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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⑧ 117 한 경우도 있었다. 김익상 의사 본적지 터 아현동주민센터 앞에 ‘김익상 의사 본적지 터’ 표지석을 세운 이 유는 김익상(1895-1941)이 송씨 와 결혼하면서 세 들어 살게 되면 서 새롭게 만든 본적지가 인근의 공덕리 286번지였기 때문이다. 1921년 9월 12일, 의열단의 김 익상은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하여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로 들어 간 다음, 건물 2층의 비서과와 회 계과에 폭탄을 투척하여 조선총 독부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인물 이다. 폭탄 투척 직후 2층으로 올 라오는 헌병에게 “2층으로 올라 가면 위험하다”는 말을 남기고 유 유히 빠져나온 그는 감쪽같이 중 국 상하이(上海)로 빠져나갔다. 1922년 3월 28일, 김익상은 상하 이 황포탄(黃浦灘) 부두에서 의열 단 동지 오성륜, 이종암 등과 일본 육군대장 다나까(田中義一)를 저 격하려다 성공하지 못한 채 끝내 체포되고 말았다. 김익상은 황포 탄 의거 이틀 전 동지에게 “딸을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 겼다. 김익상이 체포된 후 딸 점석 이를 키우며 힘겨운 삶을 살던 송 씨 부인은 애석하 게도 김익상의 동 생 준상이 자살한 이듬해인 1926년 을 끝으로 점석이 와 함께 어디론지 사라져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되 었다. 1936년에 석방된 김익상은 주 로 이태원 조카집에 머물렀다. 해 방이후 언론에 보도된 조카의 증 언에 따르면 김익상은 1941년 일 제의 탄압을 피해 충북에 은신했 다가 서울로 올라오던 중 노량진 에서 용산경찰서원에 발각되어 격투까지 벌였지만, 이미 조선사 상범 예방구금령이 내려진 상황 에서 또 다시 경찰에 체포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한강철교에서 ➌ ➌  독립유공자 김수현의 부음을 알리는 언론사 보도 기사(동아일보, 1985.3.25)  ➍  김수현의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단체사진(빨간 원 표시, 중국 치장[綦江], 1940.6.17) ➍ ‘김익상 의사 본적지 터’ 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