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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윤영미(월간 「순국」 편집위원) 1895년 10월 8일, 일본 만행의 생생한 현장 근대 문물 수용과 외교 활동의 무대 근대사 비극이 응축된 역사 현장 130년 전의 교훈 잊지 말아야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북측 후원 에 별궁 성격의 생활·정무 복합공간으 로 조성된 건청궁은 대한제국기 근대 문 물 수용과 외교 활동의 무대였다. 그러 나 1895년 10월 8일 새벽, 명성황후가 일본군과 낭인들에게 시해된 ‘을미사변’ 의 참극이 바로 이곳에서 발생하였다. 올해로 그 사건은 발생 130주년을 맞았 다. 건청궁은 단순한 궁궐 전각이 아니 라, 제국주의 침탈과 한국근대사의 상흔 을 간직한 ‘기억의 장소’이다. 경복궁 속의 또 다른 궁 건청궁(乾淸宮) 116 2025년 10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조선의 마지막 개혁을 담은 전각” 경복궁(景福宮)의 중심인 근정 전과 교태전은 많은 이들에게 익 숙하다. 그러나 서북쪽 후원 깊숙 한 곳에 자리한 건청궁은 상대적 으로 덜 알려져 있다. 당시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親政)을 시작하며 왕권 강화 를 도모하고, 서구식 개혁을 모색 하였다. 건청궁의 건설은 경복궁 중건 (1865~1867)이 끝난 지 불과 몇 해 뒤인 1873년에 이루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건청궁은 국가 재 정이 아니라 고종의 내탕금으로 지어졌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 쓰고 비밀리에 공사가 진행되었 다는 사실은, 이 건물이 단순한 생 활공간을 넘어 근대적 개혁과 외 교의 무대이자 국왕의 정치적 의 지를 드러낸 상징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후 명성황후가 국정을 주 도하면서 건청궁은 중요한 정치· 외교 공간으로 자리하였다. 19세기 말 청일전쟁에서 일본 이 승리하자 조선의 자주권은 심 각하게 위협받았고, 이를 타개하 기 위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교 적 모색은 이곳에서도 이루어졌 다. 건청궁은 개혁과 외교, 그리고 저항이 교차한 정치적 현장이자 한국 근대사의 전환기를 증언하 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작지만 깊은 세계” 건청궁은 1873년에 왕과 왕비 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궁 안의 궁으로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