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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하늘,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 석 달 만에 다시 밟은 보은 땅, 덜컥 내려앉은 하늘에서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금치에서 물러나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들은 11월 25일과 26일 이틀간 전라도 원평과 태인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도 다시 패배하여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이 연합부대를 해산했다. 터지고 찢겨져나간 살가죽에 솔잎을 짓찧어 붙인 채 태인에서 정읍으로, 입암으로, 순창 임실 장수 무주 황간 영동을 거쳐 수많은 전투를 치루면서 용산 청산을 지나 보은에 돌아왔다. 돌아온 보은에는 관군들이 부숴버린 장안마을 폐허의 초막(草幕)들과 살갗을 저미는 매서운 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문을 부수고 보은 관아를 점령한 우리 부대는 일본군과 민보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척후병의 전갈을 받고 북실마을로 이동했다. 날이 저물고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자 모닥불을 지피고 얼어붙은 몸을 서로서로 기댄 채 온기를 아꼈다. 끝없이 쏟아지는 폭설과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흰 어둠이 온 마을을 뒤덮었다. 12월 18일 꼭두새벽,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에서 적들의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최후의 결전! 골짜기마다 까마귀에게 눈알 뺏기고 심장 파헤쳐진 채 나뒹굴던 벗들이여 형제들이여. 아, 수많은 농민군들이여. 우리의 피와 살과 뼈가 흩어진 이 산하에 고이 잠들라. 그대들을 따라 저 쏟아지는 눈보라 뚫고 왜놈들의 총구를 헤치고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가리니. 기필코 눈부신 봄을 맞으리니. 진달래 되어 조선 신라 굽이굽이 꽃불 밝히리니. 갑오년(1894) 12월 무명 동학농민군