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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하에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때(1월 20일) 유생들의 추대로 의병대장에 오른 선생은 당시 삭발하고 부임하는 춘천 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서면 탑동(안보리)에서 잡아들여 처형하는 등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먼저 의세를 떨치고 전국에 격문(격고팔도)을 보내 기의를 촉구하는 동시에 무과 출신 종조 이면수를 군사장으로 삼는 등 3천여 명으로 늘어난 춘천의진을 새롭게 편성하여 가평의병과 함께 서울 진격에 나겄다. 마침내 2월 3일 가평의 벌업산(보납산)에서 급파된 관군(친위대 중대장 신우균 김구현)과 격전을 벌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패산하여 춘천 약사현(죽림동) 뒷산으로 퇴진하자 선생은 종형인 이진응에게 의진을 맡기고 지평현 감역인 맹영재에게 원병(포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잡힌 바 되어 의암 유인석이 보낸 정익과 이찬익의 도움으로 2월 17일 제천의진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런 전황에서 의병대장을 맡은 직헌 이진응은 추격해 온 관군과 약사현에서 공방전을 벌인 끝에 2월 8일 전사하였으며 이어서 의병대장이 된 종제 이경응은 서울 진격을 꽤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자 5월 초 잔여 의병 2백여 명을 이끌고 한때 강릉의진과 제천의진에 합세하였다. 한편 제천의진으로 합류하여 군중사무대강을 짓고 참모(군무도유사)로서 역할을 감동한 선생은 원주 근처 배양산 기슭에서 은거하다. 1898년 요동 통화현 오도구로 가서 척화의거사실대략을 서술하는 등 망국 3년 여 만에 귀국하였다. 기후 1903년에 제천으로 이주하여 친일적인 일진회에 대항한 선생은 군내에서 향약을 설행한 탓으로 곤욕을 치렀으며 1909년 청풍으로 옮겨 은신하였으나 국치 후 일경에게 체포 구치되어 온갖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갑오개혁 이래 신제에 따르지 않고 호적에도 입적치 않을만큼 배일 의식이 철저했던 선생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1911년 5월 유홍석 유인석 등 사우 종족과 더불어 요동 회인현 대황구로 망명하여 20년간 관전현 등지로 전전하면서 의암을 비롯한 지사들과 본토 수복의 방략을 모색하시다가 1930년 4월 23일(음 3월 25일) 몽고 사한지대인 경인현 제오구 민가 둔와사에서 향년 79세로 서거하니 선생의 시신은 그곳에 권조한 후 1943년 제천 봉양면 공전리로 반장되었고 1946년 제천 자양영당에 배향되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선생의 학문 각 사상을 담은 유고는 후학들에 의하여 1969년에 습재집으로 간행되었다. 이제 조국 광복의 성전에 위국사신하신 선생의 피 맺힌 위훈을 깊이 각명함은 실로 오늘을 경계하고 내일의 귀감으로 삼고자 함이다.
서기 2001년(단기 4334년) 중하 강원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이구용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