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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함에 흔연히 동지들과 규합하여 항일만세운동에 선봉 되셨다가 일경에게 피검되어 온갓 고초를 다- 당하고 과중에 학교에서 출학 당하자 해외로 망명을 결심하셨으나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지 못하여 뜻을 못 이루자 지사께서는 조국 광복의 민족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미취학 농민 자제들에게 야학을 가르치기 시작함에 주경야독의 문맹퇴치운동에 발분망식한 지사의 노력이 인근 부락에 알려지매 배움의 열은 더욱 가해져서 수가 점점 많아지자 지금의 공회당을 동민협조로 건립하여 영농개량 급 생활 개선교육 등 민족자주의 힘을 향상 도모하는 한편 일제의 강제 공출에 항거하는 등 한민족 통치상 불요부당한 만행에 단호히 항거한 사건은 비일비재하다. 이와 같은 투쟁 중에도 민족 산업 경제력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미호천 제방공사이다. 이 공사로 현재의 광활한 정봉 평야는 정봉 신촌 서촌 학천 사인 석화 등의 주민생활 터전인 문전옥답을 마련한 것은 공께서 자비로 각계 요로에 끈질긴 진정과 설득으로 노심초사한 결실임에 이 장한 공적과 민족독립을 위한 희생적 업적과 공덕 그리고 선견지명과 선각자적 투쟁사를 이 고장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지사께서는 생전에 그토록 갈망하시던 대한독립을 광복 불과 1년 남겨놓고 서기 1944년 1월 28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셨으니 이 얼마나 통한한가. 이와 같은 끝없는 조국애와 피맺힌 항일투쟁 경력은 모교인 청주농업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나라사랑 기념비에도 표기되어 있고 또한 독립기념관 제5호관에도 광주학생사건 기념사진이 게시되어 있으나 진즉 우리 고장에서는 그 표적을 찾아볼 수 없는지라 자에 우리 정봉 동민 일동은 지사의 거룩하신 정신과 혁혁한 공덕을 오래도록 후세에 전하고 기리기 위하여 늦게나마 여기에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