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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로이였은데 슬하에 4남을 두어 장은 진호 차는 영호 형호 문호이였다. 서기 1919년 기미에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지자 이는 백의민족의 정기를 세계만방에 떨친 것인데 국내는 물론이요. 국외에도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곳이라면 봉기되어 적수공권으로 살벌한 총인에 항거했으니 얼마나 장렬한 일이였든가. 우리 함안에서도 3월 19일 시일을 기해 정오에 우봉 안지호 중형 도남 재형 종제 백산 재성 국암 안재휘 백천 이희석 이종찬 조용환 한종순 등 동지들과 숙의를 거덥하여 거사를 했다. 태평루 앞에서 2천여 군중을 지휘하여 선두 1인으로 과감이도 왜정의 관리들을 몰아내고 기관들을 파괴하며 문서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왜경에게 체포되어 마산감옥에 수감되었다. 당년 29세의 열혈남아로서 일편단심 애족애국뿐이였다. 포연탄이가 두려울리 없다. 고문이 심하면 심할수록 반사적으로 저항도 강했다. 이로서 유인하고 멸로서 협박해도 백절불굴의 동요없이 늠늠하여 종시일관했으니 흉중에 함양되어 있는 정기를 알 수 있다. 대구고등법원에서 2년 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옥햇는데 고문으로 받은 여독으로 거이 반신불수였으며 왜관의 감시가 심했으나 초지에 변함없이 조국광복의 이념으로 신미년에 종제 재성공과 같이 국외로 탈출하여 상해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셨다. 고향에서 모친과 형이 별세하셨다는 것을 듯고 을해년에 일시 귀국하셨는데 생계를 위하여 일본에 가서 있는 진호 형제의 주선과 갖여있는 포부로서 도일했다가 을유년에 광복의 숙원이 풀렸으나 환희도 다 못한 채 1961년 신축 7월 6일에 향년 70세로 별세하셨는데 갑인 10월 8일에 반장되어 사릉리 오도봉 해좌로 배위와 합분이시다. 1977년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의 포상을 받았는데 1983년에 경남지사와 함안군수가 묘역을 정화하게 하니 그 뜻을 같이 하며 돌을 세워 행적의 제일을 기록한다.
파란만장 그 행적을 붓으로 다 하리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