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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➋ • 한국통감과 조선총독의 일본 현장을 가다 ⑨ 111 군’으로 불리며 1925년에 군에서 물러났다. 그는 1918년부터 2년 가량 육군대신과 차관 재임 기간 에 러시아 파병 기밀비 2천만엔, 러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1천만 루블 상당의 금괴 등을 가로챘다 는 이른바 ‘시베리아 금괴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육사시절 단짝으로 조슈[長 州]군벌 출신인 수상 다나카 기이 치[田中義一]는 야마나시를 조선 총독으로 발탁하였다. 야마나시가 부임하자 정무총 감 유아사 구라헤이[湯淺倉平, 1874~1940]가 사직하고,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 1876~1947]가 부임하였다. 고다마는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던 이력이 있으며(1905~1916), 아버지가 육군대장 고다마 겐타로[兒玉健太 郞]이고 장인이 데라우치 마사타 케였다. 그러므로 야마나시의 임 명은 실제로 조슈군벌이 다시 온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야마나시는 ‘야마나 시 총독 독직(瀆職) 사건’에 연 루되어 2년이 채 안되는 기간만 (1927.12~1929.8) 재임하였다. 야마나시는 부산의 미두취인소 (米豆取引所) 설립허가와 관련된 5만원 뇌물 사건과의 관련으로 소환되었던 것이다.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묵인한 야마나시 한조 야마나시의 조선총독 재임 기 간이 짧았고, 그나마 독직사건으 로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잘 알려 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관동대 지진 때 조선인들에게 죄를 뒤집 어 씌워 학살을 자행하게 한 배후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은 그 규모가 커서 도쿄[東 京])의 3분의 2를 초토화 하였다 고 한다. 당시 도쿄에서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악의적으로 날조 된 악감정은 함석헌 선생의 『씨ᄋᆞᆯ 의 소리』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파출소를 지나 그 옆 골목으로 막 꺾어지려는 순간, 어디서 오는 지 사람의 떼가 갑자기 몰려들어 “고레가 홈모노다. 고레가 홈모노 ➊ 야마나시 한조(위키백과 제공) ➋ 일본군 고위 장교 시절의 야마나시(일본 요시즈카문고 제공) ➌ 야마나시 한조의 출생지인 히라쓰카 시가지의 모습(필자 촬영) ➋ ➌ 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