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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온천의 역사. 유성온천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백제시대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날개에 상처를 입은 학 한 마리가 뜨거운 온천수에 날개를 적시며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전쟁터에서 만신창의 된 외아들을 치료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이는 비록 전설에 지나지 않지만 유성온천의 역사를 말해주는 단초가 된다. 따라서 이 전설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첫째 그 약의 효험이며, 둘째 온천수의 발견의 시대적 배경이며, 셋째 당시 유성이 어떤 곳인지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성온천의 역사는 백제시대로 소급된다. 전설의 배경인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대전이라는 백제의 동부전선에 나가 싸움에 참여하고 신라군에 끌려가 성을 쌓는 돌을 나르다 부상을 당하여 탈출해온 아들의 이야기는 그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말해준다. 백제 동성왕은 공주의 동쪽, 즉 한밭 동부 능선에 성을 많이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한 왕으로 유명하다. 유성과 관련된 전설의 시대적 배경은 동성왕을 전후로 한 이야기가 아닌가 추측된다. 유성 봉명동의 너른 들판을 속칭 진터벌이라고 한다. 흙이 길어서 진터라고도 했겠지만 여기 진터벌엔 백제시대 병사들 이 진을 치고 전투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온다. 따라서 유성 일대는 최전선인 동부 능선을 앞에 두고 예비 부대를 주둔시킨 지역이라 하겠다. 전투부대를 훈련시켜 교체하기도 하고 병참 기지와 부상 당한 병사들을 치료하는 진중 치료소가 있던 곳이 유성이 아닌가 추측된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이 지역은 편안한 날이 없었다. 3년간 계속된 백제부흥운동으로 지역민들은 전투에 참여했다. 대전, 유성 지역에선 진잠, 기성, 외삼, 보문산 계족산 일대 그리고 월평동에서 백제의 병사와 주민들이 농성을 벌였다. 월평동에 있기 때문에 월평동산성이라고 부르는 산성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노사지성 또는 내사지성이다. 산성 위에 있는 장대지 에서 내려다 보면 유성, 연구단지, 월평동 주거지역, 갑천 하류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 갈마동에서 유성으로 빠지는 도로를 살필 수 있는 위치이다. 『삼국사기』에 노사지성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땅에서는 3년간 부흥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일부 부흥군들이 이 산성에서 진을 치고 격렬하게 항거해 신라는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신라는 김흠순 등 맹장 19명과 휘하 장병들을 급히 파견해 공격을 가해 가까스로 평정했다." 이같은 내용으로 보아 공주로 들어가는 이 길목이 얼마나 전략상 중요한 위치 였나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유성 일대는 최전선의 배후마을이었으며 항상 전쟁과 관련이 깊었다. 유성이 역사상 본격적으로 등장해 전국적으로 관심을 끈 것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새수도를 건설 하기 위해 이곳에 들르면서부터 이디. 이성계는 고려를 쓰러뜨린 후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쓰다가 2년 뒤 조선이란 이름을 채택했다. 나라이름을 뒤로 미룰 망정 새 수도 건설에 대해선 비상한 정력을 쏟았다. 즉위식을 올린지 1개월도 안되어 천도 명령을 내렸다. 처음에 천도 후보지로 한양을 채택했다. 그러다가 대전 인근인 계룡산 주변 신도안 땅에 관심을 둔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였다. 계룡산에 신도를 건설하기 위해 내려 온 태조는 심신의 피로를 풀기 위해 유성온천에서 목욕을 했다. 태조가 온천욕을 할' 정도이고 보면 이미 유성온천 지역엔 민중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태조의 행차 이후 에도 태종이 임실현에서 군사훈련을 지도하다.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 유성온천에 묵으면서 심신을 달랜 적이 있다. 태조는 유성에 들르면서 유성구 노은동에 있는 왕가봉(또는 왕좌봉) 기슭을 지났다. 왕은 잠시 이 산기슭에서 쉰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왕의 가마가 지나간 산봉우리라 하여 왕가봉이라고 불렀다. 태조의 아들 태종 이방원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군이 진을 쳤던 유성 진터벌에 진을 쳤다. 이때 태종은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자신은 온천에서 목욕을 했다. 그리고 노은동에 있는 왕가봉에 올라가 진터벌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군사들을 내려다 봤다. 그후부터 왕가봉은 왕좌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유성은 조선초기 왕실과 인연을 맺고 각광을 받게 되었다. 유성이 본격적으로 근대화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 되면서부터이다. 이후 대전은 교통·상업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이와 같은 주변 변화에 따라 유성온천은 휴양지로서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