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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1회) • 수원의 만세시위(1) 111 이병헌(李炳憲)의 『3 · 1운동비사(三․ 一運動秘史)』에 따르면, 3월 1일 서울과 동시에 수원 북문안 용두각 [華虹門]에 수백 명이 모였다. 경찰이 군중을 해산시 켰으나, 군중은 이리저리 흩어지는 척하다가 만세시 위가 시작되었다. 만세소리를 듣고 각처에서 모여든 군중이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김세환의 활약 수원 출신 김세환(金世煥, 1889.11.18~1945.9.16) 은 서울의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주오[中央]대학 에서 공부한 후 돌아와 얼마간 수원상업회의소에 근 무하였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 밀리의 후원을 받아 이하영(李夏榮) 등이 세운 북감리교회 매일학교를 기 초로 1915년 삼일(三一)남녀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 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1919년 2월 김세환은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 선언 계획을 들었다. 박희도는 서울의 감리교 지도 자로서 YMCA 간사를 맡고 있으면서 3 · 1운동에 청 년 학생들을 참여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김세 환은 이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충청남·북도와 수원· 이천 등지를 담당하여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거사를 도왔다. 김세환은 3월 1일 독립선언 후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년 7개월의 긴 재판 끝에 1920년 10월 무죄로 석방되었다. 3월 16, 23일 3월 16일 수원장날을 이용하여 수원 화성 동문 안 연무대(練武臺)와 팔달산 서장대(西將臺)에는 수백 명 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종 로 를 통과하여 시위행진을 했는데, 경찰이 소방대 및 헌병과 합동으로 시위를 제지하고 주모자를 검거하 였다. 이러한 검거에 대해 시내의 상인들은 전부 철 시를 단행하며 맞섰다. 기세에 눌린 일제 경찰은 검 거했던 사람들을 석방했다. 3월 23일 서호(西湖)에서는 일형면 등 수원군 주민 7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시위를 시작하여 수원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수원역 앞 은 일본 경찰과 헌병대 및 소방대가 이들을 막고 있 었다. 이에 시위대는 일본 경찰 등의 제지를 받고 강 제 해산되었다. 3월 25일 이후 수원읍내 3월 25일 수원 장날이었다. 수원의 경찰은 시장 여 러 곳에 경찰서장 훈시를 붙이고 만일을 대비해 경계 를 펴고 있었다. 오후 3시 40분경 갑자기 시장 남쪽 의 미곡시장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년 학생의 선창에 따라 약 20명의 학생과 노동자가 시 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수백명의 장꾼들이 호응  1915년 경 팔달문 주변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