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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 - 공직자 재산 등록, 금융 실명제(1993), 지방 자치제 등을 실시하였지만 사회 전반의 개혁 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또한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12·12 군사정변과 5·18 민주화 운동을 재수사하고 전두환, 노태우 등을 구속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권 말기 외환위기 를 초래하면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여 국가부도사태를 막았다. 그 다음으로 당선된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최초의 여야 정권 교체를 통해서 형성된 정부였고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하면서 강력한 경제 구조조정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을 실시하여 금강산 관광사업의 시작과 남북 정상 회담, 6·15남북 공동 선언을 이끌어내었다. 부당한 권력의 희생자, 권인숙과 박종철 권인숙은 대학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비합법단체에서 활동하던 여성이다. 그녀가 1986년 6월 부천 경찰서에서 추악한 성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다. 권인숙의 진솔하고 도도한, 그리고 당당한 눈물의 법정 발언은 독재 정권의 부도덕성과 폭력성을 들추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이번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터졌다. 박종철은 반정부운동을 하던 친구의 행방을 대라는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들의 요구에 불응하며 끔찍한 고문을 견디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1987.1.14) 다음 날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이 죽은 까닭 을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 같이 있던 치안 본부 대공 담당 차장은 "책상을 '탁' 치니 박군이 '억!'하고 쓰 러졌다."라고 덧붙여 설명하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위 발표는 시민적 공분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어느 시민은 "박군 관계 신문 기사를 보면서 부부가 함께 울어버렸던 우리들의 아픔을 당신들은 정녕 아는 가?"라는 글을 언론사에 보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은 80년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을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들의억눌린 감정은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했다. 관련자 처벌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시위가 급 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정국은 중대 고비를 맞게 된 것이다. 6·10 국민 대회 선언문(일부) 오늘 우리는 전 세계 이목이 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희망 찬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