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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4월30일 목요일 12 (제160호) 기획 뛰어난문재와온후한성품으로조선중기의한문4대가로불렸던택당이식,월사이정구등과교류하며당대 의문인들에게높은평가를받았던지 포박돈선생,당파에휩쓸리지아니하면서받았던불이익도모두잊은채오직애민으로봉직했다. 타고난자질이순수하고아름다웠으며,덕성이온후하여사람들이선망하였으며,그가길인(吉人)이며군자(君 子)임을알수있었다.평생토록염량 세태(炎凉世態)를따르고시류에편승해거취를정하는것을달가워하지않았던까닭에벼슬이현달하지못했 다. 월사이정귀는선생을보내면서애도의만시를보내왔는데선생과두터운교분과선생의평소삶이반영되었 으며,그리고함께어울렸던많은시인 묵객들을통해올바른선비로서의삶을살았음을알수있었다.또그가남긴시문은이제후학들에의해‘지포 선생유고(之浦先生遺稿’)라는이름으 로세상에빛을보게되었다.특히선생이12세에동무들과맺었던오동계(五同契,甲契)서문과계헌(契憲)을 보면친구를사귐에있어중요한메시 지를전달하고있어함께실어본다.공의 휘는 돈( 똴)이고, 자(字)는 거원(巨源)이 며, 호(號)는 지포(之浦), 본관은 밀성(密城)이 다. 충헌공(휘 척) 后 고려 정용장군(精勇將軍) 휘 성진(成進)의 후예로 대대로 고관(高官)을 배 출한 가문이다. 6대조인 지돈령부사(知敦寧府 事) 휘 갱( 곧)이 공정대왕(恭靖大王) 정종(定 宗)의 장녀 함양군주((咸陽君主)와 혼인하여 관 찰사 휘 서창(徐昌)을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공 의 5대조이다.고조부의 휘는 위(緯)로 벼슬은 제 용감 봉사(濟用監 奉事)를 지냈고, 증조부의 휘 는 만령(萬齡)으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 고, 조부의 휘는 영(英) 으로 장사랑 (將仕郞)이 며, 부친의 휘 는 운 정 (云禎)으로 사 헌 부 집 의 ( 司 憲 府 執 義)에 증직 되었으니 3 대 가 모 두 벼슬에 나아 가 지 않 고 학행(學行) 을 닦 는 데 몰두하였다. 모친 안동김 씨는 충렬공 (忠烈公) (金方慶, 1212~1300)의 후손이고, 현감 (縣監)을지낸김완(金浣)의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19) 7월 29 일 태어났다.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 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그 후 음보(蔭補) 금오 랑(金吾郞, 의금부도사)을 지내다가 승진하여 사 옹원(司饔院) 직장(直長), 주부(主簿), 공조(工 曹) 좌랑(佐郞), 정랑(正郞)을 지냈으며, 태인현 감과강서현령을역임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5) 증광시(增廣試) 16등(전 체26등)으로 합격하여 이조의 낭관(郎官)이 그 를 청요직(淸要職)의 후보자로 추천하였으나,안 타깝게도 강서현령으로 있던 1613년(광해5년) 모함을 당해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사건에 연루 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국문(鞠問)을 받았다가 이 내 풀려났으나 이로 인해 당시 집권자들이 그를 거슬려 했으므로 밀려나 형조정랑 겸 춘추관기주 관에 제수되었다. 이후 함경도사, 예조정랑, 제용 감 청정, 부안현감, 광흥창 수(廣興倉守)를 역임 하였다. 천계 병인년(1626, 인조5) 천안군수에 임명되 었다가 이듬해 파직되어 여주에 있는 자신의 농 장으로 돌아왔다. 이때 이후로는 다시는 벼슬하 지 않고 현곡 정백창(玄谷 鄭百昌), 소암 임숙영 (疏庵 任叔英), 택당 이식(澤堂 李植)과 함께 강 가를 거닐며 교유하였다.또 휴옹 정홍익(休翁 鄭 弘翼)과 늘 국사를 의논하며 함께 탄식하였으나 끝내뜻을이루지는못했다. 계해년(1623, 광해15)에 오랑캐가 북쪽 변방을 침략하니 공을 발탁하여 변방을 안찰(按察)하는 어사(御使)로 삼았다. 3월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에 제수되어 돌아 오라는 명을 받았다. 사간원은 조선시대 임금에 게 간언(諫言)하는 일을 맡은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 사간원((司諫院)을 합쳐 이른 바 ‘삼사(三司)’라고 하였는데, 이 삼사의 관원에 임명되는 것은 그야말로 벼슬아치로서 영광이요 출세의 지름길이었다.