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page


113page

지치에서 대거하여 서천 구병동에 진군하니 군세는 1천 수백에 달했으며 비인 판교 남포에 이르러서는 2천을 규합하고 결성 황천을 거처 26일에는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래 12일간 수성에 선전하였으나 윤 4월 9일 성을 다시 실함하자 공은 수하를 해산하고 일단 구룡 향제로 돌아와 잠시 머물렀으나 오호라 이것이 처자와의 마지막 해후일 줄 뉘 알았으랴. 공은 6월 청양 추치에서 4백의 정병을 모아 노성 연산으로 나가 일군과 싸우다가 처남 조병두가 피격 살해되었다. 동월 17일 적은 죽절리 본가로 대들어 독자 성문을 타살하니 미구에 부인 박씨도 순절하시었다. 공은 그 청을 모른채 온양 공주를 거처 예산 한곡에서 족형 이남규 공과 재기코저 하였으나 일진회의 밀고로 피집되어 익 1907년 2월 평리원 판결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6월에 감 일등하여 지도로 유배되시고는 11월에야 특사로 풀리었다. 1908년 4월 한성일보 사건으로 법정에 끌려간 일이 있었는데 9월에야 전문으로 부인이 자진하였음을 알았다. 공은 더욱 굳세게 항왜기의코저 하였으나 역불급을 개탄하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였으니 1912년 2월 옥천으로 의사들이 모여 제고를 드린 후에 집산을 거듭하다가 기미만세운동에 몸소 가담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당년 각도대표를 연계하여 한성정부를 수립하기에 주력하였으며 즉후에는 상해임시정부에 대표를 급파하여 내국의 계통을 계승케 하였으니 장하도다. 배달국 반만년의 법통은 이로써 망명 정부에 이어지게 되었다. 이일로 동년 10월 공은 다시 수감되어 6개월의 실형을 당하였는데 기후 언제 출옥하였는지 어떻게 서거하였는지도 알 수 없어 여기 생가지에 유허비를 근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