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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3회) • 수원의 독립만세시위(3) - 수원군 장안면· 우정면 만세시위(1) 113 장의 90% 이상을 친일 적 인사로 교체하였다. 또한 대개 자연 촌 락 단위의 이전 동(洞) 과 리(里)를 3~5개씩 인 위적으로 묶어 구(區)로 하고, 구장(區長)을 두었 다. 이렇게 하여 조선총 독부는 지방 사회를 일 사불란하게 수직적ㆍ일 원적ㆍ일방적 지방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이 일은 1910년 병합부터 시작하여 1918년 말에 완성했다. 장안면에는 김현묵 면장 밑에 최낙균 등 5명의 면 서기가 있었다. 우정면 면장은 최중환이었다. 면에는 각 구장들에게 연락 임무를 하는 소사가 한 명씩 있 었다. 각 구장들에게도 동리민에게 구장의 연락 임무 를 수행하는 소사가 한 명씩 있었다. 이런 향촌의 구 조가 특히 이 지역 만세시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면장과 구장은 이 지역 독립만세 시위에서 입장이 확연하게 갈렸다. 면장은 일제 편에 서서 주민들을 협박하거나 설득하여 시위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민 중과 직접 접하는 구장들은 주민 편, 민족편에 섰다. 장안면처럼 구장들이 직접 시위를 주도하는 경우도 많았다. 구장들은 조직적으로 주민들을 동원했다. 구 장들은 주민들과 함께 면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면장 과 면서기들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동참하도 록 압박했다. 면장 면서기들은 장안면처럼 시위대의 압박과 위 협에 마지못해 참여하거나, 우정면장처럼 도망쳤다. 장안 우정면 만세시위는 일제가 1914년 지방행 정구 역 전면 재편을 통해 향촌사회를 수직적, 일원적, 일 방적으로 장악하려 한 결과 면장 중심의 식민지 질서 와 구장 이하 기층 향촌사회의 민족적 정서가 이중구 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천도교 여기에다 장안 우정면과 주변 일대에는 일찍이 동 학이 전파되어 1910년에는 천도교 남양교구가 있었 다. 천도교 남양교구에는 장안면 수촌리 거목골, 기 림골, 장안리, 화산리, 덕목리, 팔탄면 고주리, 고온 리에 8개 전교실이 있었다. 이 지역 천도교 전교실들 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1904년 천도교 갑진개혁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1918년 천도교의 독립운동 자금 헌납운동 때에는 전답을 팔아 중앙총부에 거액 을 헌납했다. 종교적 열성과 결속력이 대단한 지역이 었다. 사전 조직화 백낙열은 장안면 수촌리 구장이자 천도교 남양교 장안면 수촌리 구장이자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도자 벡낙열. 그 는 장안면과 우정면 3·1운동 전 개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백낙열의 집터(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