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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⑨ 117 과물은 아닌 셈이다.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23일, 노량진역 앞에서 만 세운동이 벌어졌다. 3월 23일 은 서울 외곽지역에서 동시다 발 만세운동이 벌어진 날이었 다. 이때 서울 외곽인 한강 이남 에서도 노량진을 비롯하여 영 등포, 당산리, 양평리, 양진리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 노량진의 만 세운동은 오후 8시 30분 무렵부 터 9시 무렵까지 벌어졌는데, 그 참여 규모를 일제의 『매일신보』 (3.25)는 300명으로 기록했고, 독 립운동가들이 발간하던 『조선독 립신문』 제8호(3.24)에는 4천~6 천 명으로 보도했다. 이때 노량진 에서도 4명이 연행되었다는 일제 의 기록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그 신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애석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노량진역 광장에서 노량진3·23만세운동의 역사 흔적을 찾을 길이 전혀 없으 니 말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명동성당 가톨릭 회관에 있 던 가톨릭노동청년회(약칭 가노 청)가 노량진으로 이사 온 것은 1975년이었다. 가노청은 영등포 산업선교회와 더불어 1970년대 군사독재시절 민주노조의 상징으 로 불리던 원풍모방 노조를 비롯 한 민주노조를 지원하던 대표적 인 종교단체였다. 원풍모방 노조 는 노량진에서 가까운 신대방동 에 있었는데, 이곳에도 가노청과 연결된 소모임이 많았다. 1970년 한국모방 시절 결성된 ‘무궁화팀’ 이 최초의 가노청 소모임이었다. 1975년부터 원풍모방 노조의 수 석부지부장을 맡아 방용석과 함 께 노조를 이끌었던 ‘선한 싸움꾼’ 박순희도 가노청의 ‘투사’였다. 사육신역사공원에서 만나는 독립 운동가 함석헌과 김광섭 노량진에 있는 대표적 역사 현 장은 사육신묘와 사육신신도비가 있는 사육신역사공원이다. 이곳 사육신역사공원에서도 두 분의 독립운동가가 남긴 글을 만날 수 있다. 하나는 공원 입구의 벽에 새 겨져 있는 함석헌(1901-1989)의 ‘의(義)’를 강조한 글이고, 다른 하 나는 공원 안에 있는 사육신 육각 비(1954년 건립)에 새겨져 있는 김광섭(1904-1977)이 쓴 비문이 다. 함석헌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이자 1960- 7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도 자로 활동한 인물이고, 김광섭은 중동학교 영어교사 시절 학생들 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옥살 이를 한 분으로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시인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네 분의 후손 노량진 등에서 전개된 3월 23일의 만세운동 을 보도한『조선독립신문』제9호 노량진역사 안에 세워져 있는 철도시발지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