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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배장군은 서기 1921년 신유 4월 18일 문경시 흥덕동 665번지에서 김복진(金福鎭)과 경주손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시니 시조 김녕 김공시흥(時興)의 29세손이시다. 장군은 1934년 호서남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산구현립농업학교(山口)로 유학하셨으며 1941년에는 단양우씨(丹陽禹氏) 원분(元分)과 결혼하여 슬하에 창후(昌厚) 송조(松朝)의 1남1녀를 두시다. 해방을 맞은 조국은 온 국민과 기쁨과 희망이 컸으나 사회는 매우 혼란하였던 바 장군은 장차 조국의 간성이 되어 헌신코자 군문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육군사관학교 제5기로 입교하여 군번 10828번을 부여받고 1948년 졸업과 동시에 육군소위로 임관되시다. 1949년 8월에는 소령으로 승진되어 제6사단 7연대 1대대장으로 보임되어 강원도 오대산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시다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자 최전방 대대장으로서 초전을 분투하고 춘천, 홍천, 원주, 신림, 음성 등지의 전투에서 연일 연전고투 하였으며 특히 1950년 7월의 음성전투에서는 동 부대가 최대 전과를 올리게 되어 개전 이래 최초로 부대장병 전원이 1계급 특진하는 사상초유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장군도 중령으로 특진하시다. 장군의 고향인 문경지역 전투에서는 주력부대장으로서 이화령을 지나 백화산, 분지리, 옥녀봉, 황학산, 성주산, 평전치 등과 뇌정산, 옥녀봉, 조봉, 불정산, 수정봉 등지를 연하는 선에서 15일간이란 긴 기간에 걸친 유례가 드문 격전중 용전분투 끝에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 지연시켜 국군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시다. 때는 바로 촌각이 황금과도 같은터이라 그 공훈의 혁혁함은 말할 여지가 없으며, 이는 장군의 고향수호에 대한 절대적인 애향심 발로의 일면이라고 보아진다. 이어 남하하면서 영천 신령 등지의 최후의 격전을 거쳐 상주, 문경, 단양, 충주선과 화천 금화선을 거쳐 계속 북진하여 원산을 탈환하고, 1950년 5월 25일 오후 2시 15분에는 최북단 초산에 최선봉으로 진출하여 압록강에 태극기를 게양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동안의 공훈으로 화랑.충무.을지무공훈장을 받았으며, 1951년에는 제6사단 19연대 및 7연대 부연대장을 역임하고 동년 6월 12일에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전군에서 가장 전통이 빛나고 명성이 높은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부임하시다. 때마침 북진중이던 동연대를 지휘하여 연일 연전연승하면서 춘천 북방까지 진격하여 강원도 양구군 군량리에서 중공군 제5군단 1개연대와 교전하게 된 토평리 전투에서 진두지휘중 적의 직격탄에 의하여 장열히 전사하시니 때는 1951년 신묘 7월 2일 오후 1시 40분이었고, 장군의 나이 방년 31세이셨다. 국가는 동년 10월 5일 장군의 높은 공을 기려 육군 준장으로 추서하고 이 나라 최상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으며, 제7사단에서는 북한강에 건립한 교량을 용배교라고 명명하다. 장군의 유해는 잠시 양산 통도사에 안치하였다가 후일 문경군민장으로 선산인 산양면 반곡리로 이장하였으며, 1972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하여 영면케 하다. 장군은 과묵침착한 성품에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으며 탁월한 전투지휘력을 갖춤으로서 상하동료로부터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받은 명실공히 용지를 겸한 덕장으로서 조국과 고향을 사랑하고 수호한 참된 군인이요 애국자이시다. 장군은 동난발발 이후 전사하실 때까지 13개월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진중에서 오로지 전투지휘만을 하셨으며, 6.25동란중 일선 연대장인 대령으로서는 유일한 전사자이기도 하며 그가 세운 전투공적과 호국애족의 숭고한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국가는 호국의 인물로 지정하여 온 국민과 함께 추모토록 하였으며, 이는 6.25동란 기간을 망라하여 호국의 인물로 지정된 6명중 한 분이시기도 하다. 장군의 숭고한 애국심과 호국의 헌신은 청사에 창연히 빛날 것이며, 문경시민을 위시한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새겨져 오래도록 우리가 나아갈 바 참된 등불이 되시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사표가 될 지어다. 우리의 오늘의 영광과 안녕이 장군과 같은 호국의 수호신 음덕임을 회상하면서 백척간두의 조국과 고향을 수호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강력한 적에 맞서 신명을 바친 격전장인 이곳 조령산하 고향땅에 모든 기관과 시민의 뜻과 정성을 모아 장군을 기리는 상과 추모의 비를 세우고 삼가 우리 모두 옷깃을 여며 장군의 영전에 머리숙여 명복을 비나이다. 바라건데 이 곳 주흘산 아래 우뚝서시어 생전에 사랑하던 고향 문경과 조국 대한민국의 안녕과 번영이 이루어지도록 길이길이 보살피고 지켜주시는 영험한 수호신이 되소서. 서기 2001년 7월 2일 장군 서거 50주기에 즈음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