그러나 사은숙배하기 전에 다시 북막(北幕, 함경도 병영)으로 부임하게 되 었으니 아마도 반정공신 중 재상 자리에 있던 누 군가의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이 북인(北人)이 아니었음에도 당시 반정세력에게 배척당한 까닭은 유희분, 정영국 등 핵심 북인세 력과의 오랜 친분이 원인으로 추측된다. 당시 그 의 이러한 처지를 두고 절친한 벗 이정귀가 송별 사에서 그의 심정을 위로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如何又踏咸關(여하우답함관, 어찌하여 또 힘 든 함경도 길 가게 되었는가)只是危班着足難(지 시위반착족난,그저 위태로운 조정에는 발붙이기 어렵다네)』 선생은 이 해 겨울에 사직하고 벼슬에서 물러 난 후 연이어 서장관(書狀官), 접위관(接慰官)으 로 차출되었지만 신병으로 인해 면직되었다. 또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지만 다시는 조정에 나아 가지 않았다. 공이 임종할 적에 아들들에게 이르 기를 ‘명정(銘旌)과 신주(神主)에는 관직을 예조 정랑(禮曺正郞)이라고만써라’고하였다.한다. 공은 숭정 갑술년(1634, 인조12) 9월 11일 병으 로세상을떠났으니향년71세였다. 지포 선생의 벼슬살이는 불우하였지만 당대 여 러 명사들과 꾸준히 교유를 이어갔으니 바로 어 릴 적 동갑내기 친구인 월사 이정귀(月沙 李廷 龜), 폐호 권반(閉戶 權盼), 대사간 이호신(大司 諫 李 好 信 ) 등 1 2 명 의 여 러 선 비 들 과 함 께 오 동 수 계(五同修契)를 결성하였으니,‘오동(五同)’이라 고 이 름 짓 게 된 계 기 는 첫 째 로 사 는 곳 이 같 고 , 둘째로 생년이 같고, 셋째로 취향이 같고, 넷째로 공부하는 학사(學舍)가 같고,다섯째로 인원수와 나이가 12로 똑 같기 때문이다. 이 오동계는 나중 에 36인 규모(사대부 33인+서리 3인)의 큰 동갑 계로 확대되었는데 이 중 북인세력에 붙었던 유 희분, 정영국, 김질간 등 3인은 인조반정 이후 정 치적인 이유로 동갑계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이 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고, 교분도 두터웠던 인물은 바로 월사 이정귀이다. 현재 남아있는 지 포선생의시문중에서 월사와 주고받은 것이 가장 많으며, 그의 사후 월사는 36구에 달하는 긴 만사 (挽詞)를 남겨 그 애통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하 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덕성이 온후하여 조정과 재야에서 그를 길인(吉 人)이며 군자(君子)라고 우러러 보았다. 평소 소 박하고 조신하였으며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따 르고 시류에 편승해 거취를 정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으므로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으나 당대 의 이름난 문인들과 교유를 맺으며, 당대의 여러 편의시문을남겼다. 지포 선생은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월사 이정귀 를 비롯하여 당대의 이름난 문인들과 교유를 맺 었다. 그러나 그의 시문의 양은 추측만 있을 뿐 안타깝게도 사후에 그의 저작이 제대로 수집·정 리되지 못하여 결국 문집이 간행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다만 그가 동갑내기 벗들과 함 께 동갑계(同甲契)를 결성하여 활동하면서 여러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문을 수록한 수창집(酬唱 集)과 그 동갑계의 계첩(契帖)이 그의 후손가에 필사본으로 여전히 보존되어 뒤늦게나마 유고 (遺稿)를 정리하여 나름 형태를 갖춘 문집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그래서 그 의 문집이 선조의 업적을 현창하기 바라는 후손 들의 열망과 여주시청, 여주박물관 등 여러 기관 들의 후원에 힘입어 국역(國譯)을 거쳐서 그의 사후 근 380여 년이 지난 2018년 ‘지포선생유고 (之浦先生遺稿)’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어다행스러운일이아닐수없다. 