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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건청궁 119 했다”라고 보고하여 일본군의 개 입을 명시하였다. 영국 여행가 이 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1898년 출간한 『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외 교관과 선교사들의 증언을 종합 하고, 히로시마 법정 판결문 일 부를 인용하여 미우라 고로의 지 휘 아래 범행이 이루어졌음을 강 조하였다. 독일 언론 역시 1895 년 「Merseburger Kreisblatt(메르 제부르크 군 관보)」에서 왕비 시 해 소문을 보도하였다. 일본 내 부에서도 사실 은폐는 불완전하 여, 사건 다음 날 조선 주재 일 본 영사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 口九萬一]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 에서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라 고 기록하였다. 프랑스 언론 「Le Journal Illustré(르 주르날 일뤼 스트레, 삽화신문)」은 1895년 10 월 27일 자 표지에 왕비 시해 장 면을 삽화와 함께 ‘조선 왕비의 암살(Assassinat de la reine de Corée)’로 명명하면서 유럽 사회 에 충격을 안겼다. 이처럼 각국의 외교 문서와 언론은 명성황후의 폭력적 죽음과 일본 세력의 개입 을 공통으로 지적하며, 건청궁의 참극을 조선사의 비극을 넘어 제 국주의 국제질서 속의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하였다. “건청궁, 그 기억의 장소” 을미사변 이후 건청궁은 급격 히 쇠락하였다. 1907~1909년 사 이 일제 당국은 건청궁을 철거하 고, 후일 그 자리를 조선총독부 미술관으로 전용하였다. 광복 후 에도 건청궁은 원형을 잃은 채 방 치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 복원 사업이 추진되었고, 2006~2007 년 장안당과 곤녕합, 옥호루 등이 복원되어 오늘날 일반에게 공개되 고 있다. 복원된 건청궁은 고요했다. 화 려함은 사라지고 단아한 기단과 담장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 는 다시 경복궁 깊숙한 곳, 건청궁 의 문 앞에 섰다. 그러나 이 침묵 속에는 130년 전의 비극이 응축되 어 있다. 건청궁은 단순한 전각이 아니라, 근대사의 상흔을 간직한 역사적 현장이요, 단순한 복원 공 간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을 증언 하는 기억의 장소이다. 여기저기 서 일본어가 들려온다. 나는 문득 묻는다. ‘저 관광객들은 130년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을까.’ 다시금 “역사는 승 리한 자의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경구를 되새기 며,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프랑스 언론 『Le Journal Illustré』의 「 L`ASSASSINAT DE LA REINE CORÉE」 보도 기사(WIKIMEDIA COMMONS 제공)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버밍 햄대학교 대학원에서 응용언어학을 전공한 후, 이화여 대 교양영어강사, 교육부 행정사무관, 전쟁기념관 학 예사로 근무했다. 논문으로는 「셰익스피어의 Hamlet 에 나타난 희극적 요소 고찰」, 「이중 언어 학습자의 영 어사전 사용법 사례연구」가 있다. 주요 저술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Pearl S. Buck 정신을 기리 며」, 「수주(樹州) 변영로(邊榮魯) 시인이 추구한 유토 피아(Utopia) ‘시’와, 그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술’」, 「수리남 참전 용사들을 기억하며」, 「Silent, but Unforgotten Heroes: Mexico」, 「명예로운 휴전 (Honorable Armistice)」 등의 글이 있다. 필자 윤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