·글 정리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 anmail.net) 충신갈충공박종남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원세계(先元世系) 갈충공종중묘원- 경기도남양주시양정로219번길51-37. 갈충공의生涯 갈충공휘종남공의묘소, 넓은묘역에잡풀하나없어후손 들의정성을엿볼수있다. 갈충헌-묘원이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여 제사(祭舍)를 짓지 못해후손들이매일오가면서묘역을관리하며선조의유덕 을흠모하는장소로이용되고있다. 맺음말 위선공신교서-위교서는유몽인한성좌윤에게내려진교서로보물제1304호로지정되어있다.이문서는종서78행으로임진왜란 직후에조정에서내려진문서로서당시공신에게내려진교서의형태및그사례연구에도움이된다.전라남도고흥군고흥읍호동리 운곡사에소장되어있다.갈충공은3등으로18번째 기재되어있다. 갈충공파종중임원진이묘원의잡초를제거하면서공의묘 역과 행장을 설명하고 함께하고 있다. 왼쪽부터 병수 회장, 종묵직전회장,홍교고문순(順) [위성공신衛聖功臣]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