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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⑧ 115 도를 대표하는 대의원 11명이 출 석 한 조 선 공산당 제3차 당 대 회 가 열 린 곳은 아현 리의 한 농가 (537번지, 김 병환 집)였다. 아현역에서 이 대역 쪽으로 200여 미터 정도 떨 어진 곳에 있던 이 집에서 차금봉 (1898~1929)을 책임비서로 하 는 제4차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 년회의 진용도 갖추어졌다. 인근 미근동 출신으로 미동보통학교 를 졸업하고 노동자생활을 시작 한 차금봉은 기관차 화부로 일하 던 1919년에는 동료 노동자를 이 끌고 3·1운동에 참여했는가 하면, 아현청년회 집행위원장과 신간회 경서지회 간사를 맡는 등 마포 일 대와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 다. 그해 12월에 체포된 차금봉이 고문휴유증으로 1929년 3월 10 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다 음 안장된 곳도 인근 공덕리 공동 묘지였다. 한편, 이때 정비된 고려공산청 년회(책임비서 김재명)는 산하에 학생위원회(책임비서 김복진)를 설치하였다. 이유는 3·1운동 10 주년이 되는 1929년 3월 1일에 맞춰 학생을 대중의 선두대로 하 는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 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보를 탐 지한 일제 경찰이 1928년 7월부 터 대대적인 검거를 벌임에 따라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비화 되었고, 다시 조직이 붕괴되면서 만세운동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 고 말았다. 마포경찰서와 동교동 ‘김대중 집 폭발물 사건’(1971) 1971년 1월 27일,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의 동교동 집 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발 생했다. 대통령 선거가 벌어지기 불과 석 달 전에 발생한 사건이었 다. 수사를 맡은 마포경찰서는 ‘김 대중 후보 측에서 세상 사람들의 동정을 얻기 위한 자작극일 가능 성’에 초점을 맞췄다. 신민당과 김 대중 후보 측은 강하게 반발하였 다. 경찰은 김대중 후보 측 관련자 에 대한 집요한 회유와 협박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결국 김대중 후 보의 조카인 김홍준(당시 청운중 2년)에게 고문을 가하여 허위 진 술을 강요한 끝에 구속하였다. 하 지만 김홍준은 구속적부심 끝에 “구속 사유에 대한 자료가 미흡하 여 구속이 부당”하다는 담당 판사 의 결정으로 석방되었다. 결국 ‘김 경성공립직업학교 학생 임용태의 수형자 기록 카드(국사편찬위 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임용태가 전파한 애국가 가사(출처 「불온 가시사건에 관한 건」). 다만 ‘大漢(대한)’ 은 ‘大韓(대한)’의 오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