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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9 여는글 6·25전쟁은 유엔에 의해 창설된 합법적인 국가인 대한민국에 대해, 북한·소련·중공의 공산주의 국가가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공격한 불법적인 남침전쟁이자, ‘국제전쟁(international war)’이었다. 얼 핏 보면 6·25전쟁은 남·북한간의 단순한 전쟁처럼 보이기도 하나, 이는 세계 25개국(한국 포함 자유우방국 22개국, 공산주의 국가 3개국)이 개입한 국제전쟁으로 참전한 병력만도 수백만 명에 달하는 대(大) 전쟁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소규모 전쟁이 아니라, 참가국 수 및 병력면에서 볼 때 제1·2차 세계대 전에 버금가는 대규모 전쟁이었다. 따라서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주요 연합국들이 참전한 세계전쟁의 양상을 띠게 됐다. 또한 6·25전쟁은 소련과 중공의 조종과 지원을 받은 북한이 도발한 불법전쟁에 대응하여,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국가가 유엔 헌장(UN Charter)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국제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기꺼이 참전한, 자유 수호를 위한 전쟁이었다. 그 결과 유엔에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6·25전쟁 약 3년 동안 16개 국가에서는 전투부대를 파병하였고, 5개국 에서는 의료지원 및 시설을 보내 연인원 195만 명이 참전하여 약 4만여 명의 꽃다운 젊은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 간 전쟁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 들어보지도 못했던 나라에 와서 인종도, 피부색도, 언어도, 관습도 각기 다른 군인들이 오로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살을 에 는 듯한 살인적인 추위와 적도의 작열하는 폭염 같은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60년 전 그때 그날 바로 이곳 한반도의 낯모르는 산하(山河)에서 싸우다 장렬히 산화했다. 북한의 남침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의 무력공격을 받은 한국 정부는 즉시 이 사실을 당시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엔 한국위원단(UNCOK)과 주한 미국대사관에 통보하면서 유엔과 미국 으로 하여금 북한의 남침행위를 즉각 중지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미국도 한국에서의 전쟁 사태를 유엔 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유엔은 6월 25일(뉴욕시간)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6·25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은 그때의 결의안을 통해 강력한 의지를 과시함으로써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는 북한 공산 침략자들이 순응해 주 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 침략자들은 유엔 안보리의 ‘6·25결의’를 무시하며 침략 행위를 멈추지 않 았다. 한편 서울 함락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유엔 한국위원단은 “북한이 유엔의 결의안을 준수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조기에 한국 정부가 전복될 수 있다.”는 비관적인 보고서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했다. 이에 따라 유엔 안보리는 “그들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한국에 모든 지원을 제공할 것”을 골자로 하는 ‘6·27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으로 미국은 한국 에 군대를 파견할 법적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 이외의 다른 유엔 회원국과 자유 우방국가도 한국에 필 요한 원조를 제공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유엔 회원국의 군대 파병제의와 유엔의 후속조치 유엔 안보리의 6·27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해·공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어 한국 에 대한 군사지원을 제의한 유엔 회원국이 늘어났다. 먼저 영국에 의해 지도되고 있는 영연방 국가들이 여기에 앞장섰다. 영국은 항공모함을 비롯한 군함 8척의 파견을 통보하였고, 호주는 해군 군함 2척과 공군 1개 대대의 파 병을 제의하였다. 또 서유럽 국가인 네덜란드도 군함 1척의 파견을 제의했다. 이때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자유중국 정부(현재 대만)도 3만 3,000명의 지상군 파견을 제의했으나, 미국이 정치적 문제와 대만의 전투력 약화 등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한편 이들 국가 이외에 다른 유엔 회원국들에 의한 추가 파병 제의가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유엔 사무총장 리(Trygve Lie)는 1950년 7월 14일 유엔 안보리 결의를 지지한 유엔 회원국에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게 되었다. 6 ·25전쟁과 유엔군 자유 수호를 위한 21 개국의 헌신과 희생 1950년 12월 흥남 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