지포선생 유고집은 후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 수창집인 『갑계제공창화(甲契諸公唱 和 ) 』 와 『 회 갑 연 육 원 수 창 운 ( 回 甲 筵 六 元 酬 唱 韻)』, 필사본 계첩인 『동경계첩(同庚契帖)』이며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묘도문자(墓道文字) 등도 따로번역하여실었다. [오동수계(五同修契)] 지포선생이 12살 되던 해 월사 이정귀(月沙 李 廷龜), 폐호 권반(閉戶 權盼), 대사간 이호신(大 司諫 李好信)등 12명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맺은 갑계(甲契)이다. ‘오동(五同)’이라고 이름 짓게 된 계기는 첫째로 사는 곳이 같고, 둘째로 생년이 같고, 셋째로 취향이 같고, 넷째로 공부하는 학사 (學舍)가 같고, 다섯째로 인원수와 나이가 12로 똑 같기 때문이다. 이 오동계는 나중에 36인 규모 (사대부 33인+서리 3인)의 큰 동갑계로 확대되 었으나 이 중 북인세력에 붙었던 유희분, 정영국, 김질간 등 3인은 인조반정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동갑계에서제명되었다. 오동계의 주요 목적은 신의를 다지고 상부상조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계절 뜻있는 지기(知己) 가 모여 시문을 논하고 가정사를 나누는 모습은 상상그자체가아름다운일이다. 우리 주변에는 대를 이어 지켜 온 계가 있다 14 78년 맺어진 ‘안동우향계’, 1565년 ‘영암구림대동 계’를 비롯 ‘봉화 와선정계’ 등 이들 계의 특징이 지역의 향약을 선도해오고 있고, 특히 붕우유신 (朋友有信)을 기초로 하며 도의로 교유하고 관리 로서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애민 애족 하며 변치 않는 우정을 이어 오고 있어, 물질만능주의라 하 는 21세기 친구로 인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사 람들에게좋은본보기가될듯싶다. [갑계서문(甲契序文)] 아! 우리들이 이 계(契)를 결성한 것이 어찌 우 연이겠는가. 고금(古今)의 역사가 이처럼 공활한 데 같은 세대를 함께 살고, 사방천하가 이처럼 광 대한데 같은 나라에 살고 있으며, 나라 안 백성이 이처럼 많고 많은데 같은 해에 함께 태어났다. 그 러니 태어난 날짜의 선후나 신세가 곤궁한지 영 달한지는 진실로 따질 것도 없다. 기질이 서로 같 아서 한마디 말로도 교분을 맺은 자들이 30명이 넘으니, 첩(帖) 하나에 차례대로 이름을 적고는 함께동고동락하길약조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모임이 쇠하지 않은 것은 다만 이러한 우정을 일찍부터 맺었기 때문이니, 과연 우연히 아니로다. 저 죽림(竹林)의 혜강( 子 康)과 완적(阮籍)은 청허(淸虛)함을 숭상했을 뿐이고 난정(蘭亭)의 왕희지와 사안(謝安, 중국 문인)은 풍류를 사모했을 뿐이다. 그래서 혜강이 세상을 떠나자 죽림에 그늘이 사라졌고, 왕희지 가 죽자 난정을 폐허가 되고 말았으니, 한때 어울 린 사적은 있어도 그 우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 갑내기로 뜻을 같이한 우리 친구들도 따라서 계 를 만들었으니 그 정은 형제와도 같다. 생전에 우 리가 길이 사이좋게 지낼 것은 걱정할 필요 없겠 지만, 혹여 우리가 죽은 뒤에 후손들이 그 영향을 멀리멀리 이어가지 못할까 걱정이다. 그러니 각 자가 후손들을 잘 타이르고 경계하여 옛 우정이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하리라. 그리하여 죽림에 생 기가 돌고 난정에 봄이 다시 찾아오게 한다면 어 찌아름답지않겠는가! 만련 44년인 병진년(1616) 정월 모일에 월사 이정귀취하여쓰다. 註- 죽림의 혜강과 완적 : 혜강과 완적은 중국 서진의 문인들로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문인들로 이른바 죽림칠현의 일원이다. 