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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2024년 4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01회) 하여 독립만세 소리가 읍내를 진동했다. 놀란 경관이 출동하여 주모자로 보이는 십여 명을 검거하고 해산 시켰다. 몇 명은 다음날 풀려났으나, 7명은 계속 구 금되어 있었다. 이에 시내 상점들이 다수 문을 열지 않고 철시로써 항의했다(『매일신보』, 1919.3.29). 3월 26일 전날의 탄압과 주도자 구금에 항의하여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고 철시시위에 돌입했다. 3 월 27일에는 전체 상점의 4할에 해당하는 약 60호 의 철시로 확대되었다. 3월 28일에는 읍내 각지에서 20~30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짖는 등 산 발적인 만세시위까지 일어났다. 3월 29일 기생시위 수원 읍내의 독립만세 분위기는 3월 29일에도 이 어져 약 300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날 오 전 11시 반경 수원 기생조합 소속 기생 약 30명이 화 성 행궁 내 봉수당의 자혜의원으로 검사를 받기 위해 가다가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자혜의원 은 현재의 도립의료원과 비슷한 의료기관으로 1910 년에 세워졌는데, 수원행궁 내 봉수당 건물을 이용하 여 진료를 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김향화(金香花)는 본명이 김순이 (金 順伊)로, 1897년 7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나 당시 만 22살이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나 18세에 이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수원기생조합 소속 기생이 되었다. 1919년 당시에는 수원면 남수리의 수원기생조합 취체역(오늘날 이사)을 맡고 있었다.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운치를 더하고, 검무 · 승무 · 가사 · 시조 · 경성잡가 · 서관 (西關, 서북)소리 · 양금치기에 능했는데, 탁음이 섞인 듯한 애원성(哀怨聲)의 목청은 사람의 마음을 구슬프 게 한다고 했다. 30명의 기생들은 병원 안으로 들어가서도 뜰 앞에 서 만세를 잇달아 부르다가 병원에서 내쫓겨 다시 경 찰서 앞으로 갔다가 해산되었다. 김향화는 주도자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녀에 대한 재판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당시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수원 삼일학교 아담스기념관 김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