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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상은 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1919년 3월 11일 조극환(曺克煥)이 주동이 되어 보통학교 학생과 주민들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켰으나 미리 계획이 일본군경에게 탐지되어 오히려 엄중한 수사와 감시만 강화된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산발적인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곧 중단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난국(難局)을 이겨내면서 그는 최한오(崔漢五)·조병식(曺秉植)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기로 뜻을 모으고, 읍내의 유지 조극환·정학순(鄭鶴順)·최민섭(崔旻燮)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오전 9시를 기하여 구림리와 읍내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구림리의 문죽정(問竹亭)을 임시 연락본부로 정하고 시위준비를 하였는데, 당시 군서면 면서기로 있는 김재홍(金在洪)과 최민섭이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태극기 50여매, 독립선언서 6백여매, 독립신문 5백여매, 독립가(獨立歌) 1백여매를 등사하여 영암 보통학교 학생인 김봉근(金奉根)·김영언(金永彦)·유인봉(柳寅奉)·이종구(李鍾謳)·이지봉(李枝奉)·천병권(千秉權)·진봉재(陳奉才)·박종련(朴鍾連)·채동팔(蔡東八) 등으로 하여금 배포케 하였다. 4월 10일 오전 9시, 그는 태극기와 유인물을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며 시위군중의 선두로 나아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었다. 이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 중심가로 시위·행진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심한 병고로 보석되어 귀향하던 중, 서호강(西湖江)의 배안(船中)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