이들은 함께 어울리며 청담(淸談)을 나누었는데, 평소 기행으로 이름난 완적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정 중하게 찾아와도 백안시(白眼視)였지만 혜강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오면 반가운 눈으로 맞이했다고한다. 경오년(庚午年) 강신(講信) 할 적에 의논하여 정하다. 첫째, 봄·가을에 강신을 하는데 유사(有司)가 모임 날짜에 앞서 회문(回文)을 발송하면 각자 약간의 술과 간단한 안주를 가지고 정해진 장소 에 모인다. 모임 때 쓸 그 릇 을 진 설 (陳 設 )하 는 것 은유사가조치한다. 둘째, 유사는 3인인데 1년 단위로 강신하는 날 에 서로 교대한다. 교대할 적에는 따로 술과 고기 안주를 준비하되 양이 너무 많지 않게 한다. 사정 이 생길 경우에는 계장(契長)이 발의하여 다른 인원 중에 선출한다. 그 소임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에는일제히나서서벌을내린다. 셋째, 사상(四喪)이 나면 서로 도와주니, 곧 부 (父)·모(母)·자신(自身)·처(妻)의 상이다. 죽은 이를 대신하여 계원이 되고 싶어 하는 경우에는 들어주되, 동생이나 자녀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 다. 넷째, 부고를 들으면 즉시 유사가 회문을 발송 하고 쌀 1말을 성복(成服)하기 전까지 상가에 보 내준다. 계원들은 성복하는 날까지 호상(護喪)하 고 발인할 적에는 문까지 전송하며 각자 건장한 종을 1명씩 자출해 상여를 따르게 한다. 반혼(返 魂) 할 적에는 모두 교외로 나가서 맞이하며, 장 사할적에는각자치전(致奠)한다. 다섯째, 계원이 외직(外職)으로 나가게 되면 유사가 떠나는 날짜에 앞서 회문을 발송하며 각 자 약간의 술과 간단한 안주를 가지고 정해진 장 소에묘여전별연을한다. 여섯째, 계원중에 외직을 맡은 사람은 부임한 후 3개월 안에 각자 차등 있게 정목(正木,상등 품 질의 무명)을 보내니 3품 이상은 3필, 2품은 4필, 3품 이하는 2필이다. 만약 3개월을 넘기면 한 달 마다 1필씩 추가한다. 서울에 있는 아문(衙門, 관 아의 총칭)으로 출사(出仕)하더라도 1필을 보낸 다.이와관계된일은모두유사가담당한다. [갑계발문(甲契跋文)] 우리 집은 동리(洞里)에 있었는데 동갑내기 12 명이 있었고, 나이도 12살이었다. 그래서 종종 백 곡(栢谷)의 송정(松亭)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이 를 계기로 계(契)를 결성하여 그 이름을 ‘오동계’ 라 하였으니 사는 곳이 같고,생년이 같고,취향이 같고, 공부하는 학사(學舍)가 같고, 인원수와 나 이가 12로 똑 같기 때문이었다.날마다 글 짓는 모 임을 가졌는데 때로는 가마를 탄 귀한 손님을 대 접하듯이 하였고, 서로 나란히 손을 붙잡고 의젓 한 모습으로 길에 나섰다. 그러면 사람들이 동쪽 마을 기동(奇童)들의 무리라고 지목하며 칭찬하 였으며, 만날 때마다 수레를 멈추고는 예를 표하 고 나서 지나가곤 하였다. 나이가 18세가 되자 화 악산의 중흥사(重興寺)로 봄나들이를 했는데 또 래의 사림 중에 생년이 같은 6명이 추가로 계에 가입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을 술 마시고 시 짓는 자리에 참석 시켰는데, 도성 사람 들이 우리를 영주(瀛州)에 오른 선인(仙人)이라 불렸다. 나 이 가 3 6 세 가 되 자 계 원 중 에 이 미 대 과 ·소 과 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따로 삼청동에서 성대한 연회를 벌렸는데 이날 상급 계원 15명과 하급계원으로 서리 3인이 추가로 가입하였다. 전후로 36인이니 건궁(乾宮) 의 수를 상징하고 이어서 교태(交泰, 주역 괘를 뜻함으로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을 가리킨 다.)의 뜻을 보여 주는데, 더불어 동고동락하며 골육(骨肉)처럼 친밀하게 지내자는 것일 뿐 별다 른 뜻 은 없 다 . 경오년(庚午年, 1630) 가을에 안백온(安伯溫) 이 실무를 맡았을 적에 주변을 돌아보니 생사(生 死)의 감회가 생겼고, 또 불행한 일도 있어서 3명 의 이름을 삭제하게 되었다. 이들은 용납하기 어 려운 자들이어서 좋은 일에 마가 낀 셈인데, 명성 에는 흠이 생겼지만 오는 자를 막지 못하는 실수 는 선현도 면하기 어려운 법이니 어찌 속상해 할 것 있겠는가. 