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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2025년 3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②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의 거짓 동양평화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몇 번의 총성이 나고 69세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제의 거물 정 치인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다. 그리고 사망으로 이어졌다. 이토 를 저격한 인물은 한국의 민족운 동가 안중근. 28세의 안중근은 왜 ‘동양평화’를 부르짖으며 만주를 찾았던 일본의 영웅이라고 하는 이토를 포살했을까? 이토는 1905년 11월 15일 을사 늑약을 광무황제에게 강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지키려 면 한국과 일본이 튼튼히 맺어져 야 합니다.” 위의 말대로라면 이토는 을사 늑약의 목적이 동양평화에 있다 는 것이다. 그런데 이토를 포살한 뒤인 1910년 2월 7일에 안중근 (재판 당시는 안응칠)은 이토를 포 살한 이유를 동양평화를 위해서 라고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 은 대한국 의군 참모 중장으로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 해 한 일이오.” 안중근과 이토는 똑 같이 동양 평화를 원했지만 그 실상은 달랐 다. 안중근은 한국 · 중국 · 일본이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하는 동양 평화였지만, 일본은 자신들이 중 심이 되기를 원했다. 결국 일본의 속내를 알게 된 안중근 의사는 기 만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토의 배신에 대한 복수의 저격을 감행 한 것이었다. 역사적 심판이었다. 일본의 영웅으로 남의 나라를 침 략하던 이토 히로부미는 차가운 이역의 땅에 쓰러진 것이다. 그러 나 이토에 대한 일본에서의 추숭 은 여전하다. 장충단에 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찰 건립한 사이토 마코토 이토 추모 사업은 한반도에서 도 있었다. 3대와 5대 총독을 역 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1929년 12월에 서울의 장충단 일 대에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사찰 인 하쿠분지[博文寺]를 세웠다. 원 래 이 지역은 광무제가 갑신정변 에서 희생된 순국자와 을미사변 으로 숨진 명성황후의 혼을 달래 기 위해 1900년에 세운 초혼단(招 魂壇)이었다. 일제는 1910년 8월 에 장충단을 폐지하고 1910년대 후반부터 공원화하기 시작했는 데, 사이토는 이 곳에 을미사변의 배후로 명성황후 시해를 사주한 이토의 추모 사찰을 건립하기 시 작했던 것이다. 하쿠분지의 정문 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 門)을 뜯어와 경춘문(慶春門)으로 이름을 바꾸어 세웠다. ‘春’은 이 토의 호인 춘무(春畝)에서 따온 것 으로, 경춘은 이토를 경하한다는 의미이다. 사이토는 이처럼 아주 몹쓸 짓을 했다. 그 밖에도 사찰의 자재는 조선 의 궁궐을 해체하여 보충하였다.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 이 사용되었다. 하쿠분지는 이토 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다. 낙성식을 할 때의 조선총독은 6대 우가키 가 즈시게[宇垣一成]였고, 조선인들 을 포함한 천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하쿠분지가 세워진 뒤로도 1937년에는 일본군 ‘육탄 3용사’ 의 동상이 세워졌다. 현재 하쿠분 지의 터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