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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2025년 9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② 다” 와와 외치는 겁니다. “이게(이 놈이) 진짜”라는 말입니다. 손에 는 모두 번쩍번쩍하는 일본도, 몽 둥이, 대창, 철창 같은 것 들을 들 었습니다. 거기서 들으니 조선 사람들이  도둑질하고 불 놓고 우물에 독약 을 치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면서 청년단 재향군인  또 일반 시민을 일으켜 칼로 죽창 으로 마구 죽인다는 것이요. 여기  잡아넣은 것은 보호한다면서 하 는 짓이라는 겁니다.” 야마나시는 이러한 상황을 그 대로 묵인한 계엄사령관이었다. 이런 그가 조선의 4대 총독이 되 었으니 당시 식민지 조선의 분위 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총독이 된 사이토 마코토 야마나시 한조의 후임으로 사 이토 마코토가 제5대 조선총독으 로 부임하였다. 사이토로서는 두 번째 조선총독(1929.8~1931.6) 이었다. 그 뒤로도 일본 중앙 정치 계의 핵심 인물로 내각총리대신 (1932.5~1934.7), 내대신부(內大臣 府) 내대신(1935.12~1936.2.26) 등의 직위에 있었다. 그런데 사이 토가 조선총독과 일본 권력의 중 심부에 있을 때 조선인들의 폭탄 시위가 많았다. 강우규, 김상옥, 나석주 등의 국내 시위가 있었고 해외에서도 천황을 비롯한 여러 고위직에 대한 폭탄 투척 의거가 있었다. 사이토가 문화정치를 표 방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 다는 사실을 반어적으로 입증하 는 것이다. 강우규 의사(1885~1920)는 사 이토가 부임할 당시 60세 이상의 고령이었음에도 사제 폭발물을 만들어 남대문역 앞에서 투척했 다. 강의사는 한의사로 청년들에 게 신학문을 가르쳤는데,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만주에 건너가 광동중학(光東中學)을 세우는 등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 나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1919 년 9월 2일 서울역에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사이 토는 죽지 않았고 무라타[村田] 육 군소장 등 주변 인물들이 중경상 ➍  육군 장성 시절 예복차림의 야마나시(나무위키 제공) ➎  일본 화가 가와메 데이지(1889~1958)가 그린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스케치(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    ➏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 동상(서울역 앞, 필자 제공) ➍ ➎ 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