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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건청궁 117 있다. ‘건청’은 ‘하늘은 맑다’라는 뜻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사대 부가의 사랑채와 안채를 본뜬 배 치를 취했다. 남쪽에 문과 담장을 두고 들어서면, 서쪽에 왕의 생활 공간인 장안당(長安堂 ‘장안’ : 오 랫동안 평안하게 지냄), 동쪽에 왕 비의 생활공간인 곤녕합(坤寧閤 ‘곤녕’ : 땅이 편안함)이 자리하고 두 건물은 복도로 이어져 있다. 장 안당은 국왕의 접견과 집무 공간 으로 총 27칸 규모로 정면 7칸의 대청과 누마루, 뒤편의 침전 정화 당으로 구성되었다. 곤녕합은 대 청과 온돌방, 침방, 그리고 부속 누각인 옥호루(玉壺樓 ‘옥호’ : 옥 으로 만든 호리병)가 포함되었다. 건청궁의 주변에는 복수당(福壽 堂), 녹금당(綠琴堂) 등 부속 건물 과 정원이 배치되었으며,건청궁 전체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은밀 한 생활공간을 이루었다. 이곳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10년 정도 생활했다.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면서 조선 왕실 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고, 이 에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 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俄 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건청궁은 그 후 1909년 일제에 의해 곤녕합 과 장안당을 비롯한 주요 전각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역(宮域)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그 터에는 일 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미술관 이 건립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훼 손과 방치가 이어졌으나, 2007년 에 사료와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건청궁은 단순한 전통 전각이 아니라, 근대 문물 수용의 실험무 대였다. 1887년에는 조선 왕궁 최초의 전기등소가 설치되어 장안 당, 곤녕합, 향원정 일대가 전등으 로 밝혀졌다. 이는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의 건의를 받아 추진된 것으로, 미국 에디슨 사(Edison Electric Company) 소 속 기술자 매케이(H.W. McKay) 가 설치를 담당하였다. 당시 전기 등은 조선 사회에서 ‘물불’ 또는 ‘건달불’로 불리며 큰 화제가 되었 다. 이어 1888년에는 국왕의 어 진과 책보를 봉안하던 관문당(觀 건청궁 전경(국가유산청 제공) 건청궁 입구(필자 촬영) 건청궁에 설치된 전등 (영훈당 홍보관,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