늙은이들이 몇몇 살아 있지만 함께 할 날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 것이며, 함께 하지 않은 들 또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그러니 서 로를 저버리지 말고 더욱 우정이 돈독해지도록 힘쓰는것이나의큰소망이다. 나진(懶眞)이호신(李好信)쓰다. 지포 선생의 삶을 되돌아보면 염량세태(炎凉 世態)를 따르고 시류에 편승해 거취를 정하는 것 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니 선비다운 삶이라 할 수 있겠다. 물질만능주의 속에 일시적인 영달을 위 해 줄을 서고, 또는 남을 모함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들어서는 우리 종중에서 도 수시로 목격할 수 있다.분명 잘 못되어가는 일 임에도 아첨하며 따르는 무리들이 종중을 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지포 선생의 삶이 파 동이되었으면한다.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아가 별시인 증광시에 합격하였고,그리고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반전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올곧은 선비정신과 공명을 멀 리한 탓에 순탄한 길을 걸을 수 없었음에도 야합 하지 않았다. 특히 당대의 거유 문인들과 교유하 면서 아름다운 시문을 남겼으니 우리나라 문학발 전에도크게기여하였음분명한사실이다. 선생의 정신과 사상이 길이길이 이어지길 기대 해 보며 월사 이정귀가 선생의 영면을 애도해 하 며보낸만시를곁들여마무리해본다. 『동쪽 반촌(泮村)에 함께 살았지/ 어릴 적엔 학문을 놀이 삼고/ 총죽(蔥竹)으로 서로 어울 렸지/ 인생은 이별과 만남이 있고/ 세상인연은 부침이 있지만/ 한번 이별하면 그 언제 만날꼬/ 늙은 몸이라 각자 놀랍고 두렵네/ 올봄에 나를 찾아 왔을 때/ 옛이야기 하며 서로 손 붙들었네 / “내 벼슬살이에는 본래 흥미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뿐이라네 이제 그저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여태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지냈구려 가을 되면 함께 고행으로 돌아가 하루 종일 즐 겁게 지내세나”/ 내 이말 들은 뒤로/ 때가 되기 만을 목 놓아 기다리며/ 행여나 다시 정답게 모 여서/ 서로 의지하며 지는 달 바라고/ 남쪽 거 리와 북쪽 거리를/ 함께 왕래하기를 바랐었네/ 그런데 얼마 뒤 편지가 와서/ 조금 병이 났다는 소식 들었고/ 누군가도 자네 몸이 안 좋다고 하 기에/ 심부름꾼 시켜 약도 부쳐주었네/ 책상 위 엔 그대 편지 수북하고/ 그대 목소리도 내 귀에 생생하건만/ 누가 알았으랴, 잠깐 사이에/ 그대 이 세상 떠날 줄을/ 이 늙은 몸 홀로 세상에 남 았으니/ 쓸쓸이 그 누굴 의지 하리오/ 옛날 집 쪽을 향해 앉아서 여강(驪江) 바라보며 통곡 하 누나/ 해로가 한편 짓노라니/ 눈물 말랐어도 슬 픈 마음 그치질 않네』 註 해로가 : 만사(挽詞)를 지칭하는 말이다. 부 추 위 에 맺 인 이 슬 처 럼 덧 없 이 지 는 인 생 을 슬 퍼 하는 노래로, 본래 한고조(漢高祖)에게 반기를 들다 패망한 전횡(田橫)의 죽음을 애도하는 곡이 다 . 그 내 용 은 “ 부 추 위 에 맺 힌 이 슬 어 찌 그 리 쉽 게 마르나. 이슬은 말라도 내일 아침에 다시 내리 겠지만 사람은 한 번 죽어 떠나면 언제 돌아오리 오.”이다. /참고자료‘지포선생유고’제공박인선 /글 편집 박상섭 편집국장 parksss1012@hanm ail.net) 지포 박 돈( 之浦朴똴)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생애(生涯) 지포선생묘소-경기도여주시현암동528-4(수촌).지포선생묘표. 지포선생유고(之浦先生遺稿) 갑계제공창화((甲契諸公唱和). 동경계첩. 계헌육조(契憲六條) 맺음말 회갑연육원수창운(回甲筵六元酬唱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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