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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 (당시42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2년 2월 충남 청양 출생 1987년 2월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9년 2월 서울 동작구 의료보험조합 입사 1989년 5월 서울지역의료보험노동조합 창립. 초대 법규부장으로 70일 파업 지도 1990년 2월 서울지역의보노조 사무국장 1992년 지부 투쟁으로 해고 1996년~1997년 사회보험노조 본조 상집위원으로 활동. 노사합의로 원직복직 1997년 12월 사회보험노조 서울본부 본부장 당선 2000년 7월 1일 마포건강보험공단 파업농성으로 구속 2001년 3월 석방 2001년 5월 사회보험 해복투 공단 앞 농성 및 현안발생지부 순회투쟁 시작 2001년10월 비리 원흉 박태영 이사장 이임식 저지 투쟁 2001년 12월 해복투 순회투쟁 및 박태영 이임식 저지 건으로 수배 2004년 1월 10일 수배 중 충북 영동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음 2004년 2월 13일 운명 |23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노동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서울지역의료보험노조 창립 후 법규부장,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열성적 인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해고되기도 했던 동지는 복직 후에도 사회보험노 조 서울본부장을 역임하며 노조활동을 벌였다. ’00년 6월, 박태영 이사장이 부임하여 노동조합에 무쟁의선언을 강요하고 노 동조합의 반발을 악용, 공권력투입을 요청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였으며 공단은 비리부패의 거대한 집단먹이사슬로 조직화되었다. 동지는 이러한 노조탄 압에 반발하였고 9명의 동지들과 함께 해고칼날에 희생되었다. 이후 박태영의 노조말살 정책은 235명의 대량해고, 500여명의 대량징계, 수백 명의 고소고발 남발, 노조원에 대한 무차별 원거리 전보, 노조통장 압류 등 끝이 없었다. 또한 노조를 무력화시킨 후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으며 부패와 불법으로 거둔 돈은 사적 경비로 쓰였음은 물론이었다. 이후 물품구매계약, 승진대가 금품 수수로 당시 핵심요직의 임원, 간부들이 구속되었음에도 부패비리구조의 정점에 있었던 박태영은 수사도 받지 않았다. ’01년 10월, 박태영은 전남도지사 출마를 위해 이사장직을 사직했다. 부패비리 의 원흉이자 노조탄압 주범인 자의 전남도지사 출마를 인정할 수 없었던 동지는 박태영의 이임식을 저지하려 했고, 이 건으로 고발당한 동지는 긴긴 수배생활로 들어갔다. 해고된 후 40살 늦깍이로 시작한 동지의 신혼생활은 8개월만에 끝이 났다. 수 배생활은 그 흔한 건강검진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고단한 수배생활과 출생도 보 지 못한 아이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동지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고통에 지쳐 처음 병원을 찾은 것이 사망하기 바로 한달 전이었다. 28세에 의료보험조합에 입사해 공단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과 해고투쟁 으로 청춘을 아낌없이 바친 동지. 동지는 박태영을 정점으로 한 심복들이 부패비 리로 챙긴 돈으로 기름진 배를 살찌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장기수배를 겪 으며 엄청난 스트레스와 열악한 건강관리로 고통을 받다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 이했던 것이다. 끝내살리라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