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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최봉기, 엄정섭, 김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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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李秉徹) 1899~ / 국내항일 / 건국훈장 애족장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중앙기독청년회를 중심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그는 1919년 4월 자신의 처 경하순을 비롯하여 김원경.최숙자 등 기독교계통 여학교 출신 여성들을 지도하여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동 부인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여성단체의 초기 활동은 회원들의 자수 등으로 얻어진 자금모집이 주된 것이었고, 자금은 투옥 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에 대한 구조.후원에 사용되어졌다. 한편 그는 1919년 5월초 상해로부터 귀국한 조용주.연병호 등과 뜻을 모아 외교활동을 독립운동의 행동지침으로 표방하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고, 총무의 일을 맡아 활동을 주관했다. 특히 동단 운영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을 조달함으로써 재정적 지원에 큰 힘을 미쳤다. 또한 그가 지도하던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조직을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연결시켜 조직 확충에도 힘을 쏟았다. 이와 함께 동년 6월에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와 혈성단애국부인회를 하나로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발전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지원 활동에도 활약을 하여 1919년 8월경 임시정부로부터 경기도 애국급수합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동년 9월에 그는 이종욱과 함께 상해에서 설립된 대한적십자회외의 국재 지부로서 대한적십자회 대한총지부를 설치하고, 앞서 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의 유기적 관련 속에서 적십자 활동을 가세시켜 운동 방향을 강화해갔는데, 이병철은 대한총지부의 간사를 맡았다. 이러한 활동의 추진과 함께 이병철 등 청년외교단의 중심 인사들은 동년 10월초 동단이 조직을 확대.개편하기로 결정하고 그 명칭을 배달청년당으로 개칭하기로 했다. 이때 조직개편의 기본방침은 청년외교단과 비슷한 성격의 활동을 펴는 각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계획을 실천하기 직전인 동년 11월말 동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피체된 그는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항소했으나 1921년 1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됨으로써 원심대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최봉기(崔琫基) 1894.04.01~1975.08.04 / 국내항일 / 대통령표창 1919년 10월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동지규합과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경북 문경읍 신분면에서 '조선독립에 관한 건'이라는 운동비 출자권유서를 만들어 복사지로 2통, 묵필로 1통을 작성하여 시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다. 3개월여의 옥고를 치르고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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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섭(嚴正燮) 1985.11.27~1960.06.11 / 국내항일 / 건국훈장 애족장 엄정섭은 1915년 음력 7월 15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박상진 등 200여명의 맹원과 함께 광복회에 가담하였다. 1917년 10월 장두환 등과 상의하여 충청남도를 3구역으로 나누어 독립운동 자금모집을 위해 각군의 부호들을 사전에 조사해 두었으며 11월초순경 예산군 광시면 김한종의 집에서 우이현 김재창 김경태와 함께 회합한 자리에서 우이현으로부터 권총 2정을 넘겨받고 독립군 자금을 모집할 것을 지시받았다. 11월 9일 엄정섭을 김재창 김경태와 함께 아산군 도방면 장용급의 집에가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여 금 13원을 모금하는 등 1917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서 충남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주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의대(金義大) 1892.1.29~1925.7.20 / 3.1운동 / 건국훈장 애족장 1919년 4월 1일 장연면 오가리 주민 백여명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연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의 일부를 파괴하였다. 그날밤 같은 마을의 서당교사인 김의현의 집으로 주민들을 모이게 하여 다시 면사무소를 습격할 것을 계획하고, 김의현과 함께 인근에 추점리.광진리.방곡리.조곡리로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라는 통문을 작성하여 보낸 결과 양신집.김일곤.지도원.정해문 등의 동지가 가세하였다. 4월 2일 밤 각리로부터 2백여 명이 집결하자, 그는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모두 부수고 집기와 문서 등을 파기하였다. 이때 파기된 서류는 때마침 강풍에 날려 이웃인 연풍면과 상모면까지 날아갔으며, 시위 군중들은 다시 면장 사택을 습격하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었으며 그해 11월 16일 고등법원에서 1년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