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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2025년 10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② 계를 구축했다. 그는 ‘조선통치의 2대 목표’로 재임 중 일왕의 조선 방문과 조선에 징병제 실시를 정 했는데, 전자는 성사시키지 못했 으나 후자는 이루었다. 조선인 강 제 징병의 물꼬를 텄다. 미나미 지로와 창씨개명(創氏改 名) 강요 미나미가 획책한 민족 말살 정 책 가운데 가장 잔인한 것이 창씨 개명의 강요이다. 미나미는 1939 년 11월에 조선민사령(朝鮮民事 令)을 개정하여 1940년 2월 11일 부터 8월 10일까지 모든 조선인 은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어 신고하도록 강요하였다. 미나미 는 창씨개명은 조선인 우대정책 으로 일본인들과 이름이 같아야 민족적 차별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일본의 창씨개명 강요는 우리 민족의 해체를 강제하는 행위였 다. 장자상속제인 조선과 서양자 제(庶養子制)·이성양자제(異姓養 子制)를 허용하는 일본과는 근본 적으로 다르다. 조선은 후손이 끊 기게 되면 같은 성씨를 가진 다른 집안의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을 양 자로 들인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후손이 끊기면 사위를 양자로 받 아들이거나 다른 성씨라도 받아 들여 성을 바꾸어 그 ‘이에(家)’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다. 일본에 서는 창씨개명이 보통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절대 하지 않겠다’라 는 점을 강조할 때 ‘내 성을 갈 겠 다’라고 한다. 그만큼 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러 나 일본에서는 그러한 말이 성립 이 되지 않는다. 성을 바꾸는 것이 워낙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창씨개명은 ‘이에(家)’ 중심인 일 본의 ‘우지(氏)’ 제도를 조선에 강 제 시행하여 부계 혈통 중심의 가 족제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자는 의도였다. 조선인의 창씨개명에 대한 반발과 저항은 예견된 사실 이었다. 창씨개명은 시행령 발효 4개월 뒤인 1940년 5월 중순까지 총 호수 428만 700여 호 중 7.6% 에 불과했다. 총독부는 경찰 동원은 물론이 고, 관리와 황민화운동 단체인 국 ➑ 미나미 지로의 육군 장성 시절 모습 ➒ 미나미의 고향인 분고다카다 상점가 전경(필자 촬영) ➓ 1940년 경성부청(현재 서울) 민원국 호적과에 찾아가 창씨개명 등록을 하는 경성부 주민들(이상 위키백과 제공) ➑ ➒ 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