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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2025년 10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文堂)을 개조하여 서양식 2층 건 물인 관문각(觀文閣)이 세워졌고, 이는 외국인 고문들의 거처로 사 용되면서 궁궐 내 서양식 건축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관문각은 1901년에 철거되었으나, 건청궁 이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창구였 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흔적으로 평가된다. “1895년 10월 8일, 비극의 새벽”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바로 이 건청궁에서 일어났 다. 을미사변의 발생 배경에는 청 일전쟁 이후 동아시아 정세의 급 격한 변동이었다. 일본은 승전의 결과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주도권을 확보했으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遼東半 島)를 반환하며 국제적 좌절을 겪 었다. 이에 대한 보상 심리와 전략 적 필요는 곧 조선침략 강화로 집 중되었다. 명성황후는 이러한 일 본의 압박을 견제하고자 러시아와 의 연대를 강화하였고, 일본은 소 위 ‘을미개혁’을 통해 내정을 장악 하려 했으나 고종과 황후의 저항 은 계속되었다. 결국 주한 일본공 사 미우라 고로[三浦梧 楼 ]는 황후 를 자국 대륙정책의 걸림돌로 간 주하고 ‘제거’를 결행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건청궁 은 일본군과 낭인(浪人, 부랑배) 수 십 명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은 곤 녕합으로 난입하여 황후를 수색 하였고, 황후는 시녀들과 함께 몸 을 피했으나 끝내 붙잡혀 살해되 었다. 시신은 훼손된 뒤 불태워졌 는데, 이는 조선왕조와 우리 민족 의 존엄을 짓밟은 정치적 만행이 었다. 이 충격은 곧 고종으로 하여 금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 한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으며, 국 제사회 또한 일본의 침략적 행태 를 주목하며 강하게 비난하였다. 그 결과, 1896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따라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은 단순한 사 건이 아니라, 내부 권력의 위기와 국제 정세의 격변이 교차하는 순 간 조선이 선택한 적극적 대응이 었다. 이는 왕조 생존을 건 치열한 외교 전략의 표현이자, 조선의 운 명을 가른 중대한 분수령이었다 “세계가 목격한 조선의 치욕” 을미사변은 조선 내부의 권력 사건을 넘어 국제사회의 비판적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사건 직 후 러시아 공사관은 본국에 전보 를 보내 “일본 병사들이 왕비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실행 왕의 공간 장안당 왕비의 공간 곤녕합과 옥호루(이상 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