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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2024년 5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02회) 만세시위는 이날 오전 11시경부터 시작되어 오후 까지 계속되었다. 홍면옥의 동생이자 송산면 서기 홍 준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날 오후 4시경 송산면 사강리 주민 약 200명이 송산면사무소에 몰려와 면장 홍달후(洪達厚) 이하 면 서기 5명에게 대한국 독립만세를 고창하라 요구했 다.” 사강리 홍명선(洪明先)은 또한 “3월 26일 송산리 사람 100명 가량이 정오경부터 일몰 때까지 마을을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며, 해가 질 때까지 시위 가 계속되었음을 증언했다. 송산면 사무소와 주재소 부근에 모여 태극기를 흔 들며 독립만세를 부른 일동은 대열을 지어 서신면으 로 행진하며 계속 독립만세를 불렀다. 밤 11시가 되 어서야 해산했다. 이날의 사건이 “급습”으로 과장되어 일제 어용신 문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26일 백여명의 군중이 면사무소를 급습하였으나  즉시 해산시키었더라.” 송산면 만세시위는 호세 납부일에 구장(區長) 집에 서 계모임을 표방하여 시작되었고, 거기에 동력을 받 아 이틀 뒤 사강리 장날인 3월 28일에도 계속되었다. 검사가 홍면옥에게 다시 물었다. “대한독립만세의 목적은 무엇인가?” “독립이 된다고 하여서 경축하기 위하여 한 것이 다. 3월 28일은 사강리 장날이었다. 사람이 모인 곳 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라고 하며 우리들이 가서 만세 를 불러서 사람들이 모이게 하였다.” “순사가 해산하라고 명하지 않았는가? 왜 명령에 따르지 않고 순사보에 저항하였나?” “나는 순사에게, ‘너도 조선사람이므로 독립만세 를 부르라’고 말하였을 뿐이다.” “순사가 퇴산하라고 명령하였음에도 퇴산하지 않 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순사에게 폭행을 가하여서 총을 맞은 것이 아닌가?” “나는 만세를 고창하라고 선동은 하였으나 폭행은 하지 않았다.” 경찰의 출동과 충돌 3월 26일 사강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사강 리 주재소 조선인 순사보 장용남(張龍南)은 관내 주 민들이 납세를 거부하는 불온한 상태임을 알았다. 그 날 오전부터 밤이 되도록 주민들이 사강리에서 독립 만세를 부른다는 보고를 받자 3월 27일 오전 8시 남 양경찰관 주재소에서 순사 다케우치(竹內皆吉)가 순 사보 2명과 함께 사강리로 출동했다. 순사보의 한 명 인 엄(嚴) 순사보는 양심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직 했다. 그 다음날인 3월 28일은 사강 장날이었다. 홍면옥 등 주도자 11명은 장날을 맞아 더 큰 시위를 일으키 고자 했다. 28일 오후 2시경 송산면 면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들은 국권회 복의 목적으로 태극기를 높이 세웠다. 태극기가 바람 에 힘차게 휘날리는 것을 보며 일동은 “조선독립만 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가 3월 26 일의 송산면 만세시위 보고를 받고 수원에서 달려왔 다. 그는 홍면옥 등 주도자 3명을 체포했다. 홍면옥 은 노구치의 체포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완강히 저항 했다. 노구치는 총을 꺼내 발사하며 제압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