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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編 서원 , 제단 · 기념관 • 121 3. 서쪽(중국) 7~. ~美承 鴻三f土 黃 功 햇|‘先甲 楊福吉 裵三生 王文祚 王以文 빼11漢山 (왕미승 풍삼사 황 공 정선갑 양복길 배삼생 왕문상 왕이문 유계산) 三. 신위의 신상내역 1. 한국 측 선위의 신상내역 (이하 dawn 사전-백과사전에서 검색 전재) 가. 김상헌(金尙憲) : 157이선조 3)-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영수이며, 병자호란 때는 끝까지 주전론(j二 i따채)을 주장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댔度) 호는 청음(淸陰) . 석실산인(石室111Á) . 서 까노인(西뼈老人)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극효(克孝)이고, 형이 우의정 상용(尙容)이다. 윤근 수(p根壽)의 문인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 · 좌랑 · 부교리 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 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기-독서(없뼈펌휩)한 뒤, 교리 · 응교 ·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1615년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 겼聖王尼冊封話命짧恩、쫓文〉 이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1624년(인조 2)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 · 대사성 · 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포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減論)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피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 -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 려났다. 귀국 뒤 좌의정 · 영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 버 군의 이념적 상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그씨에도 능했으며, 특히 동기창체(옳其됩體)를 잘 썼다. 저서에 〈청음집 > . <야인담록 땀人談錄> . <풍악문답 뿔댐問答〉 등이 있다. 1653년 영 의 정 에 추증되 었다. 1661년 효종 묘에 배향되고, 양주 석실서원(石室훨院) , 정주 봉명서원(鳳嗚뿔院), 의주 기충사(紀忠洞) , 광주 현절사(顯節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나. 홍익한(洪寶漢) : 157이선조 3)-1652(효종 에.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O.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벼1).운옹(雲켰) . 병자호란 때 주전파c-t戰派)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로 끌려가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