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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➋ • 한국통감과 조선총독의 일본 현장을 가다 ⑩ 111 한 것으로 비치는 것은 조선의 근 대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처 럼 보이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그 러나 그 실상은 일본제국주의 세 력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떻든, 조선총독 우가 키는 우리 민족의 처단 대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임 시정부에서는 1932년 3월에 유 진만(兪鎭萬, 1912~1966) 등 한 인애국단원을 파견하여 우가키 처단계획을 세웠다. 유진만 등 단 원들이 국내로 들어와 활동을 전 개했으나, 4월 7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성공 하지는 못했다. 유 진만은 6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하였다.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미나미 지로는 역대 총독 중에 서 데라우치 마사다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함께 악명이 높다. 총 독 중의 총독이라고 했는데, 그만 큼 식민지 조선에 대해 가혹했다 는 의미이다. 미나미 총독 시기의 주요 정책들을 보면 창씨개명(創 氏改名), 내선일체, 만선일여(滿鮮 一如), 황국신민 서사(誓詞) 강요, 조선교육령 개정, 지원병제도 등 민족말살과 관련된 것들이다. 당 시 그의 조력자는 학무국장 시오 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로, 정신문화와 교육에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미나미는 규슈 오이타현 분고 다카다[豊後高田] 출신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6기로 졸업한 뒤, 1903년 육군대학을 나와 기병 제 1연대의 중대장으로 러일 전쟁 에 참전하였다. 1906년 관동총독 부 육군참모, 1917년 군무국 기 병과장, 1919년 지나(支那)주둔군 사령관 등을 역임한 뒤, 1927년 에 참모차장에 취임하였다. 제1 차 중국 산동전투에서는 전면 침 략을 주장하였다. 일본군 제16사 단장을 거쳐 1929년 조선군사령 관이 되었다. 1930년에 육군대장 으로 승진하였고, 1931년에는 와 카쓰키 레이지로[若槻 礼 次郞] 내 각의 육군 대신, 1934년 관동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1936년 에 2·26사건의 책임을 지고 8월 에 예편과 함께 조선총독이 되었 다. 1942년 5월에 조선총독에서 물러난 뒤,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 으나,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54년에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 다가 1년 후에 자가에서 사망하 였다. 조선 총독 미나미의 행적 일본이 1937년 7월 중일전쟁 을 일으키자 미나미는 전시체제 를 빙자하여 사회통제를 한층 강 화하였다. 지원병제도 실시 및 조 선교육령 개정을 비롯해 ‘황국신 민서사’’ 제정, 일본어 상용화, 창 씨개명, 신사참배 등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추진했다. 우선 국민 총력운동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을 전개해 한국인들을 기만적으 로 황국신민으로 의식화 하여 자 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유 도했다. 그리고 조선교육령을 개정해 민족의식의 말살과 황민화를 꾀 했다. 또한 모든 행사에 앞서 ‘황 국신민서사의 제창을 강요했다. 이를 기반으로 지원병제도를 실 시해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 아넣었으며, 국민징용법에 따라 한국인을 강제 징용했다. 한편 ’선 만일여(鮮滿一如)‘란 표어 아래 만 주의 관동군과 경제·문화·치안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긴밀한 협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