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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선생은 안동의 전통적인 반가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익혔다. 1919년 서울 중동학교를 다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안동군 예안면의 만세운동에 앞장 섰다. 1920년부터 안동지역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동아일보』안동지국을 경영하던 그는 1920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설립에 적극 참가하여, 편집부 간사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무대를 서울로 옮겨 1922년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노동연맹회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1923년 4월에는 동 연맹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6월 경성고무공장 여공들의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그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경성고무 여공 동맹파업의 전말‘이란 보도문서를 작성하고 78개 노동단체에 발송했다가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1923년 11월에 안동으로 내려와 권오설·이준태·안상길 등과 더불어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하며 소작농의 권익보호를 위해 활동하였다. 풍산소작인회는 회원이 5천명에 달하는 국내 유수의 농민운동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의결기관인 총회와 집행기관인 집행위원회 체계를 이루면, 각 면 단위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각 동에는 다시 총대를 두어 마을을 반 단위로 조직하는 등 견고한 조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될 때 교섭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25년 화요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화요회 조직과 함께 안동에서도 사상단체 설립을 주도하여 화성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화성회는 안동지역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무렵 화요회가 추진했던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경남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8월 9∼10일 이틀 동안 친일·극우 인물들이 형평사 예천지회 사무소를 파괴하고 사상자를 발생시킨 사건이 일어났는데, 조선일보 특파원으로서 그 전말을 연일 보도해 형평사운동에 대한 전국적 지원을 이끌어 냈다. 그는 1926년 봄 고려공산청년회 안동야체이카를 조직하였으며, 6·10만세운동으로 파괴된 조선공산당 재건에 힘을 쏟았다.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핵심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신간회 경성지회에 참가하였다. 그러던 중 1928년 6월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